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25 09:56

기고/ 앵커링(Anchoring)의 설렘과 추억

변호사가 된 마도로스의 세상이야기(19)
성우린 법무법인 대륙아주 변호사


“Let Go Anchor!(투묘 시작!)”

선장님의 우렁찬 목소리가 선교에 울려 퍼진다. 선수에 있는 1등 항해사와 갑판장이 윈드라스(Windlass, 투묘 및 양묘 장치)를 사용하여 힘차게 앵커(Anchor, 선박이 엔진을 정지한 상태에서도 조류에 이끌려가지 않고 정박지에 머물러 있게 하는 항해장비로 ‘닻’을 말한다)를 내리기 시작한다.

무게만 약 15톤에 달하는 앵커가 체인과 함께 내려가자 선박 전체의 떨림으로 선교에서 주 기관 텔레그라프(Telegraph, 선교에서 주 기관의 작동을 제어하는 장치)를 잡고 있는 필자의 손까지 고스란히 느껴진다.

필자가 당시 승선하고 있던 선박은 일주일간의 항해를 마치고 모로코의 카사블랑카항으로 곧바로 입항하려 했으나 항구에는 선석(船蓆)이 없어 앵커리지(Anchorage, 묘박지)에서 최소 1주일 이상 대기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북아프리카 지중해에 위치한 카사블랑카의 앵커리지는 당시 바람 한 점 없는 최적의 날씨였다. 항해사들이 돌아가면서 앵커링(Anchoring, 묘박) 당직을 서지만 항해 당직을 할 때의 긴장감과는 다른 설렘이 있다.

앵커링 당직을 끝내고 선미로 나가보니 벌써부터 조리장을 포함한 선원들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조리장이 필자에게 이쪽으로 와보라며 손짓을 한다. 이름 모를 생선이 양동이에 수북이 쌓여 있다. 조리장에게 생선 이름을 묻자 손을 휘휘 저으며 필자가 육지 출신이라 잘 모른다며 면박을 준다.

이게 바로 카사블랑카의 고등어란다. 조리장이 한 마리를 들어 회 칼을 꺼내더니 곧바로 고등어 회를 떠준다. 그 때의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가끔씩 고등어 회를 먹어도 그 맛을 느낄 수 없다. 당시 조리장 말처럼 그 유명한 ‘카사블랑카의 고등어’였기 때문일까, 선미에서 지중해의 시원한 바람과 함께 선원들과 함께 맛 본 ‘앵커링’의 설렘 때문일까.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필자를 포함한 선원들은 그 날부터 카사블랑카 항에 접안할 때까지 저녁식사마다 다양한 형태로 요리된 고등어를 지겹도록 먹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앵커링이 선원들에게 항상 평화로운 시간만은 아니다. 앵커는 선박의 일시적인 정박을 도와주는 장비로 앵커리지 수심의 6 ~ 7배 길이로 1개의 앵커를 놓았을 때 초속 25미터 이하의 풍속 및 초속 2.5미터 이하의 조류를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물론 두 개의 앵커를 사용함으로써 더 큰 파주력을 얻을 수 있겠지만, 앵커는 어떤 상황에서나 완벽한 정박을 제공하는 장비는 아니므로 본선의 선장 및 선원들은 항시 선박의 긴급 상황 시 엔진을 작동하여 대양으로 피항하는 등 위험에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

이하에서는 강풍 및 높은 파고 등으로 앵커리지에서 종종 발생하는 ‘앵커 유실사고’에서 시간손실과 앵커 제거 비용 등에 관한 선주와 용선자 간 책임 문제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정기용선계약서 표준양식(NYPE 1946)에 따르면, 선주는 용선자에게 충분히 준비된 선박을 인도하고 용선기간 동안 선박의 유지 및 관리를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또한, 항해와 관련한 책임은 선주에게 있으며, 장비의 고장으로 시간손실이 발생하면 용선료 지급 중단 사유(Off Hire)에 해당함을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용선자는 앵커 유실 사고가 발생하는 경우 그로 인해서 발생하는 시간이 ‘Off Hire’에 해당함을 주장할 수 있고, 선주는 앵커 유실이 해당 항구의 특성으로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용선자의 ‘안전항 지정의무’를 위반했음을 주장할 수 있다.

실제로도 앵커리지의 특수한 해저 상태 등 선박의 장비문제나 선원의 과실이 없이 온전히 해당 항구의 특성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선주가 이를 중재나 재판에서 적절히 입증한다면 시간손실과 앵커 제거 비용 등이 용선자의 책임으로 인정될 여지도 충분히 있다.

▲ 법무법인 대륙아주의 성우린 변호사는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하기 전 팬오션에서 상선의 항해사로 근무하며 벌크선 컨테이너선 유조선 등 다양한 선종에서 승선경험을 쌓았다. 하선한 이후 대한민국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현재 로펌에서 다양한 해운·조선·물류기업의 송무와 법률자문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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