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가 해운업계의 거센 반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끝내 선사들의 공동행위를 불법으로 판단하고 과징금을 부과했다.
공정위는 2003년 12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15년간 총 541차례 회합해 한-동남아 수출입항로에서 총 120차례 운임을 합의한 23개 국내외 컨테이너선사에 시정명령과 함께 962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기로 결정했다고 18일 밝혔다.
대상 선사는 국적선사 12곳, 외국선사 11곳이다. 국적선사는 고려해운 남성해운 동영해운 동진상선 범주해운 SM상선 HMM 장금상선 천경해운 팬오션 흥아라인 흥아해운 들이다. 외국선사는 대만 정리내비게이션(CNC) 에버그린 완하이라인 양밍 4곳, 싱가포르 씨랜드머스크 PIL 뉴골든씨쉬핑(코스코 자회사) 3곳, 홍콩 골드스타라인(GSL) OOCL SITC TSL 4곳으로 구성돼 있다.
국적선사에 662억원, 외국선사에 300억원의 과징금이 각각 부과됐다. 선사별로 고려해운이 296억원으로 가장 많고 흥아라인 180억원, 완하이 115억원, 장금상선 86억원, TSL 40억원, HMM 36억원, 에버그린 34억원, 남성해운 29억원, 양밍‧씨랜드머스크 각각 24억원 순이다. 다만 컨테이너선사업을 흥아라인에 넘겨준 흥아해운은 시정명령만 받았다.
과징금 규모는 동남아항로 점유율이 반영됐다. 이 항로 운임동맹인 동남아정기선사협의회에 따르면 한국-동남아항로 수출 물동량 점유율은 2018년 현재 고려해운 23.4%, 흥아해운 11.9%, HMM 11.0%, 장금상선 9.7%, 완하이라인 9.3% 순이다.
공정위, ‘운임합의 신고·화주협의 미준수’ 판단…해운사 반론 철저히 배척
공정위는 23개 선사가 15년간 120건의 운임 합의를 진행하면서 해운법 29조에서 공동행위 요건으로 제시한 ‘해수부장관에게 30일 이내에 신고하고 화주와 협의하는 절차’를 어겼다고 판단했다.
120건은 신고를 마친 18건의 기본 운임 합의에 포함되는 부속 합의라는 선사들 주장은 철저히 배척했다.
내용적으로 공동행위 탈퇴를 부당하게 제한하거나 부당한 운임인상으로 실질적으로 경쟁을 제한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규정도 지키지 않았다고 결론 내렸다. 공동행위 탈퇴 제한의 근거로 중립위원회(운임동맹사무국)가 운임 감사를 벌여 합의를 위반한 선사에 총 6억3천만원의 벌과금을 부과한 사실을 들었다.
선사들은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1983년 발효해 우리나라가 가입한 ‘정기선동맹의 행동규칙에 관한 협약’도 동맹에 참여한 회원이 부정행위를 하면 벌칙을 내릴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고 반박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정위는 해운사 운임 담합이 해운법에서 규정한 절차상 내용상 공동행위 요건을 준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법 공동행위이며 공정거래법 적용 대상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선사와 별도로 운임 합의를 목적으로 회의를 소집하고 합의된 운임 준수를 독려한 동정협에도 사업자단체 금지행위 위반으로 시정명령과 함께 과징금 1억6500만원을 부과했다.
공정위는 이번 조치가 지난 15년 간 해운시장에서 법이 허용하는 범위를 넘어 불법적으로 이뤄진 선사들의 운임 담합 관행을 타파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자평했다.
해운업계, 40년 정당한 공동행위가 불법으로 낙인찍혀
과징금 부과 소식을 전해 들은 해운업계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외항해운사 단체인 한국해운협회는 이날 낸 성명서에서 “해운기업들은 해양수산부 지도감독과 해운법에 따라 지난 40여년간 절차를 준수하며 공동행위를 해왔는데도 절차상 흠결을 빌미로 부당공동행위자로 낙인찍었다”며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감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협회는 성명서에서 “설사 절차상의 흠결이 있다 하더라도 해운기업의 공동행위를 허용하는 해운법의 취지가 훼손돼선 안 된다”며 공정위의 이번 판단을 ‘꼬리가 몸통을 흔들어대는 꼴’이라고 질타했다.
협회는 공정위의 잘못된 판단을 바로잡고 해운 공동행위의 정당성을 회복하고자 행정소송을 제기하는 한편 해운 공동행위의 법적 혼선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여야 국회의원들이 발의한 해운법 개정안이 조속히 의결되도록 청원하겠다고 향후 계획을 밝혔다.
해수부, "해운시장 감독권한 침탈당했다" 불쾌감
12일 열린 전원회의에서 전재우 해운물류국장이 장장 13시간 동안 회의장을 지키며 120건의 부속 합의는 적법하다고 주장하는 등 과징금 부과의 부당성을 알려온 해양수산부도 이번 최종 판단이 당황스럽긴 마찬가지다. 일각에선 해운법으로 규율하고 있는 해운 공동행위 감독권한을 공정위가 이해할 수 없는 논리로 침탈했다는 불쾌감도 표출하고 있다.
정치권에선 해운 공동행위를 공정거래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는 해운법 개정안 통과를 적극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국회 농해수위 국민의힘 간사인 정점식 의원은 이날 발표한 성명서에서 “공정위의 과징금 부과 결정은 경영 여건이 열악한 컨테이너선사들을 도산 위기로 내몰고 선박과 같은 필수 자산을 매각시키는 결과를 초래해 한진해운 파산 이후 어렵게 재건한 우리나라 해운산업을 다시 침체의 늪으로 빠트리게 될 거”라며 “국민의힘 농해수위 위원 일동은 공정위의 불합리한 결정이 반드시 시정되기를 촉구하고 해운 공동행위 적용 제외를 규정한 해운법 개정안이 조속히 국회 농해수위와 본회의를 통과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해운법 개정안 대표발의자이자 농해수위 여당 간사인 위성곤 의원 측도 공정위 과징금 부과 건에 대한 입장을 조만간 정리해 발표할 예정이다.
한편 해운협회는 이날 성명서에서 공정위 심결의 10대 오류를 지적해 눈길을 끌었다. 협회가 지적한 공정위의 오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정위 심결 10대 오류>
1. 해운법은 공동행위 가입/탈퇴를 부당하게 제한하지 않는 한 공동행위를 허용하고 있는데, 공정위는 이를 무시했다.
2. 국제협약 상 운임공동행위시 감사 및 상벌을 통한 운임준수 행위는 보장된 행위임에도 공정위는 이를 외면하고 중립위원회의 운임감사 및 벌과금 부과행위를 부당한 가입/탈퇴 제한행위로 간주했다.
3. 선사들은 공동행위가 법에 보장된 행위로서 위법성을 인식하지 않았음에도 공정위는 위법성을 인지하면서 자행한 행위로 호도했다.
4. 공정위는 1981년 해운기업에 대해 경쟁제한행위등록증을 발급한 바 있으며 1998년 카르텔 일괄정리 시에도 해운공동행위를 제외하는 등 해운공동행위를 보장해왔던 이제까지의 입장을 저버리고 자기모순적인 결정을 내렸다.
5. 선사들은 해운법에 의거, 해양수산부의 지도감독을 받아 지난 40여 년 동안 공동행위를 이행해왔으나 공정위는 이를 무시하고 단지 절차상의 흠결을 이유로 부당공동행위로 판단했다.
6. 설사, 절차상의 흠결이 있다고 하더라도 공동행위를 허용하는 해운법 본연의 취지를 훼손할 수는 없다.
7. 공동행위는 부당하게 경쟁을 제한한 바도 없고 부당하게 이득을 취한 바도 없으며 화주들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았음에도 공정위는 이를 도외시 하였다.
8. 화주를 대표하는 각종 경제단체 및 일천여 실화주들이 피해입은 바 없음을 입증하고 있음에도 공정위는 이를 외면하였다.
9. 공정위는 해운사업의 자유항행원칙, 화주의 항상적인 우월적 지위, 만성적인 선박공급 과잉이라는 해운시장의 특성을 외면하였다.
10. 공정위는 일본선사를 비롯한 20여개의 외국적 선사를 합당한 근거없이 조사 대상에서 제외시켜 형평성을 심각하게 훼손시켰다.
< 이경희 기자 khlee@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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