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는 화주가 해운물류시장에서 정당한 사유 없이 계약을 일방적으로 변경하는 게 어려울 거로 보인다. 또 해운물류업계가 유가인상 등을 명분으로 화주에게 비용 증가분을 받아낼 수 있을 지 주목된다. 물류업계는 ‘기대 반’, ‘우려 반’으로 나뉘는 모습이다.
국토교통부와 해양수산부, 국회의원 안호영 의원실(더불어민주당)에 따르면 해운물류시장의 공정한 거래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갑질’로 인한 분쟁을 조사하고 조정을 권고할 수 있도록 한 ‘물류정책기본법 개정안’이 지난달 30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개정안은 ▲물류신고센터 설치 ▲신고의 조사 및 조정 권고 ▲제3자물류의 촉진 등을 담고 있다.
법안 개정안의 도입 배경에 대해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물류시장의 갑질횡포가 많아지고 있지만 애로사항을 받아주는 기관과 창구가 없다보니 대화 창구를 마련해달라는 요구가 많았다”며 “공정거래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조정권고 차원에서 물류신고센터를 운영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당초 원안은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에서 국토부가 물류신고센터를 운영하면서 신고대상이 된 업체를 대상으로 시정조치를 하는 권한까지 언급됐지만,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나 경제적 처분을 내리는 공정거래위원회의 고유 업무와 상충돼 ‘조정권고’에 그친 것으로 알려졌다.
개정안 ‘신고센터 설치·계약 조정권고’ 핵심
이번 개정안의 핵심은 국토부와 해수부가 물류신고센터를 설치하고, 신고내용에 대해 조사 및 권고한다는 물류정책기본법 ‘제37조의2’ 조항이다. 양 부처는 제37조의2 1항에 따라 해운물류시장의 건전한 거래질서를 조성하기 위해 각 부처에 물류신고센터를 설치 운영할 계획이다. 또 2항에 따라 화주와 해운물류업계 간 계약분쟁이 발생하면 누구든지 피해내용을 신고할 수 있게 됐다.
국토부와 해수부는 신고 내용이 타인이나 국가·지역경제에 피해를 발생시킬 소지가 있다고 판단되면 ‘제37조의3’에 따라 해당 이해관계인을 대상으로 자료제출과 보고를 요구할 수 있으며, 필요한 경우에는 두 부처가 조사에 나설 수도 있다.
하지만 신고 내용이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공정거래법)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하도급법) ‘대리점거래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대리점법) 등 타 법률 위반사항으로 간주되면, 관계부처나 공정거래위원회 등에서 처리된다.
또 신고에 따라 해당 업체가 공정위의 시정조치나 과징금을 부과 받으면 국토부의 우수물류기업 인증도 취소되며, 조사에 응하지 않거나 허위자료 제출 및 거짓보고를 하는 업체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국토부는 대화 창구가 마련되면 그동안 ‘갑질’을 해왔던 업체들이 거래관계를 개선하는 등 ‘자정작용’을 기대할 수 있고, 자료 확보에 따라 향후 정책적인 도구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개정안은 하위법령을 고려해 1개월 내로 공포 후 6개월이 경과한 날부터 시행된다.
대형화주 자정능력 강화 순기능 기대
이번 개정안을 두고 물류업계의 반응은 엇갈리고 있다. 개정안에 찬성하는 측은 을의 입장에서 끌려오던 물류업계가 화주들의 부당한 요구를 신고센터로 해소할 수 있게 됐다고 보고 있다. 또 화주인 대기업 물류자회사들이 선사나 3자물류기업을 대상으로 어떤 입찰(비딩)계약 방식을 택하는 지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점도 기대요인이다.
그동안 한 대기업 물류계열사가 운송 입찰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참여업체들이 제시한 운송료의 등급을 미리 알려주는 일명 ‘신호등 입찰’ 방식이 해운물류업계에서 많이 거론됐다. 업계에 따르면 신호등 입찰은 많은 논란을 일으키면서 일회성에 그쳤지만 수년째 운임 인하를 강제적으로 유도한 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신호등 입찰은 입찰을 내건 업체가 원하는 운송료보다 낮으면 관련 서류에 초록색으로 표시하고 비슷하면 빨간색, 높으면 검은색으로 표시하는 방식이다.
찬성 측은 과거 국회가 대기업 물류자회사들의 사업영역을 규제하기 위해 만들어낸 입법안들이 강제적이고 위법성을 띠었던 점을 들어, 개정안을 합리적으로 보고 있다.
한국통합물류협회 관계자는 “물류신고센터에 물류업계의 불만이 접수되면 정부가 올바른 공정거래질서를 확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거로 보인다”며 “정부가 대기업들이 투명한 입찰에 나서고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마련됐다. 대기업들이 향후 계약서 조항을 개선하는 등 선제적인 자정능력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반쪽짜리에 그친 개정안’ 물류업계 반발
이번 개정안이 관계부처가 조사 권한은 가지도록 만들었지만, 법적으로 처벌할 순 없어 무의미한 정책이라고 평가절하하는 의견도 나온다. 또 하도급 계약관계에 있는 3자물류 전문업체가 갑질을 하는 화주나 2자물류기업을 대상으로 신고한다는 게 사실상 어렵다는 지적이다. 법적 제재가 없다보니 갑질신고가 ‘보이지 않는 신호등’으로 부메랑이 될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한 물류업계 관계자는 “거래관계 조정에 그치지만 대기업과의 향후 거래를 생각하면 갑질신고는 상상도 할 수 없다”며 “법안의 취지는 좋지만 기대효과가 떨어져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3자물류업계의 갑질신고가 사실상 어려울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일각에서는 애초에 컨테이너나 시멘트 택배화물 등을 운송하는 개인사업자 신분의 운송기사들을 타깃으로 법안을 개정한 것 아니냐는 의견을 내놨다.
물류업계는 정부가 2020년 1월부터 컨테이너·시멘트 운송기사들을 위해 최저운임(안전운임제)을 보장하도록 법안을 개정했고, 이번에 신설된 법안으로 개별 운송기사들의 발언권도 보장하게 됐다고 보고 있다. 국토부에 갑질사례를 신고하더라도 후한이 두려운 3자물류업체보다 개인사업자 신분인 운송기사들이 나설 가능성이 높다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또 개정안이 ‘화물의 운송·보관·하역 등에 관해 체결된 계약’으로 단정 짓다 보니, 정부가 화주와 3자물류기업이 맺은 기존의 갑을거래는 손놓고, 3자물류기업과 운송기사들이 맺은 거래만 조정하게 됐다고 지적한다.
물류업계는 일감을 주는 제조업체나 대기업 물류자회사들이 운송원가에 걸맞은 운임을 제공해야 밑단에 있는 운송기사로 수익이 전달되는데, 이들 업체가 대규모 물량을 바탕으로 저가운임을 지불하다보니 제값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올 상반기 재경 6개사의 영업이익률은 평균 1~2%대에 불과했다. 특히 저가입찰과 최저임금·유류비 인상 등의 여파로 운송과 하역부문의 실적이 크게 악화됐다.
한 물류기업 관계자는 “이번 개정안을 보면 신고주체는 제한이 없지만, 원청업체와 체결한 계약에 대해 조정한다는 말이 없다. 사실상 운송기사들을 위한 법으로 보인다”며 “공정거래가 되려면 공정한 거래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물류기업이 정부에 신고해서 얻는 이득보다 거래단절에 따른 리스크가 더 클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또 다른 물류기업 관계자는 “개정안의 취지는 의미가 있으나, 물류기업이 제대로 하지 않으면 공정위로 보내겠다는 것처럼 들린다. 기업으로서 여론재판이 될까봐 두렵다”고 말했다.
신고대상 역차별 우려
외국계 해운물류기업에 대한 조정 권고가 가능할 지도 의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번 개정안이 전 세계적으로 표준화된 법안이 아니다보니 국내법을 그대로 적용하기엔 어려움이 있다는 설명이다. 대표적으로 외국인투자자들이 투자 국가의 법령이나 정책 등에 의해 피해를 입으면 국제중재를 통해 손해배상을 받는 투자자국가소송제(ISD)가 거론될 수 있어, 정부가 외국계 기업에 대해 국내기업들과 동일한 잣대를 내세우기는 어렵다.
국토부와 해수부도 이제 본회의를 통과한 만큼, 외국계 자본을 권고할 수 있는 방안은 마련하지 못했다는 입장이다. 국토부 관계자는 “해운물류부문에서 외국계 자본에 동일하게 조정권고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아직 구체적인 방안이 없어, 법안 시행 6개월 전까지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가하면 우체국과 일부 소셜커머스업체도 문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국내 주요 택배운송사들은 화물운송차사업법에 따라 국토부가 담당하고 있지만, 우체국은 우편법을 적용받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기관이라 국토부가 조정권고를 할 수 없다. 또 전자상거래 유통서비스를 제공하는 소셜커머스업체도 자가물류를 하는 경우에만 국토부의 신고대상에 해당된다.
결국 어떤 업종으로 등록돼 있느냐에 따라 국토부의 조정권고를 받게 돼, 신고대상이 국내 주요 대형물류기업에 국한될 거란 시각이다. 국토부 관계자는 “신고센터에 접수된 내용을 개정안에 따라 조정권고할 예정이다. 그 외의 내용은 관계기관이나 공정위가 판단하도록 넘길 것”이라고 밝혔다.
< 류준현 기자 jhryu@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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