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3-22 08:54

1996년 해사채권 책임제한 협약 올 5월 발효

인적손해 4배, 물적손해 2.5배 선사 책임 증액


런던에 본부를 두고 있는 유엔 전문기구인 국제해사기구(IMO)는 최근 몰타가 지난 2월 12일 해사채권 책임제한협약(이하 ‘1996년 개정의정서’)을 비준함에 따라 이 협약이 5월 13일부터 발효된다고 밝혔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은 이 협약이 선사의 손해배상책임을 대폭강화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기 때문에 선사의 피해배상책임이 크게 강화된다고 전했다.
IMO는 1996년 5월에 ‘1976년 해사채권 책임제한협약(이하 ‘1976년 협약’)의 내용을 크게 수정한 개정의정서를 채택한 바 있다. 이 협약은 IMO 회원국 10개국이 가입한 날로부터 90일이 경과하면 발효하는 것으로 돼 있으며, 몰타가 발효요건을 충족시키는 마지막 10번째 비준국이 됐다. 몰타 이외에 이 협약에 가입한 국가는 호주, 핀란드, 노르웨이, 러시아, 시에라리온, 통가, 영국, 덴마크, 독일 등이다.
1996년 개정의정서는 현재 국제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1976년 협약에 비해 인적 손해의 경우는 4배, 물적 손해는 2.5배 정도 선사의 책임을 증액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IMO는 이 협약을 제정하면서 선박톤수(G/T)가 2천톤 이하인 선박에 대해서는 선사의 손해배상 책임한도액을 종전보다 최고 6배 이상 인상했다. 이 때문에 이 협약이 발효되는 경우 해난사고로 인한 피해보상액이 현실화돼 피해자 보호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이는 반면 선사를 포함한 관련업계의 처지에서는 책임한도액이 확대돼 부담이 될 것이라는 지적이 그 동안 제기돼 왔다.
더욱이 1986년에 발효된 1976년 협약이 아직까지 선사의 책임을 규율하는 일반적인 손해배상체제로 자리 잡고 있는 가운데, 새로운 협약이 발효됨에 따라 이 협약의 가입을 주저하던 국가들의 입장 변경이 불가피해졌다. 30여년 전에 제정된 협약을 버리고 새로운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압력이 그만큼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1996년 개정의정서가 제정된 전후에 해양오염사고 등에 대한 선사의 책임을 대폭 강화하는 선박 연료유 손해배상책임협약이나 유류오염손해배상 보충기금협약, 유해·위험물질 해상운송책임협약(이하 HNS협약) 등이 잇달아 채택된 것도 IMO 회원국들이 새로운 협약의 비준을 서두르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판단된다.

선사의 배상책임 2배 이상 인상

일반적으로 선박을 이용해 해상으로 사람이나 화물을 운송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손해배상 청구사건을 처리하는 제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져 있다. 선박이 부담하는 책임을 하나로 보고 이 기준에 따라 책임을 제한할 수 있는 총체적 책임제한제도(global limitation scheme)와 선박에 적재돼 있는 화물 하나하나에 대해 책임을 부담하는 개별적 책임제한제도(package limitation scheme)가 그것이다. 이 같은 책임제한제도를 선사의 이중적 책임제한제도(dual liability system)라고 하는데, 선박의 사고 등으로 화물에 손해가 발생한 경우 그 배상액이 소액인 때에는 개별적 책임제한권을 행사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총체적 책임제한제도를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번에 발효되는 1996년 개정의정서는 선사의 총체적 책임 한도를 규정하는 협약으로 1924년에 처음으로 제정됐다. 이 협약은 1957년과 1976년에 각각 1차례씩 개정됐다가 1996년 개정의정서 형태로 다시 개정됐다.
지금까지의 이 같은 협약 개정은 모두 선사의 책임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다. 1996년 개정의정서 역시 1976년 협약이 제정된 이후 20여년간의 인플레이션을 반영하고 선사의 책임한도액을 높여 해난사고 피해자에 대한 피해배상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개정된 것이다.

여객에 대한 배상책임 크게 강화

특히 1996년 개정의정서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여객선 승객의 인적 책임한도가 크게 인상되고 소형 선박 소유자의 책임을 대폭 확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1976년 협약에서 여객선 운항사업자는 해난사고가 발생하는 경우 손해에 대한 배상은 여객선 정원에 46,666계산단위(SDR : 7,800만원)를 곱한 금액으로 제한하되, 총액이 2,500만계산단위(420억)를 넘지 않도록 했다. 그러나 1996년 개정의정서에서는 여객선 1인당 책임한도액을 17만 5천계산단위(2억 9,400만원)로 4배 정도 인상했다. 또 선박사고당 최고 2,500만계산단위 범위 내에서 배상하도록 돼 있는 포괄적인 책임한도제도를 폐지했다. 이 같은 조치는 1인당 책임한도액 지급규정에도 불구하고 여객이 많은 선박에 승선하고 있다가 사고를 입은 경우 피해자에 대한 실질적인 배상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선사가 2,500만계산단위로 자신들의 책임을 제한하게 되면 총액 제한에 걸려 사고를 입은 피해자가 뜻하지 않게 배상받을 수 있는 금액이 줄어 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여객선사의 포괄적 책임제한제도를 폐지한 것은 여객선의 대형화되는 추세에 따라 손해배상을 현실화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 규정과 동일한 책임한도를 규정하고 있는 ‘여객 및 수하물운송에 관한 아테네협약’의 1990년 개정의정서의 경우도 여객선사의 포괄적 책임제한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한 1996년 개정의정서는 여객에 대한 피해배상을 강화하기 위해 자국의 국내법에 규정된 금액이 협약의 배상액보다 더 많은 경우, 협약을 적용하지 않고 자국법을 적용할 수 있도록 하는 협약 유보조항을 신설하고 있다.
한편 1996년 개정의정서는 지금까지 500GT로 돼 있는 협약의 최저 적용선박의 범위를 2천톤으로 확대하고 손해배상 책임한도액을 대폭 인상했다. 이 같은 규정은 HNS 협약에 명시된 최저적용선박톤수(2천GT)와 통일을 기하는 한편 소형선사의 책임을 대폭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유럽국가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결과다. 이에 따라 2천톤 이하의 소형선박을 운항하는 선사의 경우 당해선박에 타고 있던 사람(여객이 아닌 경우)이 손해를 입은 때에는 200만계산단위(37억원)까지 손해를 배상해야한다. 이는 종전보다 6배 정도 늘어난 금액으로 1996년 개정의정서의 경우 소형선사의 책임이 더욱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밖에도 이 협약은 선박의 크기에 따라 여객이나 사람이 아닌 화물 등 물적 손해에 대한 책임한도액도 크게 인상했다. 예컨대 2천톤까지의 선박에 대해서는 100만계산단위의 범위에서 손해배상책임을 부담하도록 하되, 이 보다 큰 배에 대해서는 초과하면 선박의 톤수에 일정한 금액을 곱해 얻은 금액 내에서 배상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이 같은 금액 역시 1976년 보다 2배 정도 오른 것이다.

선사에 부담, 당장 가입은 곤란

1996년 개정의정서에서 해난사고로 인한 선사의 손해배상 책임한도액을 높인 것은 피해자 구제 측면에서 바람직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976년 협약 개정 이후 20여년 간의 물가상승률(200%)을 반영한 적절한 인상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 협약이 여객선 피해자에 대한 선사의 책임을 강화하고 향후 책임한도액의 인상을 용이하게 하는 절차규정을 둔 것 등은 경제적 약자인 선박 이용자를 특별히 배려한 것이라는 평가다. 그러나 이 같은 긍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이 협약의 발효와 관련해 가장 큰 이해당사자인 선사의 입장에서는 이행에 적지 않은 부담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선사의 손해배상 책임한도액이 높아지면 보험료 등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까닭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상법에 1976년 협약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협약을 비준해야하는 처지에 있으나 그 시기를 결정하는게 쉽지 않다. 1991년 상법을 개정할 당시 1976년 협약의 수용 여부를 놓고 선사와 하주 간에 상당한 의견대립을 보였기 때문이다. 당시 이 같은 대립을 치유하는 방안으로 개정조문에 대한 시행시기를 2년간 유예하기도 했다.
따라서 지금 당장 1996년 개정의정서를 수용할 경우 이 같은 혼란이 그대로 재연될 가능성이 높다. 또 신협약이 발효되기는 했으나 가입국이 이제 10개국에 불과하므로 보편적인 국제협약으로 자리잡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 따라서 이 협약 가입에 따른 구체적인 실익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상태에서 비준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판단이다.
다만, 이 협약에서 정하고 있는 여객선 피해배상제도는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도입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현재 7,800만원에 불과한 여객선 사고 피해자에 대한 책임한도액이 현실적으로 너무 낮은 금액일 뿐만 아니라 도로 및 항공 등 다른 교통수단의 손해배상제도와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현행 상법 제746조 제1항 1호를 “여객의 사망 또는 신체의 상해로 인한 손해에 관한 채권에 대한 책임의 한도액은 여객 1인당 17만 5천계산단위로 한다”로 개정하는 경우 1996년 개정의정서의 내용 일부를 국내상법에 도입하는 것이 되고, 피해자 구제에도 크게 기여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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