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1-08 17:51

범양상선, ‘STX팬오션’으로 새출발…海運史 새로 쓴다

지난 87년 이후 17년만에 새 주인 만나
STX그룹 ‘해운·조선 시너지 극대화’ 추구



범양상선이 ‘STX팬오션’으로 옷을 갈아입고 세계 초대형 선사로 도약할 채비를 마쳤다.

STX는 8일 산업은행과 범양상선의 주식 67%를 4천151억원에 인수하는 계약식을 가진 뒤 이같은 내용의 그룹 비전을 확정, 발표했다.STX는 지난 8일 서울 조선호텔에서 강덕수 STX 회장과 이윤우 산업은행 부총재 등이 참석한 가운데 범양상선 주식 매매계약서에 서명하고 최종인수를 마무리했다.

▲8일 STX그룹의 비전선포식에서 강덕수 회장의 축하를 받으며 STX팬오션 이종철 대표이사가 회사 CI가 새겨진 사기(社旗)를 흔들고 있다.
STX는 이날 범양상선의 주식 67%를 4151억5630만원에 인수하기로 확정하고 잔금 전액을 납입했다. 범양상선이 지난 87년 이후 17년만에 새주인을 만난 셈이다.

이날 STX는 주주총회와 이사회를 열어 조직개편과 함께 대표이사 회장에 강덕수 STX 회장, 대표이사 부사장에 이종철 전무를 선임하는 한편, 변용희 전무이사, 유천일 상무이사 등으로 이사회를 꾸렸다. STX는 같은날 오후 힐튼호텔 컨벤션 센터에서 강덕수 STX 회장, STX계열사 사장단 및 임직원 500명이 참석한 가운데 STX팬오션 출범식 및 STX그룹 2010 비전 선포식을 갖고 바뀐 사명과 CI를 대내외에 선포했다.

66년 ‘범양전용선(주)’로 출발

STX팬오션(구 범양상선)은 지난 66년에 ‘범양전용선(주)’로 벌크선업계에 첫 발을 내딛은 후 5만4천t(중량톤)급 유조선 4척을 취항시키면서 국내 최대벌크선사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72년 범양냉방공업(주)를 인수하는 등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이던 이 회사는 74년엔 총 20척, 70만t의 선대를 보유, 정부로부터 부정기부문 ‘대단위 해운회사’로 지정되기도 했다.

77년엔 미주로 합판과 철재수송 정기벌크선 서비스를 개설했으며 79년엔 율산해운과 대원사 해운부를 인수하는 등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해운업계 선두선사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설립 이후 회사의 지속적인 성장세와 해운업의 발전에 따라 창업주인 고 박건석 회장은 당시 재계로부터 ‘해운왕’으로 불리기도 했다.

80년대 들어 석유파동과 건설산업의 침체로 해운산업이 전반적인 불황을 겪던 와중에도 회사는 82년엔 매년 산업발전에 기여한 공이 큰 회사에 주어지는 산업포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84년 4월에는 ‘범양전용선’에서 ‘범양상선’으로 사명을 바꾸고 장기화되는 해운산업 침체를 타개하기 위해 제2의 창업을 모색했다.

그러나 다음달인 84년 5월 산업정책심의회에서 의결한 해운산업합리화 정책에 따라 범양상선은 위기를 맞기 시작했다.

해운산업합리화 기업으로 지정된 범양상선은 그해부터 이듬해 8월까지 총 6개의 부실선사를 떠안으며 이들 선사의 선박과 영업권 매입은 물론 부채까지 떠맡아야 했다.

이때 합병된 회사들이 삼미해운, 세방해운, 삼익상선 등 이른바 해운업계의 3S 기업이다. 범양은 이들 대형 부실기업들의 부채 4천463억원을 같이 떠맡게 됐다.

해운산업합리화, 부실화 단초

부실해운사 인수에 따른 부채 증가와 계속되는 세계적인 해운불황은 범양상선의 급속한 부실화를 초래했다. 범양의 부채는 이후 눈덩이처럼 불어 84년말엔 7천975억원 규모로 늘어났고 은행관리에 들어가던 해인 87년엔 1조250억원까지 증가했다. 시황악화와 더불어 노후 비경제선이 많았던 당시 범양 상황이 부채증가를 더욱 부추겼기 때문. 당시 선박 200만6천t 중 상당수가 20년 이상의 노후선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부는 이에 따라 87년 4월 산업정책심의회에서 해운산업합리화보완대책을 마련, 범양상선에 8천4백억원의 부채를 상환유예해 주는 등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 주기에 이른다. 그러나 정부의 이같은 지원시책은 오히려 박 회장의 경영권 악화를 불러왔다. 박 회장의 경영권악화는 곧 당시 전문경영인었던 한상연 사장과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둘의 대립은 해운업계 최대 비극의 씨앗이 됐다. 경영권을 놓고 다투던 이들은 결국 극한대립상황에서 국세청에 외화도피사실을 제보함으로써 자승자박의 화를 자초하게 됐다.

국세청 조사 결과 박 회장과 한 사장이 각각 수백만달러 이상의 외화를 도피시킨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1조원 이상의 빚을 진 부실기업인들이 호화생활을 누려오면서 엄청난 외화를 도피시켰다는 사실에 해운업계 뿐만 아니라 전 국민들은 경악해야 했다.

범양상선의 불운은 결국 박 회장의 투신자살이라는 한국해운 최대의 비극적인 사건으로 끝나고 말았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박 회장(향년 59세)은 그해 4월 19일 두산빌딩 10층 집무실에서 한 사장에게 “인간이 되시오”란 유서를 남기고 투신자살했다. 한국 해운업의 태동기를 이끌었던 20년 ‘해운왕’의 비극적인 최후였다.

한때 국내 해운선사중 최대였던 범양상선은 이같은 일련의 불행한 사태를 겪으면서 그해 결국 은행관리를 받기에 이른다.

또 ‘91년 이후 자립운영이 불가능할 것’이란 해운업계의 예상대로 결국 범양은 92년 10월부터 법정관리 수순을 밟았다.

92년 10월 법정관리 수순 밟아

그러나 범양의 임직원들은 여기서 주저 앉지 않았다. 이들은 최대 벌크선사로서의 자부심과 20여년간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범양의 재건을 이끌며 잇단 불운의 사슬에 종말을 고했다.

94년에 국내 부정기선사 최초로 ISO/ISM 코드 인증을 획득하고 95년엔 운임수입 10억달러를 달성하는 등 범양은 옛 영광의 재현을 위해 힘을 기울였다. 지난 97년엔 해운대리점업체인 (주)포스를 자회사로 설립하기도 했다.

또 87년부터 주인없는 상황을 맞게 되면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그 어느 기업보다 앞서 시행했다. 법정관리시행 전후를 비교하면 인원이 24% 감축됐음에도 매출은 400%가 늘기도 했다.

이와 함께 부채 변제도 모범을 보였다. 연간 약 2천억원에 달하는 정리채권 및 공익채권의 상환부담에도 불구하고 법정관리 이후 약 1조원에 달하는 정리채권의 원리금을 단 한번의 채무불이행이나 연체없이 변제해 왔다. 이는 곧 거액의 외화환산손실이 발생됐던 97년과 2000년을 제외하고 95년 이후 계속적인 흑자경영을 끌어온 범양 임직원들의 공이었다.

2002년 5월 9일엔 현 STX팬오션 고문으로 위촉된 장진원씨가 관리인으로 선임돼 이번 M&A전까지 범양을 이끌었다. 장진원씨는 범양 출신 전문경영인이다.

범양의 M&A 추진이 올해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지난 2001년에도 한차례 M&A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엔 인수희망사와 산업은행간의 인수가와 매각가 차이가 너무나 커 무산되고 말았다. 당시 범양상선에 인수의향서를 낸 곳은 대보해운과 국내펀드 컨소시엄, 싱가포르 선사인 IMC, 국외펀드 등이었는데, 범양상선이 2천억원선을 희망했던 반면 이들 인수희망자가 제시한 가격은 절반 수준에 불과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잇단 실적호조로 범양상선은 법정관리 10년만인 지난 2002년 5월 20일 법정관리를 조기졸업했다. 해운업 불황기였던 2001년에도 범양상선은 매출액 1조7천552억원에 영업이익이 1천94억원에 이르는 등 지속적인 실적호조를 기록한 것이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 범양상선은 92년 10월 회사정리절차(법정관리)에 들어가 93년 11월 5일 정리계획이 인가된 후 정리계획상 오는 2007년말까지 법정관리를 받도록 예정돼 있었다. 2003년 6월엔 인천-청도간 컨테이너서비스를 개설, 정기선 컨테이너 선사로서도 입지를 높였다.

올해로 설립 38주년을 맞은 범양상선은 현재 57척의 자체 선박과 200여척의 용선을 운용, 지난해 1조9천억원의 매출에 778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해운경기 호황으로 올 상반기에만 2천3백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자산 규모 8천527억원인 범양상선은 올해 2조5천억원 매출에 최소 4천억원이 넘는 영업이익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부채비율도 지난해 기준 265%로 국내 해운업계중 최저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STX, 2010년 ‘매출 10조기업’된다

한편 STX는 STX팬오션 인수를 계기로 2010년 매출 10조원에 이르는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한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강덕수 회장은 8일 출범식에서 주력 사업인 해운, 조선, 에너지 사업부문을 강화, 연관사업 간 완벽한 수직계열화 구축 및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해 2010년에는 매출 10조원에 이르는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한 전략을 발표했다.

STX는 이번 STX팬오션의 인수로 해운-조선 사업을 축으로 하는 전후방 연관사업의 수직계열화를 이루게 돼 최적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구축했다.

이에 따라 올 연말 4조7천억원의 매출이 예상되는 가운데, 2005년에는 5조5천억원, 이후 2010년에는 해운 5조, 조선 4조, 에너지 1조 등 총 매출 10조원을 달성한다는 계획이다.

해운사업에서는 8일 새로이 출범한 STX팬오션을 현재 ‘벌크 세계10대선사’에서 ‘해운 세계5대선사’로 육성하고, 2010년에는 매출 5조원의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보유한 월드베스트 선사로 키워 그룹의 주축이 되게 한다는 계획이다.

STX 팬오션, 세계 5대선사 목표

이를 위해 기존의 핵심 벌크부문은 강화하고, 탱커, PC, 컨테이너, 자동차운반선 등 사업부문을 확대하고, LPG 등 고부가치 부문의 신규사업에도 진출한다는 방침이다. 이와 함께 운영선박의 대형화도 적극 추진하기로 했다.

현재 조선ㆍ엔진 및 조선기자재로 구축된 STX의 조선사업부문은 해운산업인 STX팬오션이 함께 포함됨에 따라 2010년 ‘세계 5대조선소’가 되기 위한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석유제품운반선 부문에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는 STX조선은 해운시장 호황과 더불어 매년 급성장하고 있는 STX팬오션으로부터 향후 장기적, 안정적 물량을 확보하는 한편, LPG선 및 특수선 등 고부가가치 선종의 개발 및 생산을 확대해 나가기로 했다.

또 STX엔진을 비롯한 STX중공업, 엔파코 등은 엔진 및 엔진부품, 소재 부문 핵심 기술의 국산화를 통한 원가절감 및 고출력 신기종 개발에 긴밀히 협력해 ‘세계 5대 엔진 메이커’로 위상을 강화해 나가기로 했다.

수중음향 및 전파탐지(레이다)를 전문으로 하는 방위산업체 STX레이다시스는 현재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선박용 항법장치시스템의 국산개발을 통해 수입대체 효과 및 선박건조 원가절감에 기여하는 한편 점차 국내외 조선소로 영업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에너지사업부문은 국가 기간산업으로 STX에너지의 경우 열병합발전의 효율적인 운용으로 에너지원 사용 절감 및 생산 효율성을 극대화해 경쟁력 있는 증기 및 전기를 수용가에 안정적으로 공급할 계획이며 산업단지내 열병합발전 수요개발을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

STX그룹은 앞으로 물적·인적 자원의 효율적인 개발을 통해 세계 최고수준의 경쟁력을 확보하고 투명경영, 윤리경영을 바탕으로 한 ‘월드베스트 기업으로 자리잡겠다고 선언했다.

강덕수 STX 회장은 “범양상선의 인수에 따라 해운-조선-조선 기자재 산업에 이르는 수직 계열화를 구축, 명실상부한 해운-조선 그룹으로서 면모를 갖추게 됐다”며 “세계 최고의 해운-조선 그룹으로 거듭나겠다”고 말했다.

STX는 생산 제품 전량을 수출하고 있는데, 올해 수주 6조4천억원, 매출 4조7천억원, 수주잔고가 65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경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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