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8-17 13:20

기획/ 외화대출규제, 해운산업 발목잡나

한은 외화대출 용도제한 10일 시행
해운기업들 “선박투자 위축…외국으로 눈돌려”


●●●한국은행이 지난 10일부터 외화대출 용도제한 제도의 시행에 들어갔다. ▲원화사용 목적자금 ▲대내외화차입금 및 원리금상환자금 등 해외사용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자금에 대한 외화대출을 금지한다는 내용이다. 외화대출 규제로 외채감축 및 외화수요 증대를 꾀하고 나아가 외환 유동성 과잉을 제어함으로써 최근 몇년간 계속되고 있는 환율하락 추세를 견제하겠다는 의도다.

그런데 환율 안정과 외환 건전성 규제 차원에서 시행된 이 제도가 해운산업의 발목을 잡을 것으로 보여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모든 거래가 달러로 이뤄지는 해운산업의 특성상 시설투자자금에 대한 외환 대출이 금지될 경우 해운기업들은 원화를 대출해 다시 달러로 환전하는 절차를 거쳐야해 환율변동의 위험에 노출될 뿐 아니라 이로 인한 투자위축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해외사용 실수요’ 아니면 외화대출 안돼

한국은행은 지난 1일 ‘외국환거래업무 취급세칙’ 및 ‘외국환거래업무 취급절차’ 개정해 10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이로써 외국환은행이 거주자에 제공하는 외화대출금 및 대내 외화사모사채의 용도가 ▲해외사용 실수요 목적 자금과 ▲제조업체에 대한 국내 시설자금으로 제한됐다. 다만 수출입은행은 이번 용도제한에서 제외됐다. 수출입 지원 목적으로 금융이 이뤄지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이후 원화사용 목적 운전자금 대출을 중심으로 외화대출이 크게 증가했다고 이번 용도제한 실시 배경에 대해서 설명했다. 지난해 8월부터 외국환은행을 대상으로 외화대출을 실수요 위주로 취급하도록 창구지도를 실시함으로써 외화대출 증가세는 크게 둔화됐으나 상당규모의 운전자금용 외화대출이 여전히 계속 이뤄져 왔다는 것.

한국은행은 운전자금 용도 외화대출은 사실상 원화대출이 외화대출로 전환된 것으로, 이로 인해 해외로부터의 외화차입 증가를 초래하고 원화 절상압력을 가중시켜왔다고 지적했다. 또 저금리 엔화표시 운전자금 대출의 경우 환율변동위험에 노출돼 엔화가 강세를 띨 경우 원금상환 부담이 크게 늘어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이와관련 외국환은행의 외화대출은 지난해엔 163억달러 증가했으며 올해 들어선 상반기까지 21억달러가 증가해 6월말 현재 외화대출 잔액은 441억달러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중 국내 은행에 의한 대출이 390억달러로 대부분(89%)을 차지하고 있고 외국은행 지점은 51억달러로 11%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통화별로는 미달러화 대출이 284억달러로 전체의 64%, 엔화대출이 141억달러로 전체의 32%를 차지했다.

한국은행측은 외화대출 용도제한 실시로 외채 감축 효과와 외화수요 증대가 예상된다고 했다. 원화자금 사용목적 운전자금 대출의 신규 취급 및 롤오버(만기연장)가 차단돼 외채축소 효과가 예상된다는 설명이다. 이와관련 외화대출 잔액 441억달러중 절반 이상이 외화대출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같이 외화 시중 유입을 차단하고 외화수요를 높여 환율을 안정시키겠다는 이 제도가 해운산업 특히 외항해운업 전반에 질곡(桎梏)이 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해운기업 수입 90% 이상 ‘달러’

산업 특성상 외항해운업은 모든 수입이 대부분 달러화로 이뤄지고 있다. 외국 하주들 뿐 아니라 국내 하주들과의 운송거래에서도 ‘달러화 결제’가 기본이다. 운임 자체가 달러화로 표시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나 LG, 포스코, 심지어 중소하주들까지도 해상운송거래에선 달러로 거래가 진행된다. 때문에 대부분의 외항해운업체들의 경우 90% 이상이 달러화로 수입이 이뤄지며 수입 전액이 달러화 베이스인 기업도 있다. 또 해운기업들의 선박매매나 컨테이너 용기 제조 등의 주요 시설투자도 국내, 국외 거래를 불문하고 모두 달러화로 진행된다.

때문에 이 제도 실시로 선사들은 선박 매매나 용선계약 등의 자산투자에서 환위험에 그대로 노출되게 됐다. 선사들은 선박매매나 용선계약을 위해선 궁여지책으로 원화 대출을 받아 달러화로 다시 환전해 거래대금을 치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원화 대출금을 갚기 위해서도 모든 수입이 달러화인 해운기업들은 원화 환전을 다시 거쳐야 한다.

A선사는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지난 6월 국내 기업과 중고선 매매계약을 한 이 회사는 이달말 잔금을 치를 계획이다. 거래은행과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당연히 달러화 대출을 신청해 놓은 상태다. 하지만 외화대출 용도제한 실시로 이번 계약이 파기될 위기에 처했다. 제도 실시 이전에 체결한 계약이라도 대출이 시행일 이후에 발생할 경우 용도제한에 걸리기 때문이다.

A선사는 따라서 대출을 달러화에서 원화로 변경할 것인지 중고선 매매계약을 파기할 것인지 고민에 빠졌다. 원화로 하자니 환율하락에 따른 대출금 상환이 부담되고 계약을 파기하면 계약금을 떼일 수밖에 없다. 이 회사는 또 다음달께 국내 조선소에 신조발주를 위한 투자의향서(LOI)를 체결할 계획이어서 엎친데 덮친 격이 되고 말았다. 자산투자 계획이 전면 수정돼야 할 판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앞으로 국내 신조선 발주나 국내 중고선 매입 등 목돈 지출 거래가 큰 걱정”이라며 “단 시일내에 (용도제한이) 해결 안될 경우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울상을 지었다.

●계약업체들 당장 ‘발등에 불똥’

이 회사 뿐 아니라 다수 업체들이 이미 계약을 진행한 상태에서 이 계약 실시로 피해를 입을 처지에 놓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모 선사의 경우 해운중개업체에 계약을 달러화에서 원화로 변경해달라고 하소연하고 있다. 이 제도로 달러화 대출이 막혔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원화대출로 전환하려는 것이다.

B선사 관계자는 “해운업의 모든 계약은 달러 베이스로 이뤄져 대부분의 해운기업들은 일부 운영자금을 제외하면 모두 달러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구성한다”며 “이같은 산업 특성을 무시하고 일괄적으로 외화대출을 막는 것은 사업하지 말라는 것과 같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해운업계 관계자들이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환율안정을 위해 도입한 이 제도가 해운산업의 발전을 가로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외화대출 부채가 많은 해운업의 특성상 상환일이 도래한 외화대출금이 자금용도 제한에 걸려 기한연장이 어렵게 됐을 뿐 아니라 사후심사에서 해외사용 실수요 목적임을 증빙하지 못하면 은행에 대출금을 돌려줘야 해 거액의 상환 부담을 안게 될 기업도 나타날 것으로 예상된다.

해운업계 관계자들은 ‘제조기업에 한해 국내시설자금 투자 용도의 외화대출은 허용한다’는 예외조항에 대해서도 큰 불만을 나타내고 있다. 정작 허용돼야 할 해운업계는 놔두고 시설투자에 외화가 크게 필요 없는 제조기업은 허용하는 것은 외환당국의 산업군에 대한 몰이해를 반영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한국은행 관계자는 “정책적으로 기간산업인 제조업의 성장잠재력과 (제조업까지 금지했을 경우) 산업전반에 끼칠 영향을 고려한 조치”라고 말했다. 국가 기간산업인 제조업에 대해선 성장세를 해치지 않기 위해 특별히 숨통을 틔어주겠다는 의도란 설명.

하지만 이같은 해명에도 불구하고 제조업의 집단 반발에 따른 파장을 의식한 것 아니냐는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당초 전 산업군에 걸쳐 용도제한을 적용한다는 방침에서 제조업 허용으로 방향을 선회하면서도 산업군에 대한 사전조사가 이뤄지지 않았음을 감안할 때 용도제한 실시로 제조업이 얼마나 영향을 받을 것인지에 대한 데이터가 전혀 파악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 데이터가 없는 상황에서 제조기업들의 영향을 고려했다는 것은 그 근거가 약하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업계 관계자는 “제조기업의 성장성을 위해 허용했다고 하는데, 제조기업들의 국내 시설투자는 외화보다는 원화로 이뤄지는 경우가 크다”며 “외화대출 용도제한의 영향에서 오히려 자유로운 업종이 제조기업이다”고 말했다.

해운기업들에 대한 외화대출 규제로 관련 제조기업인 조선산업도 영업에 타격을 입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해운기업들이 선박투자처를 외국으로 눈을 돌릴 경우 국내 중소형 조선소들의 수주량 감소로 이어질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중소조선소, 영업에 타격 받을 듯

외국 기업으로부터 많은 물량을 수주하는 대형 조선소들과는 달리 중소형 조선소들은 아직까지 국내 해운기업과의 거래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국내 해운기업들이 이 제도로 인해 중국이나 베트남등 외국 조선소에 발주를 하게 될 경우 국내 조선소들의 급격한 실적 감소가 예상된다. 또 컨테이너 용기 제조업의 경우도 중소 조선소들과 같은 상황에 처할 수 있는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 해운기업들이 외국 기업을 통해 투자를 진행할 경우 중소형 조선소나 컨테이너 제조회사들은 영업에 큰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며 “해운업과 관련 산업이 동반 타격을 받게 되는 경우”라고 말했다.

해운기업들의 불만이 속출하자 선주협회는 용도제한 실시에 따른 해운업의 영향을 수집해 이를 한국은행에 제출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제조기업으로만 한정돼 있는 예외조항에 해운기업도 포함시켜 줄 것을 요청한다는 방침이다.

협회 관계자는 “도입된 정책이 철회되기는 어려울 것이지만 예외조항이 있는만큼 여기에 일부 산업을 추가하는 것은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며 한국은행의 대승적인 조치를 기대했다.

하지만 환율안정이란 큰 명분으로 외환당국에서 주도된 이 제도가 쉽사리 해운기업들과 타협점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건전성 규제라고 제도 도입의 이유를 밝혔듯이 제도가 시행된 만큼 그에 대한 결과치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산업정책과 외환 정책과는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며 “무리가 따르는 것을 알면서도 정책이 시행된 만큼 바꾸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 제도를 기회로 국내 조선발주 및 해운거래가 원화 거래로 전환되기를 기대한다”며 “선박발주에 대해서도 외화대출을 규제하는 이유는 이 자금이 조선소에서 원화로 환전돼 운영자금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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