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5-04 11:10

부산/오사카 카훼리를 타다(1)

어린 시절에 5월은 어린이 날이 끼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무척이나 기다려지는 달이었다.
맞벌이를 하시는 부모님 덕에(?) 제대로 된 어린이날을 한번도 맞아본 적은 없었지만, 어린 나이에도 학교를 하루 쉴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5월은 충분히 기다릴만한 가치가 있는 달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늘 5월 말이면 공중파를 통해 방송해 주던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는 사자처럼 부풀린 머리를 한 여자들이 서양 새색시 마냥 무릎을 살짝 꺾고 인사하는 모습 등이 마냥 신기해 정말 기다리면서 보던 프로그램이다.
철들고 나서야 ‘성의 상품화’니 하는 여성계의 주장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또한 그 여성계의 반발로 결국 올해부터는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더 이상 공중파 방송에서 방송하지 않게 되었다는 뉴스도 들려오고.
그런데 어린 시절 그 많은 미스코리아 타이틀에는 ‘꽃 중의 꽃’ 진선미(眞善美) 외에도, 미스 국제 훼리라고 하는 타이틀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대회를 스폰서해준 각각의 회사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타이틀로, 국제 훼리가 그 대회를 지원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냥 지나간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이제는 한물간 미스코리아 이야기며 국제 훼리 이야기를 다시 들추어 내는 것은 4월 23일 승선했던 카훼리 승선기 때문이다.
당시 국제훼리가 취항했던 항로가 부산/오사카 항로였다.
비교적 여객이나 화물 집화 면에서 나름대로 괜찮은 실적을 보였던 국제훼리가 갑자기 망하게 된 것은 내부 사정 때문이었다는 소문을 전해 들었다. 지난 4월 23일 한때 국제훼리가 다녔던 그 항로에 팬스타라인닷컴이 카훼리를 띄웠다. 팬스타라인닷컴은 1998년 12월 외항화물선 운항 및 외국적 정기선사의 국내 대리점 사업을 주 목적으로 지주회사인 (주)팬스타엔터프라이즈에 의한 계열사로 설립되었다.
2000년 9월 해양수산부에 ‘부산-오사카 외항정기여객운송사업면허’를 정식으로 신청하고 2001년 3월 제 21차 한일 해운실무자회의에서 부산-오사카 정기 카훼리 항로 신규 개설에 합의, 2001년 6월 해양수산부로부터 ‘외항정기여객운송사업면허증’ 취득, 올해 2월 선박인수에 이르기까지 숨가쁘게 이어진 과정이었다. 부산으로 향하기 위해 서울역에 집결하기로 한 시각은 8시 30분. 뿌옇게 잔뜩 흐린 하늘이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9시 새마을호를 타고 부산으로 향한다. 자리를 잡고 있자니 아니나 다를까 빗방울이 후드득 쏟아진다.
‘왜 하필이면 오늘 비가 오는 거야?’ 봄 가뭄 때문에 몹시도 어려운 농촌의 현실보다는, 당장 오늘 하루 나의 일정이 더 중요한 이기심의 발로였다. 기차는 이런 나의 맘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기적을 울리며 보슬비 쏟아지는 남으로 향한다.
동료 기자가 아침을 안 먹고 왔다기에 같이 식당칸을 찾아 나섰다.
객실과 객실을 이동하면서 보니, 평일인데도 꽉꽉 찬 객실이 몇 량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 입은 비즈니스맨들이다. 서류를 훑어보는 사람, 밀린 잠을 보충하려는 사람, 신문을 보고 있는 사람… 여행을 떠나는 사람의 여유나 흥분은 찾아보기 힘들다. 몇 개의 기차간을 지나 겨우 식당차에 도착했다. 주문을 하고 기다리려니 ‘비포 선라이즈’ 라고 하는 에단 호크 주연의 영화가 떠오른다. 유럽횡단열차를 탄 두 청춘 남녀의 만 하루 동안 이야기를 담은 영화로, 그들이 독일부부의 부부싸움으로 소란한 객실을 피해 찾아 들었던 곳이 바로 식당차였기 때문.
그런데…주문한 음식이 가격에 비해 너무도 형편없이 나왔다. 서울 프라자 호텔에서 운영하는 곳이라는 명패가 너무도 자랑스럽게 빛나고 있었기에 약간은 기대를 하고 있었건만 음식이 담겨 나오는 모양새며, 음식의 질, 서비스까지 그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러운 것이 없었다.
월드컵도 얼마 안 남았는데,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들이 이러한 서비스를 대하고 한국에 대해 평가할 것을 생각하니 약간은 걱정이 되기도 하는 순간이었다.
다시 객실로 돌아오니 이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들어 있다.
흔들리는 차에 몸을 실고,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비 내리는 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간간이 간이역 한 켠에 쌓여진 컨테이너들이 지나가고 물류 창고들이 달리는 차창 밖으로 보인다.
기차에 탄 지 4시간이 조금 넘어 드디어 부산 역에 도착했다.
부산은 기차 객실에 앉아도 인근 부두의 주황색 크레인이 보여 지금 있는 곳이 항구 도시임을 말 그래도 보여준다. 역에 내리니 쏟아지는 빗줄기가 더 굵어져 있었다. 택시를 잡아 여객터미널로 가자 하니, 택시 운전기사 아저씨가 여행 차림을 한 우리 일행 (남자 둘, 여자 둘)을 수상쩍게 쳐다본다.
아저씨의 의심을(?) 풀어드리기 위해 상대 기자에게 호칭을 꼭꼭 써 가면서 오늘의 일정에 대해 일부러 큰 소리로 물어보기도 하고, 부산에 BEXCO가 서면서 외국인이 많이 오냐고 묻기도 하고…
파란 기와를 얹은 부산 국제여객터미널 입구가 보이는가 했더니 바로 옆으로 빗 속에 하얀 몸체를 고고하게 드러내며 정박해 있는 ‘팬스타드림’호가 보였다. 우와~ 저마다 입에서 저절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신조선 이라고 하더니 정말 깨끗하고 날렵해 보였다.
그런데 이내 정박해 있는 곳에 대한 의문이 터져나왔다.

"어, 쟤가 왜 저기 서 있는 거야?”

인근에 컨테이너가 쌓여 있고 화물선이 하역하고 있어 여객 부두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곳에 ‘팬스타 드림’이 서 있었던 것이다. 출항할 때 옮겨오려나 하며 저마다 생각을 주고 받으며 팬스타라인 사무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국제 여객터미널은 처음이었다. 들어서 있는 매표소와 매점들을 둘러보면서 드는 생각이 꼭 고속터미널에 와 있는 듯했다. 특히 늘어서 있는 매점들이 그런 생각들을 부추겼다.
현대적으로 깔끔하게 정리된 공항터미널만 보다가 약간은 후줄그레한(?) 느낌이 드는 여객터미널을 보니 실망스럽기도 했다. 그래도 명색이 ‘국제여객터미널’인데.
공항터미널이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들에게 하늘의 관문이라면, 여객 터미널은 바다의 관문인데, 게다가 이제 월드컵이니 아시안게임이니 하며 많은 외국 손님들이 올 것이라고 당국에서도 떠들면서 이렇게 어수선한 느낌이 드는 곳을 외국 손님들에게 한국의 첫 장소로 선보이는 것이 왠지 아쉬웠다. 입출국 관련 서류를 작성하고 본격적으로 밖을 둘러보기 위해 나섰다.

팬스타 앞에는 피켓을 든 할머니, 할아버지 부대들이 모여 있었다. 오늘 우리 여행의 동행이신가 보다.
피켓 아래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계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부산지역 노인대학에서 오신 분들이었다. 저마다 같은 색으로 통일한 트레이닝 복에 흰 모자를 쓰시고, 배낭을 메시고, 여행 캐리어를 손에 들고 이제 곧 맞이하게 될 훼리여행의 기대감을 한껏 얼굴에 드러내고 계셨다.
우리나라에 오는 일본인 관광객들을 볼 때면 늘 깃발아래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이 신기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도 일본에 가면 피켓을 따라 움직이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서야 일본사람들은 자국 내에서도 관광지를 다닐 때면 인솔 가이드가 선두에서 하나같이 깃발을 들고 다니는 것을 알았지만. 오후 2시 20분 드디어 세관과 출입국 관리소를 통과하였다.

절차는 공항 검색대와 비슷하였다. 승선은 아까 여객터미널 들어올 때 보았던 그 장소에서 한다고.
할머니들과 같이 승선장소인 1부두 15번 선석으로 가기 위한 셔틀 대기 줄에 섰다. 줄 바깥에는 너무 많은 짐을 가지고 온 탓에 여행 가방이 열린 할머니 한 분께서 짐 정리를 다시 하고 계셨다.
50만원 내고 4박 5일 일본 여행 가는 거야.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싸게 내서 이 사람들(팬스타)한테 뭣이 돌아갈까 모르겠어” 한 할머니께서 운임을 놓고 이야기하는 우리 이야기에 끼어 드셨다.
어디로 여행가시냐고 여쭈었더니 “우리나라로 치면 마산(교토)과 경주(나라)에 해당하는 곳이라고 하더만. 서울(동경)까지는 멀어서 갈 수가 없대.” 한번도 일본 여행을 해보지 못하셨다고 하신 할머니는 마냥 들떠 있었다.
두 대의 운항 셔틀 중 한 대가 왔다. 셔틀을 타고 가다 보니 주변에 하역 차량들과 컨테이너 운반차량으로 교통 정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승선 장소까지 걸어서 가는 것은 통행 차량들로 무척이나 위험해 보였다.
드디어 팬스타드림 승선. 흰색과 파란색이 교차하는 승선 계단을 오르니 승무원들이 맞아 준다.
프론트가 있는 홀까지 가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이 모든 것이 그저 신기할 뿐이다.

<계속>

취재•글 백현숙 기자 hspaek@shipschedul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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