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이 낭만적으로 보인 이유 !
우리는 근대의 해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사실은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해상에서 개인의 이익을 위해 폭력을 휘두르는 폭력조직에 불과한 해적을 어떤 사람들은 꽤 낭만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것은 해적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진 1880년대에서 1940년대의 시대적 배경이 한몫을 했다고 보면 된다. 이 시기는 유럽과 미국의 제국주의적 팽창이 한참이던 시기이다.
역사는 항상 강자의 편에서 기록하게 된다. 산업혁명 당시 영국의 정치경제학자들인 고전파 애담 스미스, 토마스 맬더스 등은 아시아 교역 강제 지배의 정당성을 찾고 서구의 경제적 우월성을 설명하기 위해 유럽식 자본주의적 발전이 진보라는 개념을 만들어서 성공한 서구는 “진보적”고 그렇지 못한 아시아는 “후천적” 이라고 한 것처럼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로 포장된 연구는 어느 정도 긍정적인 측면을 허락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국의 해적은 국가를 대신해서 바다로 진출하여 적국의 배를 빼앗고 약탈하는 용감한 인물로 규정하였다. 게다가 항상 나오는 이야기이지만 해적이 낭만적으로 이상화하는 데에는 힘들고 고달픈 민초들의 삶이 그 한몫을 하고 있다. 기존질서의 지배계층에서 소외된 무기력한 대중들이 사회적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은 감춰진 욕구의 반영이 그 이유이다. 해적들은 비록 폭력적이지만 자유롭게 살며 한 번에 약탈로 엄청난 보물을 얻어 아무도 모르는 섬에 숨겨두고 평생을 멋지게 사는 자들이라고 믿었다.
이런 식의 이미지를 만드는데 크게 기여한 것은 루이스 스티븐슨이 쓴 “보물섬”이라는 소설이다. 보물지도, 파묻은 약탈품, 앵무새, 나무의족, 안대, 관속에 들어간 15명의 선원들 같은 신화적인 내용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다. 이 내용들 중의 일부는 사실에 근거한다. 많은 선원들이 밴건(Ben gunn)처럼 무인도에 버려지고, 롱 존 실버처럼 외다리 해적도 존재하고, 앵무새를 기념물로 가지고 다니는 해적도 있었다. 그러나 해적들이 얻는 것은 금 은 보화가 아닌 일반화물이고 그것을 묻어두지 않고 곧바로 써버렸다. 대부분의 내용이 있을 수 있는 허구라는 사실에 관심을 두는 이는 별로 없다.
여기에 해적의 이미지를 낭만적으로 만드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헐리우드 영화이다. 해적들은 대부분 선장의 폭력에 대항하거나 지배세력에서 소외된 자들로 구성된 불법조직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폭력조직처럼 나름대로의 엄격한 질서, 그리고 모두가 만족하는 민주주의(?)적 의사결정 및 분배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해적자신들은 비교적 만족하였다고 한다.
민초들은 지배세력의 몰락과 일확천금에 목말라한다. 그것은 현실세계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워 상상세계에서라도 일탈과 성공을 원한다. 그걸 만족시켜주는 것이 바로 남자 주인공이 멋진 모험을 하고 섹시한 여인들이 등장하는 헐리우드 해적영화들이다. 이런 경로로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해적에 대한 환상이 남게 되었다.
근대 해적은 영국 때문에 생겼다 ?
그런데 우리가 눈여겨 볼 것은 근대해적에 관한한 항상 영국, 그리고 해군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근대초기에 영국과 영국의 최대 라이벌 에스파냐, 그리고 유럽각국들은 해상에서 서로 경쟁하거나 전쟁상태에 있었다. 각국의 정부는 해상을 전부 통제 할 수 없어 무장을 갖춘 민간선박에게 공식적으로 적국의 배를 공격하거나 약탈하도록 부추겼다. 정부가 할 일을 일반인들에게 넘겨서 적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목표이므로 자국의 배는 대상이 아니었다. 이들을 사략선업자(privateer)라고 부르는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영국의 프란시스 드레이크다. 이 때 영국에서 해적들은 적군을 물리치면서 동시에 경제적 이익을 얻는 멋진 사나이로 인식되어 얼마나 인기 있었느냐하면 대중들의 시, 소식지, 목사의 설교 등에도 자주 등장할 정도라고 한다.
해적의 다른 유형 역시 영국과 관계가 있다. 17세기 전반에 카리브 해에서 에스파냐와 에스파냐 식민지의 선박들을 공격한 해적들을 말하는데 “버커니어(buccaneer)"라고 부른다. 이들의 주류는 서인도제도에서 살아가던 프랑스계 개척민들이며 여기에 영국과 네덜란드계의 사람들도 참여하였다. 특히 오늘날의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이 있는 섬의 사냥꾼 출신들이 많았다. 1620년대 에스파냐가 이들을 축출해버리자 적개심을 품고 사냥꾼에서 해적으로 변신하였다. 이들은 서인도 제도의 에스파냐 요새들을 공격하여 막대한 이익을 취했고 저항하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고문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대표적인 인물이 영국계 헨리 모건이다.
이 두 유형의 해적은 영국의 라이벌인 에스파냐에 대하여 적은 돈으로 전쟁을 수행하게 하는 방식으로 공격대상과 활동지역이 정해진 특징이 있다.
그리고 다음 세대에 등장하는 좁은 의미의 “해적”이 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해적의 모습과 가장 많이 닮았다. 이들은 완전이 바다의 무법자이다. 나라를 가리지 않고 돈만 되면 어느 나라의 배도 약탈하는 자들로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서 국가에도 덤벼드는 폭력조직이다. 1713년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이끗난 후 맺어진 평화조약은 바다에서의 불법약탈을 각 나라가 스스로 통제하도록 합의하여 해적은 공공의 적으로 간주되었지만 어떤 나라도 망망대해를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었다.
한편, 해적의 활동범위가 확산된 이유는 영국과 관계가 깊다. 17세기 말 영국해군이 힘으로 바다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들이 영웅으로 칭찬하던 해적을 소탕하기 시작하였다. 해적의 세력은 당연이 축소되었으나 바하마제도의 근거지를 읽은 해적은 활동범위를 북미해안, 서부아프리카해안으로 옮기었다. 그리고 마다가스카르는 인도양 해적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런데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이 끝나고 영국이 해군을 축소하여 실직선원숫자가 크게 늘고 1715년부터 시작된 불황 때문에 대우도 형편없이 나빠지자 해적의 숫자는 크게 늘어 해적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근대 해적은 영국 때문에 망했다 ?
현대판 해적의 활동무대가 된 인도양의 해적은 어떤 자들 이었을까?
근대사를 보면 인도양은 처음에 포르투갈 인들이 먼저 들어와 무역을 하고 있었고 네덜란드와 영국은 후발 주자였다. 이 후발 주자들은 무역을 빙자하여 사략선과 해적방식으로 이익을 취하곤 했다. 인도와 유라시아 대륙을 잇는 해상교통로 상에는 수 많은 순례단과 영국 동인도회사 선박이 오갔는데 해적들은 이배들을 무자비하게 약탈했다.
1694년 인도를 떠난 영국의 동인도회사 선박 3척이 아프리카 소말리아 부근에서 해적에게 약탈당했다. 해적 두목은 영국인의 헨리 에버리로 자기나라의 배를 공격한 것이다. 에버리는 또 1년 후 무굴제국 황제의 배를 습격해 영국과 무굴제국간의 분쟁을 만들고 잠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편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금은보석 향료 실크 도자기를 싣고 인도와 유럽을 오가는 선박들이 해적들에게 자주 약탈당했다. 여기에 윌리어 키드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한때 영국의 사략선 선장이었고 해적선을 소탕하는 일을 맡았으나 훗날 오히려 해적이 되어 인도양에서 약탈을 일삼았다. 결국은 영국해군이 진압에 나설 수밖에 없었고 그러면서 이들의 약탈은 끝났다. 윌리엄 키드는 체포되어 끔찍하게 처형당했다. 그의 시신은 쇠창살에 가둬 템스강변에 2년이나 전시하여 해적에게 매서운 본때를 보여주었다.
1730년까지 이어진 ‘해적 황금시대’의 후반은 영국 해군과의 싸움으로 말 그대로 피의전쟁으로 얼룩진다. 해적 황금시대에 해적에게 나포된 배는 가장 유명한 해적인 바르솔로뮤 로보츠에게 400척이상, 에드워드로우에게 140척, 블랙비어드에게 역시 140여척 정도 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종의 해적국가로 시작한 영국이 자의든 타의든 해적을 소탕하려고 나선 것은 이 나라가 보편성을 주장하는 제국을 향해 한 단계 도약했음을 말해 주면서 이제는 해군만이 바다의 영토를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킨 것이다.
사실 18세기가 지나면서부터 해상에서의 무력 다툼의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국가가 아닌 회사차원에서 자신을 보호하려는 시도는 거의 불가능해졌다. 식민지 지배를 회사기능으로 대신했던 동인도회사 방식이 불가능해지면서 1830년대 까지 모든 회사들이 문을 닫고 정부가 식민지를 인수 한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해상에서의 통행권과 해적의 문제도 마찬가지로 정부가 전담하게 되면서 서구 열강들의 해군력은 팽창하게 된다. 이것은 곧 해상에서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 등장함을 의미한다.
소말리아 해적 영국에 원인이 있다 ?
이 또 다른 형태의 해상폭력 주도세력에서 밀려난 그룹이 인도양상에서 래로운 형태의 해적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났다. 국제상공회의소 국제해사국이 말레이시아 남쪽 말라카해협과 함께 양대 해적 소굴로 꼽는 소말리아 해안이 그들의 주 무대이다. 이곳은 근대부터 인도와 유라시아 대륙을 잇는 해상 교통로의 요지이다.
근대 해적들과의 차이는 약탈한 선박이나 화물을 스스로 처분하여 이익을 챙기기보다는 체포한 선원을 인질로 석방금 협상에 더 관심을 보인다.
소말리아는 이슬람 테러단체 알카에다가 게릴라 훈련기지로 사용할 정도로 무질서한 나라이다. 소말리아 내전은 누가 만들었고 내전으로 인해 통제 불가한 소말리아 해적은 누구 때문일까? 일차적인 책임은 그 나라 자신에게 있다. 물론 여러 가지 외적인 요인이 있을 수 있지만 하나의 핑계에 지나지 않음을 우리는 교훈으로 알아야 한다. 국민과 지도자가 현명하지 못한 데에 그 원인이 있다. 소말리아는 큰 땅 덩어리, 유전, 3300㎞나 되는 해안도 있다. 소말리아는 나이지리아가 세계적인 무역사기로 해적질 하는 것처럼 선박나포라는 해적질을 일종의 영웅시하고 있다. 마치 근대 해적인 사략선의 선원들처럼... 여기에 이 나라 해적에 대한 동정이 어려운 이유가 있다.
그렇지만 소말리아 해적들을 부추기는 어떤 조직적인 세력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문제가 된다. 이 세력들은 해적들에게 무기, 자금, 정보를 제공하여 나포한 선박으로 생기는 이익을 공유한다. 이것은 근대 초기 사략선 형태의 해적방식의 모방이며 또 피랍된 선박과 선원의 협상은 영국계 브로커들이 전담하고 있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많은 선박보험회사들이 영국계 보험회사와 재보험 형태로 계약을 맺고 있다. 그리고 과거 영국이 세계 해운사의 중요한 부문의 차지하였고 현재도 영국에 세계적인 해운시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영국계 브로커가 활약하게 만드는 환경적 요인이 된다는 점은 이해한다. 그러나 소말리아 해적이 영국 배를 나포했다는 소식은 없었던 점을 지적하지 않더라도 여러 가지 정황상 영국이 해적활동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또 소말리아 해적 소탕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가장 좋은 위치에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바다에서 희망을 찾다.
바다에는 꿈과 희망이 있다. 육지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을 얻을 수 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누구나 할 수 있다.
과거 영국에서는 적대국과 싸우기 위하여 육지에서 부족한 국력을 사략선이란 형태로 바다에서 채웠다. 또 에스파냐 인에게 축출당해 고향과 생활의 터전을 잃은 서인도제도 인들은 바다를 이용하여 그들이 빼앗긴 것을 찾았다. 그리고 기존세력에게 배척당하거나 육지에서 살기 어려운 사람들은 해적이 되어 필요한 것을 바다에서 구하였다. 오늘날 소말리아 해적들은 자기나라에서 얻을 수 없는 부를 바다에서 찾으려고 한다. 이들의 행태는 모두 폭력조직성이다. 그러나 현재는 합법적인 방법으로 육지에서는 얻기 힘든 보물을 바다에서 찾아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다. 육지에서는 부족하고 불가능하지만 바다를 통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 너무 많다. 무역으로 부를 늘리고, 원자재의 수입으로 부가가치를 늘리고, 제조업의 운송비의 경쟁력으로 시장을 확대하고, 해양자원 활용, 군사적 이용은 물론이거니와 해양산업 그 자체로 인한 수입증대도 육지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요즈음은 바다 관련 뉴스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모두 본질은 외면하고 단편적이며 자극적인 데에 너무 열중하는 것 같아 아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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