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03 10:07

알기 쉬운 해상법 산책(33)/ 방패를 들 수 있는 자리, 해상운송인의 책임구간

법무법인 세경 최기민 변호사


해상운송인의 책임 구간은 어디서부터인가. 얼핏 단순해 보이는 이 질문이 수억 원짜리 분쟁의 핵심 쟁점이 됐고, 대법원까지 올라가 판단을 받았다(대법원 2025. 11. 13. 선고 2025다211111 판결).

사건의 발단은 냉동컨테이너의 온도를 잘못 설정한 것이었다. 로봇암 20대를 미국으로 수출하는 화주는 해상운송인에게 “영상” 18도로 운송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해상운송인의 직원이 컨테이너 보관회사의 직원에게 “영하” 18도로 설정을 요청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 사실을 모른 채 로봇암 화물은 냉동컨테이너에 적입됐고, 인천에서 부산까지 약 5일간의 육상운송이 끝나고 부산항 컨테이너 터미널에 도착한 이후에야 냉동 손상이 확인됐다.

적하보험자인 원고가 보험금을 지급하고 운송인들(복합운송인, 육상운송인, 해상운송인)을 상대로 소를 제기하면서 소송이 시작됐는데, 핵심 쟁점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거졌다. 사건에서 피고 중 해상운송인이었던 피고(이하 피고)가 상법 제797조 해상운송인의 개별적 책임제한을 근거로 손해배상책임을 약 1100만원으로 제한해 달라고 주장한 것이다. 상법 제797조에 따른 책임제한이 부정될 경우 손해배상액은 약 7억원이었으니, 그 차이는 60배가 넘었다.

1심 법원은 해당 손상이 육상운송 도중에 발생한 것이어서 해상운송인의 책임제한 규정이 적용될 영역이 아니라고 보았다. 즉 해상운송인의 책임제한은 해상운송인이 책임을 부담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므로, 육상운송 구간은 해상운송인의 책임 구간이 아니라는 판단이다. 

그러나 항소심의 판단은 반대였다. 상법 제795조 제1항이 해상운송인의 책임 구간을 운송물의 수령부터 인도까지로 규정하면서도 장소적 제한을 두고 있지 않으므로, 해상운송인이 컨테이너를 제공하고 온도를 설정한 것은 화물을 수령, 보관하는 행위의 일부에 해당한다는 논리였다.

항소심의 위 판단이 얼마나 파격적인지는 해운 실무를 떠올려 보면 분명해진다. 해상운송인은 오랫동안 자신의 책임 구간이 화물을 실제로 수령한 시점부터 인도 시점까지라는 입장을 일관되게 유지해 왔고 이는 상법 제795조에 근거했다. 화물 손상 클레임이 제기될 경우 해상운송인의 첫 번째 항변도 자신의 책임 구간에서 발생한 손상인지 불분명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항소심은 해상운송업을 영위하는 피고의 주장에 따라 컨테이너를 제공한 시점을 해상운송인의 책임 구간의 시작점으로 삼음으로써, 실무에서 해상운송인 스스로가 주장해 온 책임 구간을 통째로 앞당겨 확장시킨 것이었다. 필자는 이 항소심 판결을 보고 상당히 놀라고 충격을 받았다.

대법원은 위 항소심 판결을 파기 환송했다. 대법원은 상법 제797조의 책임제한 규정은 해상운송 도중 또는 해상운송과 밀접 불가분해 사실상 해상운송의 일부로 평가되는 부분에서 운송물의 멸실, 훼손 또는 연착이 발생한 경우에 한해 적용된다며 명확히 선을 그었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 해당 손상은 인천에서 부산으로의 육상운송 도중 발생한 것으로 해상운송의 일부로 평가되기 어렵고, 피고가 육상운송에 앞서 컨테이너를 제공한 것이 운송물의 수령이나 보관 행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으며, 온도를 잘못 설정한 것이 해상운송에 수반되는 고유한 위험도 아니기 때문에, 피고가 해상운송을 개시했거나 해상운송에 관한 주의의무를 위반했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해상운송인의 개별적 책임제한 규정이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참고로 말하면, 대법원  판결은 피고의 손해배상책임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개별적 책임제한이라는 방패만을 벗긴 것이다.

 


해상운송인 책임구간 재확인

대법원이 이번에 제시한 ‘해상운송과 밀접 불가분하여 사실상 해상운송의 일부로 평가되는 부분’이라는 기준은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일부 하급심에서 나온 법리를 대법원 차원에서 받아들인 것으로, 이번 대법원 판결로 해상운송인의 책임 구간은 재확인됐다고 생각된다. 

즉 송하인에게 컨테이너를 제공하고 컨테이너의 온도를 설정하는 행위는 해상운송인으로서의 운송물 수령 행위에 해당하지 않으며 상법 해상편이 규율하는 업무가 아니고 해상운송과의 밀접 불가분성도 충족되지 않는다. 따라서 해상운송인의 책임 구간은 기왕의 실무대로 상법 제795조에 따라 운송물을 수령한 시점, 예컨대 화물이 적입된 컨테이너가 컨테이너 터미널(CY)에 반입된 시점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이 사건에서 해상운송업을 영위하는 피고는 약 1100만원으로의 책임제한권을 얻는 대신 향후 유사 사건에서 컨테이너가 제공된 육상 구간까지 책임 구간이 확대될 수 있는 선례의 기초를 놓을 뻔했다. 반대로, 대법원이 해상운송인의 책임 구간을 화물의 실제 수령 시점으로 한정한 것은, 역설적으로 해상운송인의 책임 범위를 보호해 준 측면도 있다.

이 사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끗’의 사건이었다. 영상과 영하, 부호 하나의 차이가 36도의 온도 괴리를 만들어냈고, 해상운송인의 책임 구간이 컨테이너 제공 시점에서 시작되는가 아니면 화물 수령 시점에서 시작되는가라는 법리적 차이가 약 1100만원과 7억원이라는 60배의 격차를 갈랐다. 항소심 판단과 대법원의 판단이 달라진 것도 해상운송인의 책임제한제도가 왜 존재하는지, 그 보호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를 파고든 분석이었다. 예민한 법률관계일수록 답은 멀리 있지 않다. 근소한 차이를 정확히 짚어내는 것, 그것이 복잡한 법률관계를 풀어나가는 첫 번째 발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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