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8-02 14:37

광활한 대륙의 꿈, 그 웅자를 드러내다

시베리아횡단철도(TSR)와 한반도종단철도(TKR), 이 말만으로도 우리는 꿈에 부풀기에 충분하다. 경제 분석자들이 예상하는 경제적 효율성이야 어찌됐건 간에 TSR과 TKR이 동시에 실현되는 그 순간에 우리는 한반도 분단 양국의 통일이라는 대업(?)에 더욱 가까워지기 때문이다.그리고 이를 달성시키기 위한 단계적인 노력들이 최근 가시화 단계에서 실행까지 이어지고 있어 더욱 반가울 따름이다. 지난 7월 16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부터 시작된 17박 18일간의 ‘한-러 친선특급’ 행사가 바로 그 것. 블라디보스토크는 TSR의 출발지로서 동시에 한국과 러시아간 경제협력 방안의 시작점으로서의 의미도 함께 지닌다.
특히 이번 행사는 한국과 러시아 양국의 국회, 정부인사와 기업인, 문화계인사, 대학생 일반인 등 250여명이 참여해 총 연장 9천300㎞의 여정을 함께 했다.
또한 블라디보스토크를 기점으로 하바로프스크, 이르쿠츠크, 노보시비르스크, 예카테린부르크, 모스크바, 상트페르부르크 등 7개 주요 도시를 거치면서 다양한 행사들이 마련됐다.
한편 철도청은 이 행사에 철도전문가 9명을 파견, TSR 현황 파악은 물론 한국철도 장비의 우수성을 알리는 데도 관심을 쏟았다. 또한 철도청 관계자는 “이번 행사 참가로 TSR 전구간 기술 및 운영 현황의 실제 탑승 조사를 통해 향후 TKR-TSR 직통운행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 블라디보스토크 - 총 연장 9천300㎞ 여정의 출발

한국과 러시아간 사상 첫 철도 외교 사업으로 불리는 ‘한-러 친선특급’ 열차가 지난 7월 16일 극동의 군항 블라디보스토크시 청사에서 열린 개막식과 함께 17박 18일의 대장정에 올랐다. 이날 현지에서는 과거 일제시대 연해주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던 ‘신한천’에서 민주당 설훈, 김경천, 정범구 의원과 김항경 외교부 차관 등 국회와 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 추모행사와 러시아 현지인의 사물놀이 등이 함께 진행됐다.
개막식에 이어 250여명에 이르는 한국과 러시아 양국의 정부 및 민간 참가자들은 저마다 설레는 맘으로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친선특급 열차에 올랐다. 시베리아 횡단철도(TSR)는 러시아 수도인 모스크바와 극동의 군항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 세계 최장의 철도로, 블라디보스토크가 종착역이지만 이번 행사에선 출발역이 됐다. 행사 참가자들을 위해 러시아 측은 친선특급 열차를 특별차량으로 편성, 모스크바에서 빈 차로 10일 가량 블라디보스토크로 달려왔다.
TSR는 지난해 8월 김정일 북한 국방 위원장의 러시아 방문 당시 전구간을 타면서 더욱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우리 정부는 시베리아의 무한한 자원과 개발 잠재성에 주목, 북-러 정상회담 이후 TSR과 TKR을 연결시키는 사업에 주력해왔다. 러시아를 제외하고 TSR 화물 이용량은 한국이 재작년 3만톤을 기록, 기존 최대 이용국이던 일본을 제치고 수위에 올라섰다. 전문가들은 철도 연결사업이 이뤄지면 러시아와 유럽으로 향하는 물류비용이 절반 이상 줄어든다고 전망한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경제적 이익뿐만 아니라 TSR의 연결은 한반도가 동북아시아 물류 중심지로 부상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TSR 연결사업이 순탄치 만은 않다. 러시아 내부에서도 주마다 각기 이해관계가 엇갈리고 있고 남북한 관계도 여전히 중요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학으로 유명한 극동대 한국학부 부학장 알렉세이 스타리히코프씨는 유창한 한국말로 “철로연결로 인해 해상무역이 침체될 것이란 우려가 있는 게 사실이고 경제적 이해 득실을 감안해 신중히 추진돼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국경제를 전공한 알렉세이 씨는 “러시아가 최근 북한에서 철도 연결을 위한 세 차례 기초조사를 한만큼 1~2년 정도 추진경과를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연해주 주지사인 이바노프씨는 “일부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건 맞지만 사소한 문제”라고 전제, “연결사업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해상무역 침체에 따른 손실보다 훨씬 더 비중이 크다”고 잘라 말했다.
친선특급 출발지가 된 블라디보스토크는 연해주의 주도로서 우리 정부가 시베리아 개발 전초지로 삼고 있는 거점도시다. 연해주는 구한말부터 고려인들이 진출, 신한촌을 구성해 살아온 곳으로 정서상 매우 친근한 지역이다. 현재 연해주에는 현대와 LG를 비롯, 55개 우리 기업이 봉제와 기계류 부문 등에 진출해 있다. 교역면에서 우리나라는 10억달러 규모의 연해주 전체 교역물량 중 20% 가량을 차지하는 가장 큰 교역 파트너다. 건물이 대체로 낡고 다소 어두운 분위기의 블라디보스토크 군항 중심가에는 계동 사옥모양을 본뜬 최신식 현대호텔이 우뚝 서 있다. 현대의 비즈니스센터 사업은 연해주가 가장 관심을 가진 프로젝트로 꼽힌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 중인 기업 중 사기업과 외국 합작기업의 비중은 이미 75%에 달한다는 게 현지 관계자의 설명이다. 순수 국영기업 비중은 극히 미미한 실정이다. 연해주 지사인 세르게이 다르킨 씨는 친선특급 행사를 축하하는 자리에 참석해 “연해주는 한국과 가장 친근한 곳으로 한국기업 유치를 위해 제도적 특혜장치를 마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러시아내 가장 젊고 주목받는 정치 지도자로 꼽히는 세르게이씨는 이번 행사가 철도연결 사업의 성사에도 큰 전기가 기대한다”는 희망을 밝혔다.
● 하바로프스크 - 러시아 극동 경제·군사수도

한·러 친선특급 참가자들은 17일 오전7시(현지시각) 출발역인 블라디보스토크역을 떠나 12시간을 꼬박 달려 하바로프스크에 도착했다. 열차가 도착하자 하바로프스크주 이사예프 주지사를 비롯한 주정부 인사들과 철도부 공무원들이 군악대의 축하 연주속에 꽃다발과 리본을 건네며 친선특급 참가자들을 따뜻하게 맞아 줬다. 이사예프 주지사는 시베리아횡단철도(TSR)와 한반도종단철도(TKR) 연결사업에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해온 러시아 정부내 대표적인 인사로 꼽혀 왔지만 이날 이례적으로 특급열차 승객들을 환대해 줬다. 이사예프씨는 현지 행사에 참가한 기자들과 만나서도 “TSR-TKR 연결사업이 성공적으로 추진될 것으로 믿고 있다"는 예상 밖의 인사말을 건네기도 했다.
김덕수 사물놀이패는 이날도 시내 문화관에서 현지 관객들 앞에서 또 한번 신들린 연주를 펼쳤고 ‘봄날은 간다’, ‘엽기적인 그녀’ 등 한국 영화가 러시아 극동 지역의 동포들과 현지인들에게 선보였다.
일반 참가자들은 간단한 아침식사를 마친 뒤 시내 ‘영광의 광장’을 먼저 찾았다. 영광의 광장은 2차대전 당시 이 지역출신 전몰용사의 넋을 기리기 위한 대형 추모비가 세워진 곳으로 전몰자 4만명의 이름이 빼곡이 새겨져 있다.
TSR 연결사업 과정에서는 러시아 정부 일각의 반대 움직임도 문제지만 기술적인 문제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러시아 철도가 철로간의 폭이 큰 광궤인데 비해 한국과 서부 유럽 등은 통상 중간 길이에 속하는 표준궤를 택하고 있기 때문에 두 철로를 연결시키려면 승객, 화물칸을 해당 지점에서 옮겨 실은 뒤 운행하는 방법 등을 강구해야 한다.
러시아나 북한의 철도가 매우 낙후돼 있다는 점도 난제 중 하나다. 이번 친선특급에 동승한 철도기술연구원 전문가들은 러시아 철도가 100년 이상 역사를 갖고 있지만 현대화 보수작업이 거의 이뤄지지 못한 채 운행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100년 전 철로 건설 당시부터 러시아 철로 연결부분의 이음새는 제대로 용접이 되지 못한 상태였다. TSR의 흔들림이 점차 심해지는 원인중 하나는 용접 미비 때문이라는 것.
그러나 TSR은 건설 당시부터 지반이 매우 굳고 튼튼한 편이라 철도역사에 비해 철도의 하중에 못 이겨 크게 손상되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평가했다. 철도기술연구원 관계자는 “TSR 연결 사업의 전제로서 러시아측의 철도 현대화 작업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진행될 지가 큰 과제로 떠올랐다”고 말했다.
하바로프스크 주정부 투자담당 관계자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서부 러시아에 비해 너무 낙후된 극동지역에 대한 외자유치가 매우 절실하다”며 “이 지역 투자 개발의 성공여부를 좌우할 물류 인프라 확보 차원에서 TSR-TKR 연결 및 선진화 작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 이르쿠츠크 - 시베리아 ‘자원의 보고’

한국과 러시아간 첫 철도외교 행사인 `한러 친선특급' 열차는 17일 밤 하바로프스크를 떠나 꼬박 60여시간을 달려 20일 오전(현지시각) 세번째 방문지인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친선특급 일반 참가자들은 사흘 내내 열차를 타고 달리는 일이 생경한 일이고 다소 피곤해 하기도 했지만 러시아 측에서는 한국인 전용열차가 된 친선특급 손님들에게 상당한 서비스를 제공한 흔적이 곳곳에 엿보인다.
한국인의 입맛을 배려한 음식을 내놓았고 60개에 이르는 임시 정차역중 절반 이상을 서지 않고 내리 달렸으며 평소의 TSR(시베리아횡단철도)과는 달리 매우 청결한 실내를 유지하려 애썼다. TSR을 수차례 이용해 본 경험이 있다는 우리 철도연구원 한 관계자는 “러시아 측이 많은 부분을 배려해 정말 특별한 열차가 된 것 같다”면서 “이번 열차가 평소의 TSR 열차라고 착각하면 낭패를 부를 수 있다”고 조언했다.
총연장 9천300㎞에 이르는 TSR 중간 지점에 위치한 이르쿠츠크는 세계 최대의 바이칼 호수를 가진 시베리아 천연자원의 보고로 불린다. 이르쿠츠크 친선특급 행사 일정 중 우리 정부와 기업들이 큰 관심을 갖고 있는 TSR 연결사업은 물론 이르쿠츠크 가스전 개발 사업에 대한 협상 문제가 화두로 떠올랐다. 친선특급에 참가한 우리 정부 측 인사들은 가보린 이르쿠츠크 주지사와 고려인 출신으로 루시아 석유회사 사장에 오른 발레리 박씨 등 주요 인사들과 연쇄 회동을 가지며 양자간 경협 문제를 집중 논의했다.
가보린 이르쿠츠크 주지사는 기자들과 만나 “철도연결 사업이나 가스전 개발 문제는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 보다 심도 있고 실질적인 협의가 진행 중이고 모두가 성공적으로 이뤄지길 바란다”며 사업 성공을 기원했다.
양국 관계자들에 따르면 TSR 철도 연결 사업의 경우 대체로 남북한 관계 정상화를 전제로 조만간 가시적인 성과를 거둘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나 가스전 사업의 경우 전문가마다 상당한 시각차를 노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려인 출신 첫 러시아연방 하원의원인 유리텐씨는 철도연결 사업과 관련, “러시아가 20억달러 상당의 차관 등을 도입해 북한 철도의 현대화 작업을 벌일 계획을 갖고 있다”며 철도연결 사업의 구체적인 플랜까지 제시, 눈길을 끌었다. 유리텐씨는 “이르쿠츠크는 1년내 새로운 수력발전소도 가동할 예정이며 북한에 전력을 곧 수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반면 이르쿠츠크 가스전 개발사업은 관련 당사국인 한국과 러시아, 중국 등 3국의 협상이 아직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고 있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친선특급 열차에 동승한 김명규 가스공사 사장은 루시아 석유회사 발레리 박씨와 면담을 가진뒤 “파이프라인 건설 추진 과정에서 북한이 아직도 타당성 조사 문제와 관련한 명확한 입장 표명이 없어 답보 상태”라고 털어놨다. 김 사장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올 연말까지 타당성 조사 여부에 대한 북한 측의 답변이 없으면 파이프라인의 북한 통과 문제를 논외로 하고 북한과의 협상이 완전 결렬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북한측이 성의 있는 태도를 보이지 않으면 협상 파트너로서 자격을 잃게 될 가능성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 해석돼 주목된다.
발레리 박씨는 “파이프라인 통과 문제나 가스전 가격 협상 문제 등은 구체적으로 언급하기 어렵다'며 '다만 남북한 관계가 보다 원만해져서 협상 과정도 원만히 됐으면 한다”고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가스전 사업을 직접 맡고 있는 러시아 현지 루시아 석유회사 홍보임원인 블라디미르 샬라예프씨는 현지서 기자들과 만나 “파이프라인의 북한 통과 문제는 러시아 정부나 회사 측이 처음부터 고려했던 문제가 아니다”며 우리 측과 많은 시각차를 내보였다. 샬라예프씨는 “가스전 사업은 러시아와 중국이 우선 협상을 벌여 가격 등 민감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전제, “한국은 러시아와 중국이 협상을 벌이는 과정에서 뒤늦게 소비자로서 참여한 것이며 북한은 이미 고려 대상도 아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현지 전문가들은 루시아 석유회사 신임 사장에 지난 6월 고려인 출신 박씨가 임명되는 등 일련의 움직임이 남북한간에 놓인 걸림돌을 조속히 해결해 보자는 러시아 정부 측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 노보시비르스크 - 시베리아 첨단기술 거점

사상 첫 철도외교 행사인 ‘한러 친선특급’ 열차가 23일 오전(현지시각) 도착한 네 번째 방문지인 노보시비르스크는 서부 시베리아 교통의 거점이자 첨단기술의 요람으로 불린다. 인구 150만명에 한국의 대덕단지와 흡사한 첨단 기술단지인 ‘아카뎀고로독’이 위치, 러시아에서는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이은 제3의 도시로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아카뎀고로독은 유기화학과 미생물 분야, 영상/방송 분야, 광속추진 기술, 특수 금속 제조기술, 물리학 등 첨단 분야에 두각을 나타내고 있으며 한국내 유수의 대학들과 공동연구 과제를 수행하고 있다고 주정부측은 소개했다. 친선특급 열차가 거쳐 온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로프스크, 이르쿠츠크 등 동부 시베리아의 3대 도시와는 시내 전경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사방으로 쭉 뻗은 간선도로를 중심으로 건물 대부분이 정방형으로 반듯하게 단장했으며 개발이 본격화된 한국의 80년대 주요 도시의 모습을 상상하면 될 것이라고 현지 가이드는 전했다.
도심에서는 그간 방문했던 도시들과 달리 교통체증을 쉽게 경험하게 된다. 러시아워가 아닌데도 중심가 교차로에는 사방으로 신호를 기다리는 차량들이 길게 늘어서 있고 시민들의 발걸음도 분주하다. 젊은 아가씨들은 물론 중년 여인네들의 옷차림이 그다지 야하지 않은 것도 차별된다. 수수한 티셔츠와 바지 차림 등 차림세로 보아 평범하게 일하는 도시민들일 뿐이다.
신흥 공업, 기술도시로 성장하는 데는 러시아 철도교통의 중추로서의 기능이 크게 뒷받침하고 있다. 몽골과 중국, 카자흐스탄 등지로의 철도 연결로가 한데 모이는 ‘사통팔달’ 도시로 통한다. 서부 시베리아 지역을 총괄하는 지방 철도청과 러시아 철도기술의 산 역사인 철도대학이 시내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다.
알렉산드로 첼코 서부시베리아 철도청장은 연방 철도부 차관시절 TSR-TKR 연결 사업에 대한 아이디어를 스스로 창출, 적극 추진해 온 러시아내 철도 전문 관료다. 첼코 철도청장은 TSR 연결사업과 관련, “러시아와 남북한 정부 차원의 정치적 결단만이 남아 있다. 기술적 검토는 사소한 문제점만 보완하면 된다”고 힘줘 말했다.
주정부 관계자들은 이날 특히 TSR 연결 사업과 관련한 지역경제 설명회에서 서울-평양-핫산(러시아)-블라디보스토크로 이어지는 루트와 서울-평양-신의주-하얼빈(중국)-치타(러시아)로 이어지는 루트 등 경제성이 높은 2가지 철도 연결 루트를 제시했다. 러시아 주정부의 이 같은 복안은 북한측이 연결루트로 우선 제시하고 있는 포항 강릉-원산-핫산 등 동해선 연결 노선과는 확연히 차이난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친선특급 행사의 일환으로 시내 중심가에 있는 엑스포 센터에서는 시베리아 지역 사상 첫 한국상품전시회가 열렸다. 2천여평 규모 전시장에는 현대의 자동차와 삼성의 첨단 전자제품을 비롯, 40여개 한국 중소기업들이 식음료, 포장기계, 휴대폰, 의류, 특수금속 등 부문의 자사 상품을 내걸고 사흘간 일정으로 서부 시베리아 시장진출을 꾀했다. 전시회에 참가한 동방자동포장기계 김광덕 대표는 “시베리아 도시들은 생소한 시장이어서 뭐라 전망하긴 힘들지만 이곳이 채소나 생선 등 식품의 수요가 큰 만큼 포장수요에 대한 기대를 안고 찾아오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베리아는 여전히 우리에겐 처녀 시장이다. 노보시비르스크주의 경우 한국과의 교역량이 지난해 700만 달러에 불과, 매우 미미한 실정이다. 700만달러 중 우리 수출이 140만 달러, 수입이 560만 덜러 수준이다. 빅토르 톨로콘스키 주지사는 이날 상품전시회 개막식에 참가, 테이프커팅을 마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현재 교역량에 비춰보면 양자간에는 무역이라고 할만한 수준도 못된다‘고 솔직히 토로했다.
빅토르 주지사는 이어 “한국의 자동차와 가전제품 등 상품에 대한 이미지가 워낙 좋기 때문에 이번 전시회가 향후 교역에 큰 전기가 될 것이며 한국 기업들이 자본과 의지가 있다면 러시아 정부는 그만한 지원을 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 에카테린부르크 - 아시아와 유럽의 접점

한국과 러시아간 철도외교 행사인 ‘한러 친선특급’ 참가자들은 시발역인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지 꼭 열흘만인 7월 25일 오전(현지시각) 서부시베리아 우랄산맥에 위치한 공업도시 에카테린부르크에 도착했다.
우랄산맥 동서 경계 지점에 위치한 에카테린부르크는 아시아와 유럽을 구분짓는 경계 도시이고 이를 상징하는 경계석이 도심 서쪽 방면 40㎞ 지점 우랄산맥 고갯길에 우뚝 서있다. 러시아의 중심부로서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철도와 항공 교통의 중추 기능을 맡고 있으며 시베리아횡단철도(TSR)가 지나는 아시아 지역의 마지막 도시다.
서부시베리아로 향하는 한러 친선열차 식당차 한쪽에서는 매일같이 일반 승객들을 대상으로 한 ‘TSR 특강’이 펼쳐졌다. 철도 전문 교수와 철도기술연구원, 교통개발연구원 등 전문 연구진들은 TSR의 연결 가능성과 필요성 내지 기존의 문제점 등을 상세히 지적해 가며 일반 탑승객들의 이해를 도왔다. 전문가들은 운행된 지 100년 이상을 넘고 있는 TSR이 점차 노후화되고 있고 조속한 시일내에 보수 작업이 필요하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1만㎞ 가까운 광활한 대지를 지나는 TSR의 선로와 전선, 전신주, 노반 등 제반 설비를 단시일 내 보수한다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긴 하지만 보수 점검이 한번도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구간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통상 철도 선로 침목 사이에 깔아두는 자갈 등이 TSR의 경우 많지 않아 선로가 열차의 하중을 어떻게 오랜 생활동안 견뎌 왔을지 걱정하는 지적도 나온다. 또 우리 정부나 학계는 그동안 TSR 연결사업의 기술적 타당성을 가늠하기 위한 현지 조사를 한번도 실시한 적이 없다. 철도연구원의 한 간부는 “우리가 지금 TSR 열차를 타고 가고 있지만 TSR의 실상에 대해 우리가 아는 정보는 거의 없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며 “TSR 연결사업에 앞서 기술적 문제점과 실태를 먼저 파악하는 게 순서일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 정부측은 그동안 TSR의 정시성과 안정성 등 문제에 대해 과거 통계 자료만을 인용, ‘전혀 문제없다’고 주장해 온 게 사실이다.
주정부는 이날 에카테린부르크를 방문한 친선특급 참가자들을 상대로 한 지역경제 설명회에서 에카테린부르크가 주도인 스베르들로프스크주의 무역 규모는 재작년 기준 26억4천만 달러이고 이중 수출이 21억4천690만 달러, 수입 5억90만 달러를 집계됐다고 밝혔다.
주요 교역 상대국은 미국과 네덜란드, 독일, 영국,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 등으로 우리나라와는 교류실적이 수백만달러 수준에 머무는 등 극히 미미한 실정이다. 에카테린부르크는 2차 대전당시 군수 공장이 밀집, 도시 경제의 80% 이상을 군수산업에 의존해 오다 최근에는 지하자원 개발과 더불어 금속ㆍ기계ㆍ섬유ㆍ식품 등 부문에서 활발한 외자 유치를 유도하고 있다.
주정부와 한국무역협회 등 주선으로 이뤄진 기업인 상담회에서는 국내 중소 식품 회사 등 40여개 업체가 참여, 교역 가능성을 타진했다. 지역경제설명회에 참석한 한국무역협회 한 관계자는 “올해는 교역 규모를 예년의 10배 이상으로 늘릴 계획”이라면서도 “주정부측이 외국 기업의 투자가 제대로 이뤄지도록 제도적 규제 장치를 많이 풀어야 할 때”라고 주문했다.
● 모스크바 - 크렘린궁 환영행사

‘한러 친선특급’ 참가자들은 7월 27일 오후(한국 시각) 시베리아횡단철도(TSR) 종착역인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 입성, 러시아 측의 환대를 받았다. 러시아 정부와 한러 친선협회측은 이날 저녁 친선특급 열차 승객 250여명 전원을 러시아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가 있는 크렘린 궁으로 초대, 만찬을 베풀었다.
일부 외국 귀빈 방문 때를 제외하고 외국 일반 친선 사절단을 대거 크렘린 궁으로 초대하는 경우는 극히 이례적이며, 우리 정부 인사와 민간 친선사절단으로선 사상 첫 크렘린 궁내행사가 됐다고 주러시아 대사관 관계자는 전했다. 러시아측은 크렘린궁 인민극장에서 친선특급 참가자들을 불러 약 2시간동안 크렘린 전속 관현악단과 성악가들의 연주와 노래를 선사했고, 우리 정부측은 김덕수사물놀이패의 신들린 듯한 공연으로 화답했다.
인민극장은 구소련 당시 전국 인민대의원 회의장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대통령 집무실과 약 200m 정도 떨어져 있고 인민 대의원 숫자만큼 좌석이 마련돼 있으며 지금은 러시아측이 일반 시민들에게 극장으로 개방하고 있다.
로시닌 러시아 외무1차관은 “크렘린에서 이렇게 많은 외국 손님들을 한번에 불러 만찬행사를 갖는 것은 처음인 것 같다”며 “TSR을 따라 먼 길을 온 한국측 인사들을 환영한다”고 인사를 건넸다. 로시닌 차관은 특히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만찬 행사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한러 친선특급 참가자들에 대한 ‘환영 메시지’를 전달해 왔다며 이를 대독했다.
푸틴 대통령은 “한러 양국의 정치인과 일반인 등이 참가한 친선특급 행사는 TSR의 연결사업이 조기에 완성되길 바라는 희망이 담겨 있으며 유라시아의 경제통합과 아시아의 정치적 평화에 기여할 것”이라는 환영 메시지를 전했다.
이날 오전에는 한러 친선특급 인솔단장인 이재춘 전 주러시아 대사 등 우리 정부 인사들이 모스크바 시청사에서 산체프 부시장 등 시 간부들을 면담했다.
양측 인사들은 주러시아 한국대사관 건물의 신축과 대사관저 부지선정 문제를 조기 매듭짓고 한국 기업들의 모스크바에 대한 투자를 활성화하는데 적극 협력키로 합의했다.
산체프 부시장은 “한국기업인 롯데가 모스크바 시내에 백화점과 호텔 등 기능을 갖춘 복합건물을 신축하는 사업을 이달 중 착수할 예정인 것으로 안다”며 “3억달러 규모의 외자유치 효과를 거둘 것”이라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양측 인사들은 또 내년부터 서울에서는 ‘모스크바의 날’, 모스크바에서는 ‘서울의 날’을 각각 지정, 시장들이 상대국을 직접 방문해 기념행사를 갖는 프로그램을 마련키로 했다.
● 상트페테르부르크 - 이범진전공사 추모식

`한러 친선특급' 마지막 방문지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선 초대 러시아 공사를 지내다 한일합방 직후 자결한 이범진 전공사에 대한 추모 행사가 30일 오전(현지시각) 열렸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내년으로 도시 건립 300주년을 맞게 되는 러시아 최고의 문화 도시로 불리며 현재 300주년 기념 행사를 위해 도로와 주요 건물, 유적지 등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진행중이다. 이 전 공사의 항일 투쟁과 관련한 업적과 생애에 대해선 그동안 학계 등에서도 주목을 받지 못해 왔으나 90년 한러 수교이후 활발한 자료 발굴과 교류 등을 통해 조금씩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
야코블레프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지사는 이날 한러친선특급 취재차 주정부 청사를 들른 한국 기자들과 만나 “러시아가 가진 관련 자료는 가능한 한 모두 공개하고 발굴해 한러 친선 역사의 실체를 밝히는데 협조하겠다"고 말했다.
이 전 공사는 조선조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의 17대 손으로 1852년 서울의 낙동(지금의 명동)에서 태어났다. 올해가 탄생 15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다. 1879년(고종 16년)에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내무부사 등을 지냈고 명성황후가 친러 정책을 표방하자 대신서리로 임명받아 친러 활동에 매진했다.
이날 오전9시(현지시각) 상트페테르부르크 우스펜스키(북부 공동묘지) 묘역에서 거행된 추모비 제막식과 집무실 현판식에는 러시아에 거주중인 이 전 공사의 증손녀 루드밀라 예피모바씨와 루드밀라의 딸 율리야씨,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이 전 공사의 증손자 이원갑씨가 함께 손을 맞잡고 참석했다.
현재 이 전 공사가 묻힌 대충의 묘역만 추정될 뿐 정확한 묘지 위치나 유해 안장 여부 등은 확인되지 못한 상태다. 묘역만을 확인한 것도 매우 극적이고 다행스런 일이었다.
이 전 공사의 묘역 찾기 작업은 재작년 이후 주러시아 대사관을 중심으로 특별전담팀이 구성돼 본격화된 뒤 별다른 진전이 없다가 작년 6월 발생한 러시아 유학생 이모씨(여)의 피살 사건이 우연한 계기가 됐다. 이씨의 사체를 옮기기 위해 관을 마련하러 장의사를 찾았다가 이 전 공사의 장례기록을 발견한 것이다. `범진 LEE'라는 이름의 인사가 당시 루터교 신도들이 묻히는 우스펜스키(북부공동묘지) 묘역에 안장됐다는 내용이 장례 목판에 새겨져 있었다. 묘지번호는 378번. 정확한 묘치 위치를 알수가 없고 지난 50-60년대에 걸쳐 구소비에트 정권이 대대적인 묘지 이장 내지 폐기 작업을 벌이는 바람에 유해 안장 여부도 확인하기 힘들다고 대사관측은 전했다.
또한 이날 이 전 공사가 1901년부터 1905년까지 거주, 집무해온 구 공사관 건물(시내 뻬스젤랴 5번지)에서는 추모 현판이 부착됐다.
이 전 공사에 대한 추모 행사를 마지막으로 지난 16일부터 극동의 군항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1만㎞에 가까운 시베리아횡단철도(TSR)를 달려온 `한러 친선특급'열차의 공식 일정이 마감됐다. 친선특급 참가자들은 러시아 주요 7개 도시를 방문, 이번 친선 외교의 가장 큰 주제인 TSR 연결 사업에 대한 한국과 러시아측의 강한 의지와 희망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TSR 연결을 위한 남북한 관계 정립 등 풀어야 할 숙제를 안은 채 사상 첫 철도친선 외교 행사를 마치게 됐다. 한국과 러시아 당국과 학계 전문가들은 이번 행사를 통해 TSR 연결사업을 위한 전제 조건으로 남북한과 러시아 등 당사국간의 정치적 결단이 우선해야 한다는 점을 새삼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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