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위 선박 기국(Open Registry)의 자리가 30년 만에 바뀌었다.
영국 해운조사기관인 클락슨에 따르면 라이베리아기국은 7월28일 현재 5088척 2억4842만t(총톤)의 등록선단을 기록, 8263척 2억4487만t의 파나마기국을 제치고 세계 1위로 도약했다. 이로써 라이베리아는 1993년 이후 정확히 30년 만에 1위 기국의 지위를 되찾아왔다.
파나마는 척수에선 아직 라이베리아를 앞서지만 선박량에서 라이베리아에 355만t 가량 뒤지며 정상의 자리에서 내려왔다. 마셜제도공화국은 4223척 1억8603만t으로 3위를 유지했다.
1위 자리를 내준 파나마의 고민은 노후선이 많아 등록선단의 출항 정지비율이 높다는 점이다. 현재 등록선단의 평균 나이는 파나마 18년, 라이베리아 12년, 마셜 10.6년이다.
라이베리아는 최근 들어 신조선을 대거 유치함으로써 평균 선령이 더 낮아질 것으로 보이는 반면 파나마 선단의 나이는 20년 가까운 수준을 한동안 이어갈 전망이다.
기국(旗國)은 선박이 국적을 둔 나라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선박들이 모국에 국적을 등록할 거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대부분은 세제 혜택과 금융 문제, 외국인 선원 채용, 압류 회피 등의 목적으로 제3국의 등록처를 찾는다.
선박 기국 빅3인 라이베리아와 파나마 마셜의 시장점유율은 총톤수(GT) 기준 43%에 달한다. 선박 10척 중 4척이 이들 국가를 국적 등록지로 선택하는 셈이다. 세계 1위 해운국이라고 하는 그리스도 국적 선단은 세계 19위인 1213척 3487만t에 불과하다. 그리스 지배선단의 80% 이상이 개방형 선박 등록처에 국적을 둔 것으로 파악된다.
기국의 역사는 1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파나마가 1917년 12월15일 파나마법(LAW 63)에 따라 선박등록제도를 국영화한 게 시초다.
1922년 여객선에서 주류 판매를 금지하는 국내법을 피하려고 선박 2척의 국적을 파나마로 옮긴 유나이티드어메리칸라인이 경제적 동기에서 기국을 이용한 첫 번째 선사로 이름을 올렸다. 미국과 파나마가 해운소득의 세금을 상호 면제하는 조약을 체결하자 세제 혜택을 노리고 미국 선박이 파나마에 국적을 두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파나마를 선박 등록지로 활용하면서 기국 제도의 장점을 확인한 미국은 1948년 서아프리카의 라이베리아에 세계 두 번째 기국을 설립한다. 이후 세계 해운업계에서 자국에 선박 국적을 두는 게 비효율적이란 인식이 확산했고 기국도 우후죽순 생겨났다.
마셜제도공화국 몰타 바하마 시에라리온 키프로스 케이맨제도 레바논 지브롤터 몽고 등 50여곳이 개방형 기국 서비스 대열에 합류했다.
파나마, 세계최초 1억t·2억t 시대 열어
초창기 멤버인 파나마와 라이베리아는 기국 시장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구가했다. 특히 라이베리아는 설립 이후 빠른 성장으로 1위 기국에 올라서며 승승장구했다.
기국 사업을 시작한 지 8년 만인 1956년 파나마를 제친 라이베리아는 1966년 2000만t, 1972년 4000만t, 1975년 6000만t, 1978 8000만t을 돌파하며 비약적인 성장을 일궜다. 1949년 5만t이던 등록선대는 1979년 8153만t으로 1630배 급증했다. 이와 비교해 파나마는 라이베리아보다 20년 이상 늦은 1978년께 2000만t을 넘어서는 등 정체기를 겪었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 상황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라이베리아는 성장 둔화를 넘어 선단이 내리막길을 걷는 상황에 마주했다. 1980년부터 감소세로 돌아선 등록선단은 1983년 6700만t, 1985년 5800만t, 1988년 4700만t을 기록, 2~3년마다 앞자리가 바뀌는 심각한 침체를 보였다.
몰타 키프로스 싱가포르 등 신생 기국의 성장과 이스라엘과 국교를 맺은 라이베리아를 아랍권 국가들이 보이콧한 게 부진의 원인으로 분석된다.
반면 파나마는 1980년대 이후 독보적인 성장을 과시했다. 1985년 4000만t을 넘어선 데 이어 1993년엔 5500만t을 돌파하며 40년에 이르는 라이베리아 독주 시대를 종식하고 세계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파나마는 이후 30년간 세계 기국 시장을 주도했다. 1997년 세계 최초로 1억t을 넘어선 데 이어 13년 후 2억t을 돌파했다. 특히 2010년 2억t을 넘어설 당시엔 라이베리아와의 격차를 2배가량 벌리며 압도적인 경쟁력을 자랑했다.
1988년 기국 시장에 뛰어든 마셜도 2000년대 이후 초고속 성장을 거뒀다. 1990년 200만t에 불과했던 마셜기국의 등록선단은 11년 후인 2001년 1000만t을 넘어섰고 2009년엔 5000만t을 돌파했다. 그로부터 5년 후인 2014년 1억t까지 뛰어넘으며 세계 3위 기국 지위를 확고히 했다.
라이베리아, 시스템 일원화·등록절차 전산화 승부수
세계 해운 흐름은 한 쪽의 장기 독재를 허락하지 않았다. 파나마에 수 십년간 1위 자리를 내줬던 라이베리아는 2010년대 이후 다시 성장 페달을 갈아끼웠다. 서아프리카 기국은 2010년 1억t을 돌파하고 11년 뒤인 2021년 5월 2억t까지 점령했다.
이후 최근 2년간 20%를 훌쩍 웃도는 성장률로 세계 1위 기국에 다시 올랐다. 2억t에 도달하는 데 파나마보다 11년이 뒤졌지만 이후부터는 파나마를 압도했다.
마셜기국까지 동시에 관리했던 인터내셔널레지스트리(IRI)와 결별한 뒤 새로운 관리회사(LISCR)와 손잡고 선단을 현대화하고 등록 절차를 전산화한 게 기국 시장의 흐름을 재편한 요인으로 분석된다. 모든 행정 절차를 일원화하고 국가 청렴성을 개선한 것도 선주들의 호응을 끌어냈다.
라이베리아기국 한국법인 김정식 대표는 “그리스와 독일 선주들의 선택 1순위이자 한국 일본 중국 선주들 사이에서도 가장 선호하는 기국으로 자리매김한 게 1위 탈환의 배경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파나마도 라이베리아의 장점을 벤치마킹하는 등 하락한 경쟁력을 다시 끌어올리려고 팔을 걷어붙였다. 2021년 선단 검정 프로그램을 도입해 노후선 216척을 등록 선대에서 제외한 게 대표적인 혁신 전략이다.
파나마대사관 김재관 마케팅 이사는 “노후선과 기준 미달선을 퇴출하고 선대를 표준화하는 등 항만국통제(PSC)의 지적 사항이 나오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 이경희 기자 khlee@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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