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06-13 17:29

바다와 나 그리고 통일

(주)한성선박 최풍남 대표이사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때 "대학입시공부는 안하고 무슨 유도부 수련회이
냐"는 부모님을 "다녀오면 더 열심히 하겠다"고 간신히 설득을 해서 꿈
에도 그리던 바다구경을 난생처음 서해안의 만리포해수욕장에서 하게 됐다.
서울에서 자라난 나에게는 뭐가 그렇게 좋았었는지 내내 히히덕거리며 한
기차여행도 좋아지만 저녁 어스름할 때 도착한 만리포 해수욕장의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장, 해가 막 저무른 후의 햇빛깔과 어우러진 푸르른 탁트인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순간 갑자기 헉 숨이 막히는 듯한 찬탄과 가슴속에 어
떠한 형언할 수 없는 경외심마저 들게 됐다.
그때 느꼈던 나의 바다에 대한 감정은 오랫동안 나의 가슴속에 남아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나와 바다와의 인연은 또다시 우연히 찾아왔다. 대학입시를
몇달 앞둔 어느 날 땀을 뻘뻘 흐르며 책과 씨름하고 있는 나에게, 평소에
마도로스가 꿈이라던 친구가 부산에 있는 한국해양대학을 소개하면서 이 학
교에 입학하면 세계일주도 할 수 있고 해군장교도 되고 무엇보다 특차시험
이므로 밑져봐야 본전 아니냐는 식으로 머리 식히려 부산에 가지 않겠느냐
고 제의를 해왔고, 대학입시에 떨어지면 어떡하나하는 막연한 불안감을 가
지고 있던 우리들은 요새말로 hedge하는 기분으로 몇명이 같이 가기로 했다
. 그러나 막상 부모님은 노발대발 가장 천한 계급인 뱃놈이 되려고 하느냐
며 반대하셨고, 평소 국립대학교를 선호하셨던 부모님에게 같은 국립대학이
므로 예행연습하면 일차시험에 도움이 된다는 명분으로 항도 부산항에 바다
를 다시 본다는 설레임속에 첫발을 내디디게 되었고, 그당시 왜 그리도 천
한 뱃놈이 되려고 하는 학생이 많았었는지 사상 유래가 없는 경쟁속에 같이
갔던 친구들은 우수수 낙엽 떨어지듯 떨어지고 까다롭다던 신체검사마저 나
혼자만 통과되는 해운을 안게 되었다.
여러가지 우여곡절 끝에 한국해양대학을 졸업하고 3등 항해사로 일본 선박
회사에서 그야말로 명실공히 뱃놈생활을 시작했다. 바다생활이 그야말로 나
의 천직이었는지 나는 세계를 떠도는 바다생활이 너무나도 즐거웠고 10개월
만에 주어지는 1개월의 유급휴가도 반납한 채 유능한 선장으로서의 꿈만을
키워나갔고 당시 나의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하루빨리 실력을 인정받
아 선장을 남보다 하루라도 먼저 하는 것이었으므로 정말 열심히 일했고 덕
분에 그 회사에서 일등항해사를 동기생은 물론 선배들보다도 먼저 할 수 있
었다. 연공서열을 중시하는 당시상황에선 파격적인 인사였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나를 바다에서 생활하게 놔두지 않았다. 1980년대 초
4년여의 승선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보니 한국은 경제성장이 한창이
고 규모의 경제가 막 시작되면서 해운의 중요성이 다른 어느 때보다도 절실
하게 대두되고 있었고 한국해운시장에서도 이제 막 용선바람이 불고 있었다
. 당시 용선의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던 중견 선사에서 일손부족으로 휴가
기간중이라도 장깐 일해 줄 수 없겠느냐는 제의를 받들인 나는 그후 용선업
의 매혹에 푹 빠져버려 바다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고,
나는 해상생활도 필요하지만 우리 낙후된 한국해운을 선진국 수준에 올리
고 세계 제일의 해운국으로 만들기 위해선 육상에서 일하면서 나의 변변치
않는 능력을 발휘하여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
구나하고 나만의 명분을 만들며 천직으로 여기던 해상생활을 포기해 버렸다
.
그후 나는 해운의 기초가 되는 원가절감의 현장인 항만현장, 시간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용선운항, 직접 수익을 만드는 용선영업, Telex로 주고받는
해외영업, 작은 액수도 소중히 하는 국제 복합운송영업, 세계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프레이트 포워더, 중량물 운송을 전문으로 한 국제해운대리점업,
유럽 ship operator의 극동아시아 주재원 등 해운 관련분야를 두루 섭렵하
게 되었고 우리해운도 어느새 선진국 반열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1990년대초 아직 우리나라는 철저한 반공국가로서 베트남, 중국 및
러시아 등 공산권 국가와 국교수립도 되지 않았고 소위 북방국가와는 교류
도 거의 없었으므로 북방국가와 교류에 있어서 물자를 운송하는데 상당히
어려움이 따르고 있었다. 그래서 북방국가를 전문으로 하는 운송회사의 필
요성이 대두되어 북방운송을 전문으로 하는 한성선박이 태동하게 됐다. 지
금은 회사의 인원 및 조직도 비대해져 전세계를 상대로 해상운송을 하고 있
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베트남/중국/러시아 등 북방국가의 화물만을 운송
하는 회사가 많지 않아 우리는 밀려드는 주문에 직원들과 함께 온 밤을 새
기 일쑤였다.
하주들 사이에 북방국가 운송회사로 우리회사의 명성이 차츰 높아가고 있을
때쯤 어느날 북한의 화물을 수송할 수 없겠느냐는 제의가 들어왔다.
그 당시 아주 미미하게나마 남북한간에 물자교류가 있었으나 운송수단이 없
어 홍콩을 경유해서 남북한을 오고 가는데 톤당 몇백 달러에 달해 당시 한
국/중국간의 운임의 10배이상이나 되어 도무지 수송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
다. 우리도 처음에는 너무 물량이 미미해 정중히 거절하였으나 그 때 내머
리를 스치는 통일에 대한 어릴적부터의 생각이 떠올랐다.
황해도 서흥이 선조대대로의 고향인 부친은 가족 대부분 월남했으나 함경남
도 영흥이 고향인 어머니는 형제자매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젊은 나이에 모
든 가족을 이북에 둔 채 아버님을 따라 혈혈단신 월남하셔서 명절때만 되면
이북의 가족이 그리워서 흐느끼시는 모습을 어려서부터 보아왔던터라 어릴
적부터 분단의 아픔을 몸소 체험한 나는 스스로 누구보다도 하루빨리 통일
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중의 하나가 됐다.
그래서 우리는 손해를 보더라도 남북교류가 활성화되면 민족의 오랜 숙원이
었던 통일이 앞당겨지지 않을까하는 사명감에서 드디어 1백톤의 화물을 선
적키위해 1천6백톤 화물선을 베트남에서 용선해 지난 1992년말에 인천/남포
간에 투입하기에 이르렀다.
남들이 미친짓이라며 어떻게 1천6백톤급 선박을 고작 1백톤을 싣기위해 그
것도 통신 등 연락도 잘 안되는, 더군다나 가면 함흥차사가 될지도 모르는
지역에 선박을 투입하나하고 염려했을 때도 나는 오로지 우리는 한민족이고
통일을 반드시해야 한다는 역사적 소명의식으로 버텨나갔다.
그후 근 8여년동안 우리는 항로의 계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불거나 폭풍우가 몰아쳐도 아무리 미미한 화물이라도 하루도 빠짐
없이 선박을 투입해 국내외적으로 명실공히 자타가 인정하는 북한화물 운송
의 전문가가 됐다.
지금도 우리는 2백TEU급의 선박을 계속 투입하지만 선복량의 4분의 1인 50T
EU도 선적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북한물류비가 너무 비싸다, 중국 운임의 3배다,
어떻게 미국운임과 비슷하느냐고 하기도 하는데, 이럴 때가 가장 괴롭다.
단순비교만 하더라도 중국은 한 항차가 3일이고 화물도 많아 3일만에 운임
이 500TEU×美貨달러 3백달러 하면 미화달러 15만달러가 운임수입이고 미국
은 15일만에 5천TEU×미화달러 1,200하면 60만달러가 운임인데 반해 우리는
10일만에 4만달러의 운임으로 용선료, 선원비, 유류비, 항비 등을 지불해
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남북한간의 물자교류를 활성화시
키는 길만이 남북간의 신뢰를 증진시킬 수 있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통일이
앞당겨 질 수 있다는 투철한 사명의식으로 수익성에 관계없이 물류비를 절
감해 왔으며 철저한 자구노력을 통해 앞으로도 계속해서 절감시켜 나갈 것
이다.
오햇동안 북한관련운송을 하면서 여러가지 에피소드가 있는데, 그중에 가장
생각나는 것이 우리 선박을 북한의 청진항에 화물선적을 위해 투입했으나
화물이 미처 준비가 안되고 생산이 지연되어 무려 1백20여일이나 대기해 많
은 손해가 난 기억이 난다. 넉달동안 선박을 대기시키다니 기가 막힐 일이
아닌가. 그외에도 혹한의 추위로 남포항이 얼어붙어 무려 20여일동안 얼음
속에 갇혀있어 화물이 급한 화주의 빗발같은 독촉을 받은 기억, 서해 교전
당시의 긴박한 상황 등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긴장된 시간과 돌발적인 상황
의 연속이었다.
그동안 우리는 투철한 역사적인 사명의식으로 화물량의 과다에 관계없이 정
기적으로 선박을 투입했지만 국내외의 여러가지 사정으로 몇번의 위기를 맞
기도 했다.
국내의 IMF사태, 북한의 NPT탈퇴, 잠수함 침투, 서해안 교전 등 정말 아슬
아슬한 사건등이 많았지만 국민정부의 초지일관적인 햇빛정책으로 어느정도
신뢰감이 형성된 것이 가장 큰 성과라고 생각된다.
이제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통일이 앞당겨 질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되었으
면 하는 마음 간절하며 아울러 남북한간 해운회담이 조속히 개최되어 낙후
된 북한의 항만개발, 환적화물 비용절감 등 산적한 남북해상운송의 현안문
제들을 의논해 상호 물자교류 증진에 기여했으면 한다.
끝으로 우리가 살고있는 한반도는 지구상에서 물자교류가 가장 활발하게 이
루어지고 있는 지역의 하니인 동북아, 즉 일본/중국/러시아의 가장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나 홍콩, 싱가포르나 네덜란드의 로테르담항처럼 물류중심지
역할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남북정상회담을 시점으로 해 한반도 인근에
서 물류의 자유로운 이동을 저해하는 모든 장애요인이 제거되기를 희망하며
우리 한반도는 삼면이 바다인 유리한 지정학적 위치를 십분발휘해 역내의
모든 물자이동을 관리, 처리할 수 있는 명실공히 물류대국이 돼야 할 것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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