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차를 뽑은 지 얼마 안 되어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엔진이 갑자기 멈췄다고 가정해 보자.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차를 조립한 완성차 회사일까, 완성차 회사에게 엔진을 공급한 회사일까, 아니면 엔진의 설계도를 그린 또 다른 회사일까? 같은 질문이 바다 위에서도 그대로 나온다. 항행 중에 선박의 엔진이 멈추거나 고장 나는 경우 사고 원인이 엔진 같은 선박 핵심 장비의 결함이라면 분쟁의 무게중심은 조선소나 해당 장비를 만든 회사들로 옮겨간다. 이러한 분쟁은 새로운 형태의 선박이 개발되고 자율운항선박이 현실화되면서 더욱 빈번해질 수밖에 없다.
선박소유자 등이 조선소나 해당 장비를 만든 회사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근거는 제조물책임법에 따른 손해배상청구일 수도 있고, 일반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청구일 수도 있다. 두 청구 원인은 요건과 입증 부담이 서로 다르므로, 어느 쪽을 선택할지는 사건 초기에 정리할 필요가 있다.
제조물책임법은 제조물을 “제조되거나 가공된 동산”으로 정의한다. 선박은 동산이고 조선소가 가공·조립 공정을 거쳐 수많은 부품과 시스템을 결합시켜 만들어낸 거대한 산물이므로 원칙적으로 제조물에 해당한다. 선박에 장착되는 개별 장비도 그 자체로 별개의 제조물에 해당한다. 따라서 선박의 결함이 문제될 때 ‘선박 전체’와 ‘특정 부품’을 각각 떼어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제조물책임이 인정되면 일반 불법행위에 비해 결함과 인과 관계에 대한 피해자의 입증 부담이 한층 가벼워지는 점에서 실익이 적지 않다.
필자가 자주 접하는 질문 중 하나는 개별 장비를 제조한 (하청)회사처럼 선박소유자나 운항자와 직접 계약관계가 없는 회사에게도 손해배상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 여부다. 답은 “가능하다”이다. 장비를 제조한 회사가 제조물책임법상 제조업자에 해당하면 직접 제조물책임을 물을 수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제조상 과실이 인정되면 일반 불법행위로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직접적인 계약관계가 없더라도 고의나 과실에 의한 위법행위로 타인에게 손해를 끼친 경우 불법행위가 성립하고, 여기서 침해되는 이익에는 계약상 권리뿐 아니라 법질서 전체의 관점에서 법률상 보호할 가치가 있는 이익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후자에 관한 좋은 예가 서울중앙지법 2017. 9. 21. 선고 2014가합5918 판결이다. 인도받은 지 5개월도 안 된 유조선의 엔진이 반복적으로 정지돼 결국 운항을 중단하게 된 사고와 관련해 유조선의 선체용선자와 보험자가 엔진제조사와 엔진설계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건이다.
사고 원인은 엔진설계사가 내부 검토를 통해 “연료 분사 변수를 새로 설정해야 한다”라는 결론을 내려놓고도 그 사실을 운항자, 선주, 엔진제조사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데 있었다. 법원은 엔진제조사에 엔진제어장치 변수의 적절한 설정과 입력은 엔진설계사가 독자적으로 수행하는 영역이고, 엔진설계사가 엔진제조사에게 해당 정보를 제공하지 않은 이상 엔진제조사는 그 사실 자체를 알 수 없었다는 이유로 과실을 부정해 청구를 기각했다. 반면 엔진설계사에 대해서는 정보를 보유했음에도 그 정보를 운항자나 제조사에 고지하지 않은 부작위를 이유로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했다. 즉, 소송을 제기한 선체용선자 및 보험사와 아무런 계약관계가 없었던 엔진설계사에게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한 사안이다.
책임은 외형이 아니라 실질
이 사건은 같은 사고를 두고 엔진설계사와 엔진제조사의 책임이 정반대로 갈렸다는 점도 흥미롭다. 결함에 관한 정보를 누가 보유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누가 그 정보를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는지가 책임 인정의 결정적 변수로 작용한 것이다. 엔진제조사는 엔진의 제조라는 외형적 작업을 수행했지만 정작 사고원인이 된 변수 조정에 관한 정보를 가지지 못했고, 엔진설계사는 그 정보를 손에 쥔 채로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결국 책임은 외형이 아니라 실질에 따라간 것이다. 실무에서 사고가 발생한 이후 청구 상대방을 정할 때도, 외형뿐만 아니라 실질에 대한 검토와 추적도 이뤄져야 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이 의미를 조선업 및 해운업의 미래에 적용해 보자. 앞으로 개발될 새로운 형태의 선박이나 자율운항선박은 점점 복잡한 시스템과 장비로 채워질 것이다. 그 안의 핵심 변수는 외형을 만드는 조선소조차 알기 어려운 영역, 즉 시스템이나 장비의 설계자나 공급자만이 알 수 있는 영역에 자리 잡을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사고가 발생했을 때 조선소가 첫 번째 책임자라고 일응 간주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결함의 원인 정보를 보유하고 통제할 수 있었던 자가 누구인지를 추적해야 할 것이다. 외형으로 책임을 묻던 시대에서 실질에 따라 핵심 정보의 보유 유무에 따라 책임을 묻는 시대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새 차의 엔진이 멈췄을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완성차 회사에 전화를 건다. 그러나 진짜 책임은 엔진을 만들어 공급한 회사일 수도, 엔진의 설계도를 그린 또 다른 회사일 수도 있다. 선박 사고도 마찬가지다. 사고가 났다고 무조건 조선소만 바라볼 일도 아니고, 장비나 부품을 만든 회사 한 곳에만 책임을 몰아붙일 일도 아니다. 누가 어떤 정보를 손에 쥐고 있었는지, 핵심 정보는 누구의 통제하에 있었는지를 차분히 풀어가야 한다. 이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 환경 속에서 해상법 실무가 함께 진화해 가는 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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