2017-11-23 09:28

기고/ 겨울철 북태평양 항해기

변호사가 된 마도로스의 세상이야기(4)
성우린 법무법인 대륙아주 변호사
 
“3등 항해사, 겨울철 북태평양을 항해해봐야 진정한 항해사가 된다네.”

승선 시절 선장님이 선교에서 당직을 서고 있는 필자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당시 필자가 3등 항해사로 첫 승선했던 선박은 2008년 12월 인천에서 출항해 미국의 타코마항(시애틀에서 차로 1시간 거리에 위치한 항구)으로 향하고 있었다. 일본의 츠가루 해협(훗카이도와 혼슈 아오모리 현의 사이에 있고, 동해에서 태평양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다)을 통과해 태평양으로 막 들어서는 길목이었다.

선장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대학 시절 교수님과 선배들로부터 ‘전세계에서 가장 거친 항로’라고 익히 들었던 ‘겨울철 북태평양 항해’를 시작하게 됐기 때문이다. 필자를 포함한 선원들은 이미 선장님의 지시로 태평양에 진입하기 전부터 황천항해(荒天航海)를 대비, 선박의 안전장비, 창고의 각종장비부터 각 자신들의 방에 있는 살림살이들까지 끈으로 단단히 고박을 해 놓았다.

일본의 츠가루 해협을 통과해 미국의 시애틀까지는 대권항로(지구의 중심을 통하는 원의 호를 대권이라고 한다. 두 지점간의 최단거리는 이 호를 따라 있다. 비행기도 선박과 같이 대권항로로 움직인다. 구글 맵 등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츠가루 해협, 아투 섬, 시애틀을 곡선으로 그려 보면 이해가 쉽다)로 진행하는데, 선장님께서는 최소한 태평양과 베링해의 경계에 있는 알류샨열도의 아투 섬 서편을 지나가는 변침점(變針点)까지는 최소 풍력 7(초속 15m) 이상의 황천항해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뷰포트 스케일(Beaufort Scale) 풍력 7은 큰 나무 전체가 흔들리고 파도는 크게 일어 흰 물결이 생기는 바람의 세기에 해당한다.

아니나 다를까 그 날부터 축구장 크기의 약 두 배에 해당하는 선체길이 200미터에 달하는 우리 선박도 겨울철 북태평양의 저기압 앞에 종잇장처럼 흔들리기 시작한다. 배 멀미를 하지 않는 사람도 속절없이 어지럽고 속이 메슥거림을 느낀다. 선교에서 당직을 서고 휴식을 취할 때에도, 침대에 누워서 끈으로 몸을 고정하지 않으면 방바닥에 구르기 일쑤였다. 잠을 잘 때 철판을 때리는 강력한 파도소리와 파도를 이기기 위해 ‘끼기긱’ 소리를 내던 선박의 소리는 이 세상에 품질이 좋은 어떠한 오디오로도 구현하기 힘든 강렬한 소리였다.

긴 항해 끝에 알류산 열도 위의 베링해로 넘어가자 그제야 파도가 잠잠해지고, 우리 선원들에게도 평화가 찾아왔다. 다시는 경험하기 싫은 공포의 항해였다. 항해사 생활을 마치고 겨울이 다가오는 이맘때가 되면 당시 겨울철 북태평양을 항해했던 생각이 불현듯 난다. 이 자리를 빌려 겨울철 북태평양 등 바다와 싸우며 불철주야 근무하시는 모든 선원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그리고 황천항해를 하는 과정 중 불가피하게 화물이 손상되는 등 손해가 발생하는 경우에도 해상운송인에게 법적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 간단히 살펴보자. 우리 상법 제796조는 ‘해상 기타 항행할 수 있는 수면에서의 위험 또는 사고’의 경우나 ‘불가항력’의 경우 운송인은 원칙적으로 책임을 면하고, 다만 상대방이 운송인의 과실을 입증하는 때에 운송인이 책임을 지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을 언뜻 읽어보면 운송인이 상기의 경우 무조건 면책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기 쉬우나, 이 조항은 운송인에게 ‘추정적인 면책’을 규정하고 과실문제에 있어 운송인의 상대방에게 입증책임을 전환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운송인에게 절대적인 법정면책을 인정한 것이라기보다는, 민사소송에서 승패를 좌우하는 ‘입증책임’을 완화해 운송인을 보호하는 조항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황천항해로 화물이 손상되는 등 손해가 발생하는 경우, ‘해상고유의 위험’이나 ‘불가항력’으로 보아 해상운송인을 면책시킨 사례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대법원도 “운송인이 불가항력에 의한 사고라는 이유로 그 불법책임을 면하려면 선적 당시 예견불가능한 정도의 천재지변에 속하고 사전에 이로 인한 손해배상의 예방조치가 불가능했음이 인정돼야 한다(대법원 1983년 3월22일 선고 82다카1533 전원합의체 판결).”라고 판시한 바 있다. 따라서 운송인은 황천항해라 할지라도 본선의 감항능력 유지의무와 운송물에 대한 상당한 주의의무를 다할 필요가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 성우린 변호사는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하기 전 팬오션에서 상선의 항해사로 근무하며 벌크선 컨테이너선 유조선 등 다양한 선종에서 승선경험을 쌓았다. 하선한 이후 대한민국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현재 로펌에서 다양한 해운·조선·물류기업의 송무와 법률자문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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