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5 海運韓國을 돌이켜 보는 추억과 回想의 旅路 - (31)
새 천년(New Millenium)으로 서기 2000년을 맞았다. 우선 90년대가 저물자 전 세계적으로 국가기관을 비롯한 산업계가 신경을 곤두세우며 염려해 왔던 Y2K(밀레니엄버그) 문제가 98년 들어서 본격적으로 논의됐었다. 99년 연말에 이르자 선주협회를 비롯한 외항선사들도 잇달아 대책회의를 가지며 문제의 심각성에 우려를 면치 못했다.결론적으로 2000년이 밝았으나 심각한 수준의 트러블은 발생하지 않아 지나친 기우로 끝나 천만다행이긴 했었다.
당시 사용중인 컴퓨터가 밀레니엄버그(실은 Centium Bug)로 2000년 1월1일 자정이후 연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결함이 발생하여 컴퓨터를 사용하는 모든 전산시스템이 마비되어 치명적인 문제를 야기하게 될 지도 모른다(Computer Moratorium)는 너무나 심각한 우려였다. 2000년 이후의 연도를 컴퓨터가 평소 인식하고 있는 연도 표기는 두 자리로서 2000년을 00년으로 인식하게 되면 18세기에 태어난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인식할 수도 있다는 연도개념의 혼돈반응 발생의 논리였다.
New Millenium 2000년 맞아도 Y2K 電算마비 안돼 큰 다행
은행 등 금융권의 이자 계산부터 모든 연산 결과가 왜곡될 수가 있으며 또 세금 계산, 계약 만기일 등 날짜와 관련되는 사항 등 모든 일상에서 일대 혼란을 야기하는 빅뱅사태가 야기된다는 천재지변설. 그러나 우려시점이 닥쳤으나 극히 일부 부분적인 에러 외에는 심각한 수준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아 전 세계가 안도했던 기억이 벌써 10년 전이다.
2000년 들어 1월13일 해양수산부는 차관을 거쳐 KR(한국선급)회장을 역임한 제5대 이항규장관이 취임했고 이어서 3월28일엔 현대상선 현영원회장이 제22대 선주협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정부측 행정책임자와 해운업계를 대표하는 민간단체 총수가 모두 바뀌게 된 것이다. 현회장은 지금의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의 부친이자 작고한 남편 정몽헌 회장의 장인으로 정주영 명예회장과는 사돈간이다.
83년 해운합리화로 직접 경영하던 신한해운을 현대상선에 합병하고 회장을 맡으면서 언젠가 선협 회장직도 예상돼왔고 본인도 희망해 오던 터라 젊은층에서 무리없이 다시 비중 큰 그룹선사 원로급으로 민간단체 해운계 총책이 회귀하게 된 것이었다. 아울러 해운계 기금을 모금하고 관리하는 선주협회 산하의 한국해사재단 이사장직도 겸하게 된다.
부회장으로는 KSS 사장 장두찬 수석을 비롯하여 대부분 유임됐고 감사는 동진상선의 이양희 사장이 유임되고 부관훼리의 한도용사장이 신임 감사로 선임됐다.
海洋部 이항규·노무현장관 취임에 선협은 현영원회장 선임
사무국도 박창홍전무이사가 유임됐고 범양상선에서 협회 파견 근무를 계기로 필자와 각별한 인연을 맺고 복귀와 파견을 거듭했던 선장 출신의 박찬재 이사(한국해대 27기)가 상무이사로 승진했다. IMF 사태로 인해 폐지됐던 상무이사 직제가 2년만에 부활한 것이다. K항업 영업차 광화문을 오갈때 가끔 들르면 시집온 며느리 든든한 친정집 들르듯 전무와 상무가 그대로라 위로가 컸고 필요한 각종 물동량 자료와 신설회사 정보를 얻거나 소개를 통해 도움말을 받기도 하고 잠시 쉬어갈 수도 있어서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느티나무 정자처럼 참 편하고 좋았다.
그러나 대망의 2000년 해운업계는 유가급등에 따른 운항비 상승으로 수송활동은 크게 위축됐고 여전히 부채비율 200% 적용문제가 장애가 되는 등 어려움이 컸다. 36개 선사의 해운수입은 물동량과 보유선복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원화 가치의 하락으로 전년비 10.6%가 증가한 16조8,075억원을 기록했으나 세후 당기 순이익은 막대한 영업이익에도 환차손으로 전년도의 흑자경영에서 6,600억원이란 적자로 반전했다. (별첨한 당시의 선복 및 운임과 손익표 참조)
그해 3월22일 정부는 ‘1974년 해상에서의 인명안전을 위한 국제협약에 관한 1988년 의정서’와 ‘1966년 국제만재흘수선협약 1988년 의정서’를 공포하게 된다. 5월17일에 제9차 아시아선주포럼(ASF)이 다시 서울에서 개최되었고 6월19일에는 한중해운협의회가 열렸으며 중국을 오가는 선사들은 ‘한중화객선사협의회’를 발족시켜 초대 회장에 위동항운의 이종순 사장을 뽑았다.
그리고 6월13일 북한을 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담후 지금까지도 발목이 잡혀있는 6.15 공동성명을 발표한 바있는 참여정부 김대중 대통령은 제6대 해양수산부장관에 노무현 13, 14대 전 의원을 선임했고 8월7일 취임식을 가졌다. 수직적인 사다리 타기식 결재라인의 개혁과 직원들의 다면평가제 등등 변화된 행정으로 숱한 화제를 모았고 단명 했지만 야자타임 등으로 인구에 회자된바 있는 11대 장관을 역임한 당시 최낙정 국장과 업무상 명콤비를 이뤘었단 후일담도 퍼졌던 것으로 기억된다.
또 4월12일에는 슬로베니아 공화국과의 무역 및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을, 6월13일엔 쿠웨이트와 소득과 자본에 관한 조세의 이중과세 회피와 탈세방지를 위한 협정을, 연달아 6월16일에는 우리나라와 모로코 왕국과도 각각 동 협정을 체결하게 됐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남북정상 6.15 공동성명 발표
그 밖에 8월에 서울과 평양에서 제1차 남북 이산가족 방문단을 교환하게 되었고 금강산 항로에 설봉호를 투입하고 제2차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경의선도로 연결의 역사적 합의를 보는 쾌거를 이뤘다. 9월15일엔 시드니올림픽, 10월20일에는 서울에서 제3차 ASEM회의, 11월15일 브루나이에서는 APEC 정상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그리고 3년차를 맞은 군산의 K항업 제반 업무는 껍데기만 대표인 필자로선 오너의 경영 내막이나 운영 사정을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일이긴 해도 모든게 갑갑하고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자연히 군산에 내려가는 횟수도 줄어 들고 박정식 영업부장도 경험삼아 처음으로 해 본 장사일에 흥미를 잃은 듯 새 일을 찾아 떠나겠다고 했다.
그래서 업계에 K항업을 알리고 거래를 틀만한 곳은 모두 이 잡듯 샅샅이 뒤졌으니 실은 더 할 일이 없었고 큰 활동않고 월급만 축내는 무위도식을 하자니 뒷통수도 간지러웠다.
해 넘기면 예순이 되고 전직에서 못다해 아쉬웠던 임원임기 3년도 K항업 재활용으로 채웠으니 이젠 푹 쉬며 여행이나 다녀야겠단 생각을 굳혔다. 그래서 연말이나 신년을 기해 활동을 접겠단 계획을 굳히고 회사에 사의를 전했다.
우연인가 고향 ‘선산’서 태어나 자라다가 고등학교를 ‘부산’에서 보내고 서울에서 공부하고 살다가 ‘일산’으로 이사한 후 다시 ‘부산’ 가서 지방근무 후 퇴임하고 이어 ‘군산’ 가서 재 취업을 했다가 다시 ‘일산’으로 돌아 오다니 평생을 ‘산짜(山字)’지명만 찾아 다니며 보내는 역정이 희한하단 생각도 들었다.
K항업 대표직 3년후 KBS-TV 태조왕건 엑스트라 아르바이트
그러던 어느날 평생동지로 옆 아파트에 사는 대학친구 K군이 심심풀이 땅콩 부업(?)의 놀라운 취업 아이디어를 냈다.
필자더러 회사 일을 보면서도 금토일 주말 2~3일간만 뛰어도 되는 용돈벌이로 공중파 TV방송의 사극물 드라마의 병졸역 전문의 엑스트라를 하자는 제의였다. 평소 영화에 관심이 많던 필자로선 대하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유명 배역들도 가까이서 보고 말로만 들어오던 제작과정도 지켜보며 돈도 번다니 1석3조의 기회를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그것도 취업연령 제한이 있어서 남자는 60세 여자는 35세까지만 가능했고 엑스트라 대량공급 전문 용역회사는 신상 등록과 면접만으로 합격을 시켜 얼굴없는 배우(?)가 되는 길은 무척 쉬웠다. 그러나 늘 출발은 밤 12시에 여의도 KBS별관 (옛 TBC건물)에 집합해서 밤 버스로 세 시간 정도를 달려서 새벽에야 상초리 문경새재 촬영장에 도착하는 스케줄의 반복이었다. 30년 전 논산 훈련소를 마치고 3보충대를 거쳐 밤 트럭을 타고 최전방에 팔려가던 시절과 너무나 흡사해 매번 갈 때마다 모골이 으시시했다.
살을 에는 엄동설한 그것도 전신이 얼어 붙고 손발의 감각이 마비되는 컴컴한 새벽녘에 여러대의 대형버스로 촬영장에 도착한 수백명의 단역배우(?)들은 군대식 전투대형의 중대 및 소대나 분대단위로 나뉘어 조를 짰다. 바로 맡은 배역대로 장군복이건 병졸복으로 여러겹의 복장으로 무장을 한 후에 대기중인 분장사 앞에가서 수염을 붙이거나 얼굴화장에 위장을 하는 등 분장을 끝내고 군모를 쓴 후 활이나 창 이나 깃발 등 병기를 지급 받아 전투에 참여하게 된다.
후삼국 시대의 사회상과 왕건의 통일과정을 그린 걸작 KBS 대하드라마 ‘태조왕건’의 촬영장은 지휘 장군의 명에따라 춥고 힘들고 ‘빡센’ 새벽 첫 촬영을 시키는대로 멋도 모르고 정신없이 끝냈다. 한참 뒤 날이 밝은 후에야 그 어마어마한 규모와 웅장함에 놀라 기절초풍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서 나온 돈으로 저렇게 지었을까 궁금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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