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해운의 원로이자 산증인인 KCTC 신태범 회장(
사진 앞줄 왼쪽에서 5번째)이 자신의 96년 삶을 정리한 회고록 <청해, 푸른 바다를 넘어>를 발간해 해운업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맑게 갠 바다’란 뜻의 청해(晴海)는 신태범 회장의 호다. 신 회장의 회고록은 한국해운 역사 그 자체라 할 만큼 큰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1928년 1월 경남 거창 황산마을에서 태어난 신 회장은 한국해양대학교를 2기로 수학하며 해운인의 발걸음을 뗐다. 당초 한국해양대 1기로 입학했다가 기대와 달라 자퇴했지만 맏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가세가 기울자 학비 전액을 국비로 지원받으려고 2기로 재입학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는 책에서 대학에 들어가 동기인 심상호 박재혁 홍세주 등과 각별한 우정을 나눴다고 추억을 떠올렸다.
심상호는 대한해운공사와 범양상선 등에서 오랫동안 일한 뒤 고려예선에서 사장을 지낸 인물이고 박재혁은 해운공사에서 신 회장과 함께 일하다 동남아해운으로 옮겨 가 부회장을 역임했다. 홍세주는 영신상운을 창업해 경영하다 1985년 60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했다. 대륙상운 김수금 명예회장도 동기동창이다.
신 회장의 대표적인 업적은 계획조선 도입이다. 1950년 대학 졸업 후 대한해운공사에서 승선 근무를 하며 대양을 누비던 신 회장은 미국 ICA(국제협조처) 원조로 지어진 뒤 좌초된 <군산>호(<대포리>로 개명)의 수리 공사를 감독하면서 알게 된 대한조선공사 이영진 사장에게 일본에서 성공한 계획조선 정책의 도입을 제안했다.
그는 책에서 “1960년대는 선주들이 기술력을 의심해 국내 조선소에 선박 신조를 맡기지 않던 시절이었지만 <군산>호 수리 과정에서 대한조선공사의 기술력과 직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을 확인하고 계획조선 정책을 추진했다”고 회상했다.
박정희 정부, 계획조선 흔쾌히 수용
5.16 쿠데타로 집권해 경제 발전에 골몰하던 군사 정권은 신 회장의 아이디어를 흔쾌히 수용했고 이 정책은 우리나라 해운과 조선의 동반 발전을 이끌었다.
계획조선 1차사업은 1964년 마무리됐다. 이때 건조된 선박은 신 회장이 고향 선배인 양재원 전 동남아해운 사장, 신중달 전 부산상공회의소 회장과 의기투합해 발주한 2600t(재화중량톤)급 <신양>호와 남성해운의 <우양>호, 천경해운의 <천경>호다.
고려해운 창업주인 고(故) 이학철 회장도 계획조선의 도움을 빌려 계획조선 4번째 선박이자 2차선인 <동양>호를 같은 해 신조했다. 1966년엔 조양상선에서 <남성>호, 박정석 고려해운 회장의 부친인 박현규 해사문제연구소 명예이사장이 설립한 풍국해운에서 <보리수>호를 각각 지었다.
▲1970년경 계획조선 4차선 <보리수>호의 일본 요코하마항 입항 기념 사진. 왼쪽에서 2번째부터 양원석 선장과 신태범 회장, 이윤수 전 KCTC 부회장 |
1965년 계획조선 진행 과정에서 신조 자금 확보를 해결하기 위해 신태범 회장과 박현규 이사장이 이학철 회장과 손을 맞잡으면서 현재의 고려해운이 탄생했다.
신태범 회장과 박현규 이사장은 1973년 해운업의 대세가 된 컨테이너의 육상 물류를 담당하기 위해 고려콘테이너터미날을 창업했고 이 회사가 현재의 KCTC다. 신 회장과 박 이사장이 한국 해운물류업계의 밑거름을 만든 셈이다.
신태범 회장은 지난 16일 서울 소공로 더플라자호텔에서 열린 회고록 출판기념회에서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계획조선을 통해 한국 해운과 조선 발전의 토대를 다졌고 고려해운 창업에 참여해 견실한 기업으로 성장시킬 수 있었다”고 술회하면서 일평생 동문애와 파트너십을 이어온 박현규 이사장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날 행사엔 그의 차남인 신용화 고려해운 사장과 막냇동생 신문범 전 동우국제 부회장, 박현규 이사장과 박정석 회장, 신 회장의 고향 후배이자 대학 동문인 정태순 한국해운협회 회장, 임기택 국제해사기구(IMO) 명예사무총장, 신 회장의 구술을 정리해 책으로 엮은 한국해양대 김성준 교수 등이 참석해 회고록 출간을 축하했다.
< 이경희 기자 khlee@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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