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6-11 08:36

기고/ 여수엑스포 ‘예약제’엔 죄가 없다, 빨리 보완해 예약제로 환원해야

수필가 이경순 (전 KMI 연구위원)

수필가 이경순

지름 43m 원형 타워 ‘빅오(Big-O)’가 만든 물 스크린에 레이저빔이 소녀와 바다의 신, 악령을 그려대며 물었다. “모든 생명은 바다에서 왔다. 바다와 우리를 살리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물보라가 밤하늘에 초록 물결로 넘실댔다.

여수엑스포는 1993년 대전 이후 처음 열리는 국제 공인 박람회다. 여수엑스포의 주제는 바다다. 인류가 살아갈 터전이자 생명줄, 바다의 오늘과 내일을 우리 곁 관심사로 끌어왔다. 보는 재미, 듣는 재미를 넘어 아는 재미를 더했다.

온 가족, 특히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바다의 의미를 일깨우는 자리로 이만한 곳이 없을 것 같다. 갇힌 교실에서 배우는 바다가 아니라 손으로 만지고 손에 적시는 바다를 가르칠 최고의 기회다.

서울서 KTX로 세 시간을 달리면 박람회장 옆 여수역에 닿는다. 개막 전날까지 다들 인구 30만 소도시의 교통난(難)과 숙박난(難)을 걱정했지만 지금 여수는 오히려 한산하단다. 자동차전용도로가 시내 거치지 않고 곧장 엑스포로 들어오고 차를 외곽에 두고 셔틀버스로 오가게 하기 때문이다.

지난 5월12일 개장한 여수엑스포 입장객이 4만 명 선에서 그 주말엔 6만 명 선으로 껑충 뛰었다. 그리고 지난 5월27일 여수엑스포에 개장 후 가장 많은 11만 관람객이 몰렸지만 제일 인기 있는 전시관 아쿠아리움도 1시간 기다리면 들어갈 수 있었다.

석가탄신일인 28일엔 전날 절반도 안 되는 4만 여명이 왔는데도 3㎞까지 줄이 늘어서 최대 7시간을 대기해야 했다고 한다. 엑스포 조직위가 8개 주요 전시관에서 시행해오던 관람 예약제를 중단하고 선착순 줄서기로 바꾸면서 벌어진 일이다.

여수엑스포 조직위가 야심 차게 도입한 8개 전시관 예약제도는 국민에게 약속한 시스템이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하루아침에 팽개칠 수 있었을까.

이 시스템을 활용하면 인터넷으로 박람회장 도착 전에 예약을 할 수 있었고 현장에서 단말기로 원하는 시간을 정해 예약할 수도 있었다. 모두가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합리적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예약에 실패한 관람객 200여명이 항의하자 예약제는 엑스포 개장 16일 만에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신세가 됐다.

지난 27일 발생한 여수엑스포 전시관 예약제 폐지와 관련, “일단 떼쓰면 통한다”는 우리 사회 곳곳에 스며든 잘못된 문화가 표출된 현상이란 지적이 많다.

류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보상 심리가 강한 소수집단의 이기주의와 책임의식이 부족한 지도층이 타협하는 것이 우리나라 선진화에 얼마나 큰 걸림돌이 될 지 보여주는 단적인 현상”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홍역을 치르고도 조직위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조직위 직원들은 어차피 한시직 파견 신분인 만큼 엑스포가 끝나면 원소속으로 복귀한다. 그러니 앞장서서 이 문제를 해결해보자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 조직위 수장인 강동석 위원장이 그동안 사석에서 “인사권이 없으니 직원들 부리기가 참 힘들다”고 한 말의 뜻이 이런 것 아니었을까.

신문을 보니 6월1일 “김황식 국무총리가 지난달 30일 강동석 여수엑스포 조직위원장 등을 만나 ‘최근 여수 엑스포의 예약제가 폐지되고 전면 선착순제로 바뀌면서 대기시간이 최대 8시간에 달하는 등 문제가 발생하고 있으니 보완책을 강구해 달라’고 지시했다”고 했다.

조직위가 자랑했던 8개관 ‘100% 예약제’가 처음부터 완벽한 건 아니었다. 예약관을 너무 적은 8개로 제한하는 바람에 관람객들은 “이걸 못 보면 손해 본다”는 생각에 너도나도 8개관으로 몰려들었다. 예약관을 20여개로 늘렸으면 무리 없이 관람객을 소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지금처럼 하루에 2개씩만 예약하도록 하지 말고 5~6개까지 예약한 뒤 추첨 방식으로 전시관 관람을 유도했다면 동선을 분산하는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제도란 시행 과정에서 문제가 드러나면 보완책을 만들면 된다. 관람객들의 항의가 있다면 일부는 예약을 하고, 일부는 현장에서 줄을 서도록 하는 방식으로 바꾸면 되는 일이다. 그러나 책임지고 이를 보완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 세계 관람 문화를 바꾸겠다’고 호언했던 조직위는 하루아침에 손바닥 뒤집듯 예약제를 폐지했고 결국 관람객들만 하루 종일 줄을 서서 골탕을 먹는 모양새가 됐다. 조직위의 태도는 “우리는 더 이상 욕먹기 싫으니, 그렇게 원하면 한번 줄 서서 불편을 감수해 봐라”는 것으로 해석되기 딱 알맞다.

어떤 행사장이든 관람객이 적으면 선착순 자유 입장을 시키고, 관람객이 수용 능력을 넘으면 예약제를 하게 마련이다. 여수엑스포도 사람이 많이 몰리는 8개 전시관은 인터넷 예약에 30%, 현장 단말기와 스마트폰 예약에 70%를 배정해 100% 예약제로 운영했다. 이 예약제가 뒤집힌 것은 일부 관람객의 거친 항의 때문이었다고 한다.

200명 남짓한 관람객은 27일 아침 9시 개장한 지 얼마 안 돼 현장 예약분이 동나자 조직위 사무실로 몰려와 욕설을 퍼붓고 직원 멱살을 잡으며 항의했다. 환불은 물론, 교통비와 손해배상도 요구했다. 조직위 측은 “예약제를 계속하다가는 큰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했다.

여수엑스포가 예약제를 실시한 것은 스마트폰 2500만대가 보급된 선진 IT 기반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약 문화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부족과 일부 떼쓰기 앞에서는 IT 강국도 허울 좋은 이름뿐이었다.

결국 미리 계획을 세워 예약한 관람객이나 무작정 온 관람객이나 똑같이 훨씬 더 오래 기다려야 하는 원시적 줄서기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예약제는 행사 운영자에게 준비할 시간을 주고 대기 인원과 수용 능력의 균형을 적절히 맞춰주는 제도다.

항공기 좌석이든 호텔 방이든 상당 기간 앞서 예약하는 손님에겐 요금을 깎아주고 예고 없이 무작정 오는 고객에겐 최고 요금을 물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외국 공항에 가보면 외국인 승객도 항공기 연발·착에 항의할 때가 있다. 공항 측이나 항공사가 늦는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 경우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상 변화나 테러 제보에 따른 긴급 수색으로 지연될 때는 조용히 기다린다. 항의할 때와 참아야 할 때를 가릴 줄 아는 것이 선진(先進)의 본질이다.

1인당 GDP가 2만 달러를 넘어서 20-50클럽에 진입했다고 저절로 선진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광릉 국립수목원은 하루 5000명 입장객 모두 예약제로 받아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여수엑스포라고 그렇게 못 할 이유가 없다. < 코리아쉬핑가제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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