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08 10:16

알기 쉬운 해상법 산책(35)/ 새로운 시대, 그래도 믿을 건 오래된 원칙

법무법인 세경 최기민 변호사


길이 100m에 가까운 풍력터빈 블레이드(풍력발전기의 날개) 한 짝이 갑판 위에 길게 누운 채 항구를 떠난다. 풍력터빈 블레이드는 이제 해운업계에서 낯선 화물이 아니다. 풍력발전터빈이 커질수록 블레이드와 타워는 해마다 길고 무거워지고, 전용 프로젝트선뿐 아니라 일반 다목적선과 산적화물선까지 이 운송에 동원된다. 블레이드는 단순히 큰 화물이 아니라, 길며 바람에 민감해 적부와 고박이 조금만 어긋나도 화물과 선박 모두에 큰 손상을 일으키는 까다로운 프로젝트 화물이다. 이런 화물은 형태상 갑판 위에 실리는 경우가 많다.

해상법에서 “갑판 위에 실었다”는 사실은 단순한 적재 위치의 문제가 아니라, 운송인의 책임, 화주의 동의, 선하증권 문구, 보험 담보의 범위를 바꾸는 중요한 법률적 사건이다. 따라서 블레이드 운송의 진짜 위험은 파도와 바람, 갑판 위의 고박줄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갑판적을 하였다는 취지로 선하증권에 적혀야 할 문구가 빠지는 순간에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상법은 운송인이 운송물의 수령·선적·적부·운송·보관·양륙과 인도에 관해 주의를 해태하지 아니했음을 증명하지 아니하면 운송물의 멸실·훼손 또는 연착으로 인한 손해를 배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적부’가 운송인의 핵심 의무에 해당된다는 사실은 적부와 고박이 손상을 좌우하는 블레이드 운송에서 중대하게 작용한다. 

그런데 상법 제799조 제1항은 운송인의 의무 또는 책임을 경감하거나 면제하는 특약을 무효로 보면서도, 제2항은 선하증권 등 운송계약을 증명하는 문서의 표면에 갑판적으로 운송할 취지를 기재하고 실제로 갑판적으로 운송하는 경우에는 제1항을 적용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한다. 따라서 선하증권 표면에 갑판적 취지가 기재되고 실제로도 갑판적으로 운송되는 경우, 운송인이 갑판적 화물의 위험을 화주에게 돌리는 것도 가능해진다.

다만 두 가지를 구별해야 한다. 첫째, 갑판적을 동의받은 것과 갑판적으로 인해 발생한 손해에 대해 면책받기로 합의한 것은 별개라는 것이다. 표면 기재는 화주가 갑판적에 동의했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 그 자체로 운송인을 면책시키는 합의가 되지는 않는다. 

둘째, 그러한 면책 합의가 있더라도 그것이 미치는 범위를 따져야 한다. 갑판적 기재와 면책 문구는 갑판이라는 적재 위치에서 비롯되는 고유한 위험을 화주에게 돌릴 수 있게 할 뿐, 운송인 자신의 적부·고박상 과실로 인한 손해까지 당연히 면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과실 책임까지 배제하려면 면책 문구가 이를 명확히 포섭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갑판적이 적법하게 기재돼 있어도 적부상 주의의무 위반에 따른 책임은 운송인에게 남는다. 

운송계약의 한 줄이 운송인을 오히려 더 무거운 책임으로 밀어 넣기도 한다. 프로젝트 화물 계약에 흔한 “운송 중 파손은 즉시 복구·재시공하고 운송인이 비용을 부담한다”라는 조항은 자칫 무과실의, 일체의 책임을 떠안는 약정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런 조항은 운송인의 책임을 키울 뿐 아니라 그 책임을 보험으로 전보 받지 못하게 만들 위험도 있다. 따라서 갑판적과 위험부담의 문구를 선하증권 표면에 기재하는 일만큼이나, 무심코 무과실책임을 떠안는 운송계약 문구에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보험계약 모든 책임 담보하지 않아

한편, 운송인은 P&I 보험자가 화물손상 클레임을 당연히 처리해 줄 것이라고 쉽게 여기지만, 보험계약이 모든 책임을 무조건 담보하지는 않는다. 외국의 P&I 보험자는 블레이드를 갑판에 실을 때 계약 서류가 운송 방식을 정확히 반영하고 선하증권에 갑판적 사실을 분명히 기재할 것을 권고한다. 갑판적을 명시하지 않으면 운송인이 책임 항변과 P&I 보험 담보를 동시에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풍력발전설비의 부품을 싣기에 적합하지 않은 선박으로 이들 화물을 운송하는 것은 보험 위험을 변경해 보험 담보의 전제 자체를 흔드는 사정이 될 수 있다. P&I 보험의 약관과 인수 지침상, 화물이 애초에 갑판적에 부적합하면 갑판적 기재와 면책 문구가 있더라도 담보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입장이 이미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운송증권에 갑판적 사실을 적었는지 뿐만 아니라, 그 화물이 애초에 갑판적에 적합한지까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풍력터빈 블레이드 운송의 위험을 줄이는 일은 서류에서 끝나지 않는다. 앞서 본 적부상 과실 책임이 남는 영역이 바로 여기다. 블레이드는 길고 유연하며 바람을 받는 면적이 커서, 손상 여부는 선적 전 준비에서 거의 결정된다. 적부·고박 계획과 블레이드를 받치는 구조물의 적합성이 관건인데, 정작 선원은 그 구조물의 건전성을 검증할 수단이 없고 그 지식은 대개 송하인이나 용선자 측에 있다. 고박 자재의 공수와 고박 작업도 송하인·용선자 측 하역업자가 맡는 경우가 많아 선주의 통제가 약해지는데, 이 점이 자주 문제의 출발점이 된다. 항해에 들어가서도 선박의 횡동요와 가속이 블레이드 지지 구조의 한계를 넘으면 손상이 연쇄적으로 발생하고, 긴 블레이드가 선교 시야를 가리기도 한다. 따라서 선적 전 검정인의 입회로 증거를 확보하고, 항해 중에도 고박을 점검해 사진으로 기록을 남기는 조치가 필요하다.

풍력터빈 블레이드 운송은 새로운 산업의 외형을 둘렀을 뿐 그 본질은 전통적인 해상법 문제이다. 운송인으로서는 선하증권에 갑판적 취지와 함께 가능하면 위험부담의 귀속까지 명확하게 기재하되, 그 면책 문구가 적부·고박상 과실까지 포섭하는지, 또 떠안는 책임이 P&I 보험의 담보와 어긋나지 않는지까지 함께 점검하고, 검정인을 선임해 선적 시점부터 고박과 구조물의 적합성을 미리 검증하는 것이 안전해 보인다. 반대로 화주 측은 사고가 발생할 경우 그 원인과 함께 운송인에게 적부상 주의의무 위반이 있었는지, 선하증권 또는 운송계약에 어떠한 기재가 있는지를 면밀하게 검토해야 할 것이다.

갑판에 실린 풍력터빈 블레이드는 친환경 에너지를 상징한다. 그러나 그 거대한 화물 밑에는 오래된 해상법의 법리가 그대로 놓여 있다. 이 화물이 어디에 실렸는가, 누가 그 위험을 부담하기로 했는가, 선하증권은 그 사실을 제대로 기재하고 있는가. 선박 위의 고박이 풀리면 화물이 흔들리듯, 선하증권의 문구가 느슨하면 책임도 함께 흔들린다. 새로운 화물일수록, 오래된 원칙에 기대는 것이 더 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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