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0-07 14:00
KSG에세이/ 무늬만 海技士 평생을 짝퉁으로 살며 얻은 벼슬 “해운계 甘草” (18)
서대남 편집위원
G-5 海運韓國을 돌이켜 보는 추억과 回想의 旅路 - (18)
박창홍전무가 부임한 90년에는 고유가와 세계해운경기의 후퇴로 한국해운도 정기 부정기부문 모두가 약보합세의 어려움을 겪긴 했으나 내외항 계획조선으로 12척 15만6천G/T을 보태 34개 외항선사의 선복량은 434척 910만G/T으로 1천만G/T을 육박하기에 이르렀다. 국적선 수송물량도 2억2천2백만톤에 운임수입도 전년보다 7.6%가 늘어난 29억1,438만달러로 국적선대 적취율 37.5%를 시현했다.
그리고 91년에 들어서는 한일항로의 과당경쟁 방지책의 일환으로 컨테이너 수송협정(KJKCFA)과 근해선사협의회(재래선)를 통합하여 ‘한국근해선사수송협의회 (Korea Nearsea Freight Conference/KNFC)’란 운임동맹을 18개 선사 (133척 256,312G/T)가 참가하여 재결성 했다.
WTO체제 돌입에 따른 무역환경의 변화로 전세계적으로 독과점규제법(Anti-trust Law) 시행이 세계경제의 핫이슈로 대두된 시점이라 해운동맹이 와해 돼 가는 마당에 이에 역행하는 운임동맹(Conference)의 재결성은 있을 수 없다는 비난이 빗발쳤다. 그러나 선주협회 상무이사를 거쳐 협정책임을 맡았던 전임 조기형사무국장으로 부터 89년 이후 바통을 이어 받았던 통합기구의 변영환 사무국장은 선사근무 경험을 바탕으로 협정규약 준수의 악역을 맡아 독종 포청관(?)노릇을 무난히 해내는 솜씨를 보였다.
KNFC등 독립 수송협의체 활성화로 항로질서 정비
KNFC 외에도 동남아정기선사수송협의회, 원목·근해부정기화물수송협의회(LOGTRA), 한·인니운임동맹협의회, 한중정기선사수송협의회 등 협회 본부를 대외 바람막이로 해서 결성된 독립채산제의 작은집들(?)이 수송협의체란 일종의 운임카르텔을 형성해서 항로질서를 유지하거나 덤핑을 예방한 효과로 얻는 반사이익은 상당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선주협회와 협의체의 회원 선사들은 대박이 터지고 노가 나고 재미를 봐도 사무국 머슴들에겐 극비로 하다보니 적은 세경을 받아도 주인집 안살림 곳간 넘치는 쌀뒤주 사정은 알 도리가 없는 노릇이었다.
81년에 발족한 한·인니운임동맹은 10년차를 맞아 한국측의 동남아해운 흥아해운과 인니측 6개선사가 중심이 되어 전년비 27.6%가 늘어난 왕성한 수송활동을 보였고 한중 정기선사협의회는 북방해운 교류의 첫 결실로 동남아해운이 COSCO대리점 경험을 바탕으로 SINOTRANS와 합작으로 장금유한공사(SINORKOR)를 설립했다.
한편 협회는 해양오염방지법이 규정하는 자재 및 약제 비치를 위해 관련부처 공동부령의 시행령에 따라 해양오염방제조합센타 운용을 계속하고 부산(위원장: 범양상선 안병택상무) 및 인천지구협의회(위원장: 조양상선 김용택이사)를 적극적으로 활성화하여 항계내 애로사항 해결과 항만요율 조정등 입출항 현장에서 발생하는 각종 현안 타결에도 지방해운관서와 함께 관련선사의 지혜를 모아 제 구실을 다 하도록 박차를 가했다.
또 ’95.5.1일을 기해 DM 홍보자료로 월간 ‘해운’ 첫 호를 발행했고 선박의 해외치적을 역외제도로 발전시키기 위한 선박치적제도 연구반을 만들어 활동을 개시했으며 부산지부 사무실도 선원노조에서 신축한 부산 중앙동의 마린센터로 옮기게 됐다.
그리고 한미해운협의회를 개최, 현안문제를 심층 논의했고 부족한 보통선원 충당을 위해 오래 끌던 중국인력 선원고용에 관한 지침도 마련했다. 청와대와 경제기획원이 중심이 되어 산업전반에 걸친 SOC 민간자본유치 촉진을 위한 특례법 입안 작업에도 적극참여, 필자가 해운분야 타스크포스팀의 일원으로 교통부와 함께 ‘사회간접자본투자기획단’에 파견되어 힘에 겨운 작업을 하던 기억도 새롭다.
그해 6월에는 부산컨테이너부두가 준공을 봤고 7월에는 한국해운중개업협회가 창립됐으며 학계에서는 한국해대 학장과 선주협회 이사장을 거쳐 해사문제연구소를 설립한 윤상송박사와 한동호박사에 이어 역시 한국해대 학장을 역임한 이준수 교수가 한국해운학회 회장으로 선임 됐다.
KMI는 해대교수와 한국해법회 회장을 역임한 배병태박사를 새로운 원장으로 영입했다. ’91년은무엇보다 우리나라가 대망의 UN산하 세계해사기구(IMO)의 이사국으로 선출되는 쾌거를 이루어 한국해운이 선진그룹으로 도약하는 해양역사상 뜻깊은 해를 기록하게 되었다.
’91년11월 IMO 理事國 진출, 해운 先進國 도약 발판 마련
그리고 선사들은 오로지 한가지 돈벌이에만 몰두하지만 사무국 임직원들은 머슴노릇을 하면서도 가끔은 중립에서 호된 수퍼바이서 악역을 맡아서 온갖 고역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는 조직이다. 하긴 하늘을 높이 나는 새도 먹이는 땅에서 구한다 했는데 황새도 아닌 뱁새 주제에 밥줄이 달렸으니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내야했고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일만 도맡아 하는게 당연지사로 받아들여야 했다.
모두가 주인이니 결국 주인이 많다는 건 역설적으로 주인이 없단 얘기와 같다고는 하지만 한 사안을 두고도 선사간에 이해가 엇갈리는 일이 많고 보니 이를 조정해서 합의점을 도출해야만 하는 역할이 사무국의 입장으로선 정책당국에 반영해야 한다는 절대명제 보다 항상 더 힘들었다.
결국 최대공약수 만점 도출을 해도 반대하는 최소공배수의 의견에 태클당하고 희석되어 50점으로 나락하니 어차피 먹는 게 욕 뿐이요 듣는 소리가 한수 아래 무능력 집단으로 평가절하 당했다. 소속원 거의가 전직을 거쳐온 과거가 많은 서부사나이들(?)이라 때로는 노인정이란 비아냥도 들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젊어서 사서하는 고생이 늙어서 신경통이 된다’는 요즘의 유행하는 우스개 버전의 원조같았다.
그럴 때마다 박전무는 “서상무! 많잖은 우리 월급의 반은 욕값으로 생각하시오!” 에 더해 “매를 들고 때리려 하는 사람에겐 잘 하고도 못한 체 맷감이 되어 주는 것도 우리의 할 일” 이라며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남을 배려하는 여유로움도 가진 넓은 그릇을 지니고 있었다.
집안이 쪼들리면 부부싸움이 잦듯이 시황이 나빠 돈벌이가 잘 안되면 선사들이 화풀이 할 데가 협회 밖에 더 있겠냐며 기다렸다는 듯 받아 주자는게 그의 지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필자가 지금도 실행은 어렵지만 좋은 교훈으로 삼는 얘기는 우월적 입장인 갑의 지적이나 힐책에 대해 을이 취할 가장 현명한 방법은 이를 되받아 즉각적인 항의나 반응을 보이거나 변명하지 말고 한 박자 쉬면서 그 진위가 밝혀질 때까지 일단 을의 탓으로 유보하라는 권유였다.
칼 맞아 죽을 놈이 장군 칼이면 어떻고 포졸 칼이면 어떻겠냐며 잘잘못이나 책임소재는 언젠가는 밝혀 질테니 사필귀정에 맡겨두고 잠시라도 마음 편히 갖자는 도닦는 수도승 논리였으나 수양이 덜 된 필자로선 울며 겨자 먹기로 참을 인짜를 수없이 새기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모든 게 잘되면 내 탓이요 못되면 네 탓이려니 선사와 머리 맞대고 같은 업무를 처리해도 목표가 다르니 그렇다손 치더라도 평생을 한 업계에서 한솥밥을 먹었지만 해운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선사나 협회가 넓은 의미의 한 집안 한 가족끼리면서도 늘 밑지고 장사한다는 말만 일삼는 데는 막을 장사도 없고 방법도 없었으니 해마다 일년을 살 예산따기 작전은 사무국 간부들에겐 피를 말리는 일이 되곤 했다.
매년 예산때 神經 곤두세우며 給與인상에 焦眉의 관심
그러나 닷 돈 보고 보리밭에 갔다가 명주 속곳만 찢겼다고 푸념하는 아낙처럼 선주 머슴 된 내탓이지만 올해는 적자니 내년을 보자는 뻔한 술수에 알고도 속아야 했고 월급쟁이가 다 비슷하고 마찬가지겠지만, 해마다 얇은 봉투를 감지득지 챙기며 넘어가는 꼴도 흡사 “길가에 사는 큰 아기 한길 내다보다가 다 늙는 꼴”과 다를 바 없는 직장이었다.
해마다 예산총회 때가 되면 입이나 다물면 밉지나 않지, 늘 “그때(옛날)는 좋았지만 작년(지금)은 나빴다.”고 과거는 괜찮았으나 현재는 어렵다며 또 “올해도 동결 내지는 한 자릿수를 두서너 토막 낸 선에서 결정하자!”를 들고 나오면 사무국의 총대를 맨 박창홍 전무 이하 식솔들은 밀고 당기는 바로 그 롤러코스트인가 씨소게임 같은 봉급 인상율 오르내림에 희비가 엇갈리며 숨을 죽여야 했다.
“몇 푼이 더 오를까?”에 목을 매던 일은 처연한 기억으로 새롭지만 그러나 필자도 계집자식도 굶어죽지 않았으니 석류는 떨어져도 안 떨어지는 유자를 부러워하지 않고 살아온 생활철학(?) 탓이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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