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2-18 10:48

칼럼/ 21세기의 원년(元年)은 2014년,

수필가 白岩 / 이경순
우리는 21세기를 위한 ‘징비록’을 써야할 때
1814년, 1914년, 그리고 2014년을 돌아보며

과학적 근거가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지난 두 세기(世紀)를 되돌아보면 새 세기는 01년이 되는 전환점에 시작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와 20세기는 1814년과 1914년에 변곡점을 맞았다.

20세기 첫 10년은 희망과 낙관론으로 차있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는 19세기 발전이 계속 가속화할 것처럼 보였다.

1913년의 미국·유럽은 세탁기, 가스레인지, 전기조명, 옥내 화장실, 냉장고, 전화기, 라디오, 자동차 등의 발명·발전으로 풍요로운 삶을 향유하고 있었다. 어린이 노동을 금지하고, 무상교육을 제공했으며 값싼 비료가 나와 작물 수확량을 3배로 늘려놓았다. 삶의 질이 전례 없는 속도로 개선되고 있던 차에, 1914년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앞서 1814년엔 세계가 또 다른 의미의 새로운 전환을 맞았었다. 나폴레옹 전쟁 후 빈 회의와 오스트리아·프 로이센·러시아·영국 사이의 4국 동맹협정에 의한 이른바 ‘유럽협조체제’가 출범하면서 세계열강들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서 식민지제국을 완성하는 단계로 넘어갔고, 이후 최장 기간 전반적인 평화가 이어지게 됐다.

이처럼 1814년과 1914년은 각각 역사에 극적인 변화를 남기면서 19세기와 20세기의 진정한 시작을 알리는 해가 됐다. 어떤 이들은 2001년 9·11 테러를 20세기를 덮고 21세기를 여는 중대한 획정 구분 점으로 보지만,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다. 모두 엄청난 충격을 받은 테러이기는 했지만, 본질상 21세기 시작이 아니라 20세기 끝자락 사건으로 봐야 한다. 역설적이지만 21세기는 시작되지 않았다. 러시아의 옛 소련, 중국의 중화주의 복귀 야심, 이에 대응한 미·일 군사동맹 강화와 일본 군국주의 발호, 북·중 관계 변화와 북·러시아의 새로운 밀월 등 심상찮은 현상들이 올해를 21세기 원년으로 기록하게 할지 모른다.

2014년도 이미 저물어 가고 있다. 연초 국제포럼들에서는 1914년과 2014년을 비교하는 말들이 많이 오갔다. 100년의 세월은 길다 면 길고 짧다면 짧다. 인류의 역사에 비하면 극히 짧은 시간이나 인간의 일생에 비하면 길다. 따라서 망각도 그만큼 쉽다. 1914년은 인류 역사에서 매우 큰 사건이 일어났던 해다. 이 해에 발발했던 제1차 세계대전은 그 후 세계의 질서와 국가의 제도뿐 아니라 각 나라의 운명도 크게 바꿔 놓았다. 유럽 왕조들이 망하고 제국주의가 퇴조했으며 러시아 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후 공산주의·사회주의 국가들이 출현하고 자본주의는 일대 수정을 맞게 되었다. 금년 초 아베 일본 총리는 다보스포럼에서 지금의 중·일 관계는 1차 대전 직전의 영·독 관계와 같다고 했다. 새로운 세력의 부상은 지역에 긴장을 높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가 과거 역사에서 제대로 관찰하지 못했던 점은 새로운 세력이 부상할 때 기존 세력이 이를 인정하고 공간을 허용해 주지 못하면 긴장이 전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기존 세력인 영국·프랑스가 신진 세력 독일의 부상을 견제하며 유럽에서 터진 1차 대전은 이 세 나라 모두에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세계 경제의 중심은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옮겨 갔으며 금본위제도에 의한 국제통화 질서도 무너지게 되었다. 전후 보상금 문제로 영국 재무부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했던 케인스에 의해 소위 케인지언 경제학이 태동하게 되었고, 곧 시작된 세계 대공황은 시장에 대한 정부의 역할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지금 중국은 동북아뿐 아니라 세계의 최강자 지위로 부상하고 있다. 1, 2차 대전 후 영미의 주도로 쓰여 진 오늘날 세계 질서는 다극화시대로 접어들면서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또한 세계화로 경제의 국경이 무너지며 각국에서 기존의 통치체제(governance)가 심각한 한계를 맞고 있다. 정치와 정부는 주권국가의 낡은 국경에 갇혀 있으나 정책과제는 이미 세계화되어 있다. 어느 나라도 국가 간 협력 없이는 이들 과제를 풀어갈 수 없으나 정치는 국내 문제에 얽매여 있다. 이런 가운데 국제경제, 외교에서 점점 WTO·유엔 등 다자체제가 외면 받고 FTA 등 양자체제와 양자외교로의 의존이 늘고 있다. 영국의 경우 지난 4년간 해외공관을 18개나 늘렸다. 1차 대전은 서구 국가들 상호 간의 무역제재를 가져와 당시 막 산업화를 시작했던 일본 제품에 대한 수요를 폭증시켜 일본은 세계열강의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이후 일본은 만성 국제수지 적자에서 흑자로 돌아섰으며 그 결과 한반도에 대한 자본 투자가 늘어나고 1930년대 이후에는 한반도에 산업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는 만주와 중국 본토 침입을 위해 일본의 신흥재벌들에게 각종 금융 지원과 세제 혜택을 제공해 한반도의 산업화를 추진했다. 30년대 식민지시대 일본의 한반도 산업화 정책은 이후 독립국가 대한민국에서 1960~70년대 경제발전 전략의 일환으로 반복되기도 했다. 지금 동북아는 다시 세계 질서 변화의 중심에 서 있다. 100여 년 전 산둥반도를 독일에, 다시 일본에 내줘야 했던 중국은 이제 새로운 세계 질서를 써 나가는 데 자신들도 펜대를 잡겠다고 나섰다. 이미 일방적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하고 위안화의 국제화에 시동을 걸었다.  역사는 흐르는 물과 같은 것이다. 때로는 속삭이며 시내처럼 흐르고 때로는 가파른 폭포가 되어 귓전을 때리며 퍼붓는다. 그러나 언제나 연속선을 그리며 흐른다. 기울기와 속도의 차이는 있으나 단절은 없다. 동북아 질서가 소용돌이치며 개편될 때 항상 가장 큰 피해를 봤던 곳이 한반도다. 100년 전 우리나라의 이름은 세계지도에서 지워졌다. 겨우 나라를 되찾고 이후 괄목할 경제 도약을 이루었으나 지금 우리나라는 여러 면에서 다시 혼돈의 와중에 서 있다. 세계와 동북아 정세 변화를 읽는 안목, 국가의 전략적 입지 설정, 광범위한 제도적 개편, 그리고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정치력·외교력·인재 양성이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청되는 때다.

언론의 헤드라인은 오늘도 일과성 이슈들에 모아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헤드라인 뒤편에서는 도도한 세계사의 전환이 지속되고 있다. 이 와중에 정부는 스스로도 그 구체적 방향을 명확히 정의하지 못하는 큰 단어들을 너무 쉽게 쏟아내고 있다.  창조경제, 비정상의 정상화, 통일대박, 경제혁신에 최근에는 국가개조가 더해졌다. 이런 단어의 성찬에도 불구하고 지난 2년여 동안 변화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국정은 어젠다 사이를 떠돌고 있을 뿐이다. 지금 한반도를 둘러싼 기류의 변화와 우리 국가가 당면한 과제는 날로 엄중해짐에 비해 대한민국은 이렇게 표류하고 있어도 되는 것인가.  『징비록(懲毖錄)』은”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이다. 징비록에서 유성룡은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고 비옥한 강토를 피폐하게 만든 참혹했던 전화를 회고하면서, 다시는 같은 전란을 겪지 않도록 지난날 있었던 조정의 여러 실책들을 반성하고 앞날을 대비하기 위해 『징비록』을 저술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국정은 아젠다 사이를 떠돌고 있는 과제들을 중심으로 정부의 각 분야를 총괄하는 징비록으로 풀어내 대한민국의 21세기를 위한 새로운 ‘현대판 징비록(懲毖錄)’를 써야 할 때라 생각한다. 

< 코리아쉬핑가제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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