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테이너선사들의 공동행위는 독과점이나 담합이 아닌 산업의 붕괴를 막고 시장을 통제하기 위한 생존 시스템, 즉 ‘안정화 카르텔’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강일 태평양 변호사는 지난 17일 서울 여의도 켄싱턴호텔에서 열린 바다와미래 연구포럼에서 “해운업에서 협조 없는 맹목적인 자유 경쟁은 경제적 후생을 지속적으로 감소시키는 재앙을 초래한다. 안정화된 카르텔은 시장 변동성에 따른 위험을 줄이고 화주와 선사가 윈윈하는 구조를 만들 수 있다”며 이 같이 밝혔다.
| ▲강일 태평양 변호사가 주제 발표를 하고 있다. |
“해운 공동행위는 시장실패 치유하는 안정화카르텔”
강 변호사는 수요와 공급이 불일치하는 공핵(Empty Core) 현상이 발생하기 쉬운 해운업은 자유 경쟁 시 산업 붕괴가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고 해운 분야에 공동행위가 허용된 배경을 설명했다.
선박을 도입하고 유지·보수하려면 막대한 매몰 비용이 발생하고 글로벌 경기와 지정학적 위기 등으로 수요 변동성이 큰 해운업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시장 경제 메커니즘 맡겨 놓으면 한국 해운이 살아남기 어렵다는 진단이다.
공동행위를 인정하지 않을 경우 선사들의 자유 경쟁으로 운임 덤핑과 수익성 악화 등을 초래해 궁극적으로 공급망 파괴와 화주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게 강 변호사의 견해다. 미국 파이프산업과 글로벌 항공운송사업, 19세기 미국 설탕사업 등이 컨테이너선사업과 마찬가지로 공핵 현상이 나타나기 쉬운 산업으로 꼽힌다.
강 변호사는 “최근 대법원 판결로 해운 공동행위를 둘러싼 법적 불확실성이 가중된 상황”이라며 “기계적인 법 집행에서 벗어나 산업의 특수성을 반영한 ‘합리 원칙’ 도입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 원칙은 산업에 미치는 해로운 영향과 이로운 효과를 비교해 해로운 영향이 더 큰 경우 위법으로 판단하는 걸 의미한다. 이어 그는 “해운 공동행위를 단순 담합이 아닌 시장 실패를 치유하는 ‘안정화 카르텔’로 인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앞서 지난 2022년 공정거래위원회는 2003년 12월부터 약 15년 동안 국내외 23개 선사가 최저운임(AMR 또는 MGL)이나 긴급유가할증료(EBS) 등의 부속 합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해수부 장관에게 신고하지 않은 점을 문제 삼아 총 1763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그중 국적선사 13곳이 1461억원에 이르는 과징금을 물었다.
해운업계는 이에 반발해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2024년 2월 서울고등법원은 해운법 제29조를 근거로 외항 정기화물운송사업자들의 운임에 관한 공동행위는 해양수산부 장관만이 배타적 규제 권한을 갖고 있고 공정위는 이를 규제할 권한이 없다며 원고 승소 판결을 했다.
하지만 지난해 4월 대법원은 공동행위를 두고 “공정거래법이 적용되지 않고 공정위가 규제할 권한이 없다고 보기 어렵다”며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해수부 장관에 ‘신고되지 않은 공동행위’는 해수부 장관과 공정위가 모두 규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아울러 개별 법률에 ‘공정거래법 적용을 제외한다’는 명시적 규정이 들어 있지 않는 한 공정거래법은 모든 산업 분야에 적용돼야 한다는 의견을 덧붙였다.
이후 해운업계는 정치권과 손잡고 선사들의 공동행위에 공정거래법 적용을 배제하는 내용의 해운법 개정 절차를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이원택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윤준병 의원이 각각 대표 발의한 ‘해운법 일부개정법률안’은 국회 농해수위를 통과했지만 현재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돼 있다.
강 변호사는 “해운업에는 특수성이라는 게 존재하는데 대법원이 단순히 신고 유무에 국한해서 판단한 게 아쉽다”면서도 “고등법원은 훨씬 더 좀 산업 정책적이고 거시적인 그림에서 옳은 판단을 내렸다”고 말했다.
“해운 공동행위 세계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공정위가 국적선사들의 공동행위와 공동운항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건 국가기간산업인 해운업의 경쟁력을 저해하고 선복 확대를 추진 중인 글로벌 선사들의 행보와 상반된다는 주장도 나왔다. 공정위가 국적선사들의 공동행위를 국내적 시각으로만 바라볼 게 아니라 세계적인 흐름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박정석 해운협회 회장은 스위스 MSC, 독일 하파크로이트, 중국 코스코 등 글로벌 선사들이 선복량을 크게 늘려나가며 정기선시장에서 과점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선사들의 몸집 키우기는 독과점이 아닌 해운업을 기간산업으로 인식하고 자국 선사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국가 경쟁력 제고 차원의 접근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박 회장은 “부산항 전체 물동량 중 절반이 환적화물인데 대부분 국적선사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공정위가) 국내적인 시각에 갇혀 공동행위를 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글로벌 해운시장 트렌드를 볼 때 고려되지 않아야 할 사항”이라고 말했다.
이어 “국회 법사위에 계류 중인 해운법 개정안을 조속히 논의하고 통과시켜 우리 해운업이 든든한 법적 토대 위에서 다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달라”고 촉구했다.
국적선사들의 공동행위가 자국 산업에 기여하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금창원 장금상선 대표이사는 “해운 공동행위는 1974년 UNCTAD(유엔무역개발협의회) 협약에 따라 전 세계 80여 개국이 합의한 글로벌 표준이며, 우리나라도 1978년부터 도입해 안정적으로 운영해 온 제도”라고 강조했다.
이어 “공동행위는 타 산업에 피해를 주기는커녕 오히려 촘촘한 해상 네트워크를 제공해 제조업체의 재고 비용과 금융 부담을 낮추는 등 국가 산업 경쟁력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 최성훈 기자 shchoi@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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