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택배업이 제도권에 들어온 지 15년의 세월이 지났다. 초창기 소화물일관수송, 일명 택배 또는 문전배달제(이하 택배)로 불리는 화물수송형태는 일정중량 이하의 소화물을 Door to Door 운송으로 신속. 정확하게 책임수송 하는 것으로 정의되어 왔다. 초기에 택배는 혁신적인 화물수송으로 부각되었다. 본 지는 과거 기록 및 자료를 통해 국내택배산업의 초창기를 집중 조명해봤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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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특송시장을 잡기 위한 업계의 노력은 치열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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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들은 80년대를 거쳐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생활수준 향상과 욕구 다양화에 따라 고객만족 차원에서 새로운 서비스 상품 개발에 주력했다. 그 중의 하나로서 등장한 산업이 택배업이다. 당시 소화물일관수송, 문전배달, 특송 등으로 불렸던 이 신규 서비스 사업은 초창기 기업화물에 치중되어 이루어졌으나 다품종소량 생산시대, 서비스 산업 발달과 이에 따른 인식 확산, 기타 물류환경의 급속한 변화 등으로 개인화물의 비중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90년대 중반, 정식영업 허가업체보다는 비정식업체 난립
소화물일관수송이 운송서비스형태로 정착된 것은 1992년 6월로 볼 수 있다. 소화물일관수송사업면허를 제 1호로 취득한 (주)한진이 본격적으로 사업을 개시한 시기는 1992년 6월 15일. 물론 소화물 일관운송사업이 운수사업법상 허가제로 제도권에 도입된 것은 그보다 이른 1991년도였다.
1991년 12월 사업허가를 얻어 파발마라는 브랜드를 내세운 (주)한진을 필두로 국내에서의 소화물일관수송 업체는 계속해서 늘어났다. 금호특송(황금 개구리), 경동화물자동차(뉴포터), 건영화물 자동차(부엉이), 합동운수(수퍼맨), 동서배송운수(일개미) 등이 각자 브랜드를 내세워 사업을 개시했다. 대한통운은 1993년 3월 26일 수원, 현대택배(당시 현대물류)는 1993년 10월 15일 춘천을 시작으로 택배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90년대 중반까지 택배업은 정식적인 영업허가를 받은 업체 외에 1백여개업체가 음성적으로 영업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업체 관계자는 “당시 특송시장 수요상승에 대한 기대심리가 높아져 음성적으로 사업을 시작하는 업체가 많았다” 고 말했다. 그 당시 음성업체들은 대형 소화물일관수송업체들이 자동분류를 위한 오토소팅 시스템 및 자동화와 화물추적시스템 구축 등의 서비스 향상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는데 반해 이들 영세업체들은 시설부족으로 인한 도로상영업, 지입제 운영, 자가용영업, 운임덤핑으로 소화물일관수송사업 초기 이미지를 저하하고 시장질서를 어지럽힌 경향이 강했다고 이 관계자는 기억했다. 당시 단순히 차량운행상의 직접운송원가만을 회수하면 유지 가능한 무면허업체와의 경쟁에서 거액의 고정비 발생은 큰 부담일 수밖에 없는 형편이어서 초창기 대형 소화물일관수송업체들의 시설투자 효율성에 대한 확신에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했다.
당시 많은 중소특송업체들이 법적인 조항에 맞지 않는 체 불법영업을 한 점은 사실이었다. 따라서 일부 중소특송업체들은 이러한 법적기준에 따라 노선화물업체를 인수하는 등 법적기준에 접근하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초창기 화물운송사업은 허가제에 의한 법적규제에 묶혀 사실상 중소업체들의 시장참여를 원천적으로 봉쇄, 결과적으로 대기업의 기득권을 보호하고 있었다.
1993년 개정된 화물운송사업법 시행규칙은 화물운송면허소유자 가운데 3년 이상의 실적이 있어야 소화물일관수송업면허를 취득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 문제는 화물운송면허제도가 허가제로 되어 있는 까닭에 사실상 중소업체들의 신규시장 참여가 막혀있는 상태였다. 이 와중에 정부는 허가제에서 등록제로의 변경을 계획하다가 정권 교체로 인해 1997년 6월로 시기를 연기했다. 이에 따라 중소업체들의 시장진입이 늦춰지게 되었고 당시 등록을 기다리던 많은 중소특송업체들은 본의 아니게 불법영업을 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1994년부터 국내 특송업의 참여자격 제한은 대폭 완화되었다. 그 전까지 특송업은 노선화물자동차 운송사업자, 일반구역화물자동차 운송사업자 및 용달화물자동차 운송사업자만 할 수 있도록 제한되어 있었다. 이를 전국화물자동차 운송사업자도 참여하여 자율경쟁을 통해 업계의 건전한 발전과 서비스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정부에서 관련규정을 정비한 것이었다. 정부는 규제 완화를 통해 대기업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 소화물일관수송 정착을 조기화하고 DHL, UPS, FEDEX, TNT 등의 글로벌 특송사에 대한 대응력 강화를 위한 조치였다고 밝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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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택배는 초창기부터 택배 대중화에 중점을 기울여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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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물일관수송 참여규제 대폭 완화
1994년 당시, 정부는 특송업 육성차원에서 1993년 11월에 영업소 의무확보수를 4개 이상에서 3개 이상으로 완화하고 일반화물 및 용달화물 자동차 운송사업자의 경우도 일정범위 안에서만 소화물일관수송사업을 할 수 있던 것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동시에 30kg 이하로 제한하던 특송서비스의 취급범위에 대한 제한도 경제행동 규제완화 대책의 일환으로 폐지됐다. 즉 중량에 관계없이 취급 가능한 소화물은 모두 허용하고 구체적인 취급범위는 사업자의 능력에 따라 결정토록 했던 것이다.
그 당시 소화물일관수송은 취급화물의 개당중량이 30kg이하로 제한되어 있어 30kg가 초과될 경우 분할을 하지 않으면 노선화물 등 다른 운송수단을 이용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1993년 중반까지 특송업은 중량의 제한으로 영업활동에 다소 제약이 따랐기에 중량제한 폐지를 당시 업체관계자들에게는 희소식이였다.
하지만 소화물일관수송 시장개방에 대해 초창기 업계의 시각은 밝지는 않았다. 1994년 당시 10여개 업체에 불과한 상황에서도 후발업체들의 요금덤핑을 하며 시장을 어지럽히고 있는데 업체수가 그보다 더 늘면 신생업체들의 시장점유를 위한 덤핑행위는 더욱 거세질 것이라는 점이 업계의 우려였다.
초창기부터 특송시장의 경쟁 열기가 가열됨에 따라 그 당시 사업의 초기단계로 운영체계의 확산과 잠재수요의 개발에 치중해오던 택배업체들은 본격적인 사업 활성화를 위한 고객 서비스 전략 마련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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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통운은 그린라운드를 반영한 기업 이미지 도색을 시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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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동. 특산물. 잡지류 등 서비스상품 특화
초창기 특송사업에 대한 업계의 경쟁이 치열해지자 특소업체들은 냉동. 냉장물특송, 특산물특송, 잡지특송 등으로 서비스상품을 특화해 나가기 시작했다. 한진택배의 경우 서비스 상품으로 당일택배서비스, 익일택배서비스, 정기노선화물택배서비스, 국제선택배서비스 등 4가지 상품을 내세웠다. 또한 냉동. 냉장물특송, 특산물. 골프. 스키특송. 의류 특송 등을 지속적으로 개발해 나가기 시작했다.
백화점 상품업체로 성장한 동서배송은 취급품목 전문화 등의 노하우를 살려 고급화물을 신속 배달하는 것으로 고객 유치를 유도해 갔다. 당시 동서배송은 국내 최초로 잡지류, 출판물 택배제를 도입해 눈길을 끌었었다. 동서일개미는 다른 업체들과 달리 오토바이를 이용한 신속배달에 주력하기도 했다.
일반구역화물 면허만을 갖고 있어 특송사업 진출에 제한을 받아오다가 화물운송시장의 사업구역 제한 폐지로 1993년 3월부터 본격적인 영업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한 대한통운은 특송사업부의 호출번호를 쉽게 기억하도록 1255(이리오오)로 정하고 전국 어디서나 주요 국번에 1255를 누르면 특송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했었다. 상품내용도 집화 후 1일내에 배달되는 특별서비스인 <원데이 특송>, 지정예약 시간 내에 배달되는 특별서비스인 <타임특송>, 국제간 소화물취급서비스인 <월드특송>, 생일, 결혼 등 각종 기념일의 선물배달서비스인 <파랑새특송> 등의 다양한 상품을 통해 특송상품 차별화를 시도했었다.
물류거점 확보 각축전
특송업에서는 운송물량의 확보가 관건이 되고 수익을 결정할 수 있는 거미줄망과 같은 많은 취급점과 함께 이를 지역별로 한꺼번에 운반할 수 있는 거점의 확보가 중요하다. 이에 따라 5대권을 중심으로 초기 택배사들은 터미널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다. 1994년부터 본격적으로 한진택배와 대한통운을 선두로 서울, 대전, 대구, 광주 등 대도시 지역에 터미널의 신축 및 집배센터와 위탁취급점의 수를 늘려나갔으며 간선 및 집배송 차량의 증차도 대폭 이루어지는 시기였다. 당시의 터미널과 배송센터 건립은 육상과 항만운송사업 개방에 대비 차원에서도 적극 추진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대외 개방에 대비한 국제특송서비스 참여경쟁도 시작되는 시기와 맞물렸다. 육. 해. 공 복합일관 서비스를 하며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자랑하던 한진택배의 경우, 미국 에어본익스프레스와 제휴, 94년 4월부터 국제상업서류 월드와이드 서비스를 실시했었다.
대한통운특송도 94년 4월 일본통운과 국제특송업무 계약을 체결, 국제특송 개발에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현상공모 통한 특송 용어 사용 눈길
당시 특송업체들의 홍보전략도 현재와 못지않게 뜨거웠다.
대한통운은 특송부분의 공식브랜드를 전국적인 공모를 통해 확정, 특송업에 대한 관심을 불러모았다. 대한통운은 이 새이름찾기 현상공모를 통해 종전까지 사용해오던 <대한통운특송>을 특송서비스 명으로 확정했다. 화물일관수송업이 참여업체마다 특송, 택배, 배송, 문전배달, 익스프레스 등 각기 다른 용어 사용으로 인해 이용에 혼란을 주던 시기여서 당시 현상공모를 통한 용어의 정립은 바람직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특히 이 특송사업의 최종 명칭 심사작업에서 우선 친근감이 있고 일본식의 표기방식이 아니어야 하며 한국인의 언어구성체계에 맞아야 한다는 점 등이 반영돼 당시 정서에 맞는 단어를 선택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 했다. 오늘날까지 가장 널리 사용되는 <택배>라는 용어는 일본식 용어라는 점에서 수정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기업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동물들의 애칭을 사용함으로써 친근감을 얻고 있는 것도 당시 홍보 전략 중의 하나였다. 소화물일관수송 사업면허 제1호로 탄생한 한진은 당초 빠른 말을 상징하는 <파발마>라는 상표를 브랜드로 사용해 왔다. 그러다가 1993년 2월부터 한진택배로 명칭을 변경했다.
금호특송은 진취적인 이미지와 미래지향적 시고를 표방하고 고객 친근감을 위한 <황금개구리>를 상품마스코트로 활용했으며 대한통운은 <캥거루>, 동서배송운수는 <일개미>, 건영화물자동차는 <부엉이> 등으로 상품마스코트로 사용했었다.
경동화물자동차와 그 계열사였던 합동운수의 경우는 여타 당시 소화물일관수송업계가 동물에서 기업이미지를 따온 것과는 달리 사람을 중시한다는 차원에서 <뉴포터>, <슈퍼맨> 으로 사용해 차별화를 시도했었다.
특송업은 일반 소비자와 직접 접촉하는 매개로서 특징을 가지고 있기에 기업이미지 제고 기회로도 초기에는 활용되었다.
1994년 대한통운특송은 운송차량이 매연 등을 내뿜는 공해 요인으로 인식되고 있는 점을 감안, 환경보호에 앞장서고 있다는 기업의 께끗하고 밝은 이미지를 고려한 도색 디자인을 시도했었다. 그린라운드에 대비해 차량청결만이 고객의 제품을 안전하게 수송할 수 있다는 신뢰감을 줄 수 있도록 차량청결운동도 동시에 추진했었다.
경동의 경우 차량을 살아 움직이는 광고탑으로의 최대 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 눈에 잘 뛰는 원색을 사용했었는데 경동화물자동차는 붉은색, 합동운수는 노란색으로 차량과 유니폼의 색상을 통일해서 눈길을 끌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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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물류(현재 현대택배)는 1994년 3월부터 충남권을 중심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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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특송업 역사 일천하고 정착 초기
90년데 중반부터 소화물일관수송업은 거대시장으로 인식되었지만 그 뿌리를 내리지는 못하고 있었다. 당시 물류시설, 장비기기, 전산 및 통신시스템 등에 대한 현대화 투자와 서비스개선 등이 부진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 제도가 대도시내 또는 지역간 화물수송의 서비스를 획기적으로 개선한다는 취지아래 개인 화물수송에 주안점을 두고 택배, 즉 문전배달서비스라는 이름 하에 서비스를 개시했던 점에 반해 초기 대부분 특송업체가 취급화물의 80~90% 정도를 기업화물에 의존하는 실정이었다. 그룹 계열사로 업체의 경우는 거의 전량을 기업화물 취급에 머무르는 경우도 많았다.
초창기 이런 현상은 소화물일관수송에 대한 소비자의 인식부족이 큰 작용을 했다. 당시 가정용 화물이 많지 않아 한 두개의 소화물을 싣기 위해 배차하기 어려웠고 이에 따라 물량이 많고 수송이 편리한 기업화물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고 당시 업계 관계자들은 밝혔었다.
여타 기업들도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기업화물에 의한 시장 저변확대에 힘을 쏟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편으론 그 당시 특송업체들이 개방화에 대비해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홍보전략을 강화하기는 했지만 그 때까지만 특송업계 대부분이 사업 초기단계였다. 따라서 업체들이 광고하는 것 만큼이나 완벽한 서비스 조건을 갖추지 못했던 실정이었다. 게다가 운송물량 확보와 거점확보를 위해 취급점과 터미널 설립을 늘려나가기는 했지만 부지마련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물류자동화 설비도 완벽히 갖추지는 못한 상황이었다.
초기 특송시장이 발전하기에는 외부적으로 여러 가지 제약요건이 산재해 있었다.
우선 당시 사회간접자본(SOC)이 부족하여 교통체증 등 애로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 규제완화를 했다고는 하나 법적규제와 절차의 까다로움 등으로 인해 창고, 배송망, 터미널 등 부지확보에 어려움이 따르는 실정이었다.
또한 오늘날까지 제약요건으로 작용하는 집배차 연계운송의 어려움, 공차율 문제, 도로교통상의 제약, 주정차 제한 등의 문제점들도 가로막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업계에서는 참여업체가 자유롭게 영업할 수 있도록 소화물일관수송 배송차량을 긴급수송차량으로 지정, 통행제한과 주정차 단속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주요 대도시 상시 집배차량 증차가능, 혼적수송 취급제한 등의 제도적 지원체제 마련 등을 강조했었다.
<윤훈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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