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이 장기화되면서 해운시장에선 상생 전략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선사와 화주가 호황기나 불황기에 얽매이지 않고 서로 동반발전하는 상생의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가 해운업계 안팎에서 나온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은 4일 오전 서울 세종대로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해운기업 최고경영자(CEO) 초청 세미나에서 ‘선사와 화주 조선사 간 상생협력 가능성을 고민했다.
이날 주제 발표를 맡은 윤희성(
윗 사진) KMI 해운빅데이터연구센터장은 화주가 해운 불황기에 낮은 비용구조로 거둬들이는 이익의 일부를 선사에게 이전하고 선사는 호황기에 고운임으로 누리는 이익을 일정 부분 화주에게 환원하는 방식으로 상생의 토대를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 센터장은 현재 국적선사는 높은 원가구조와 낮은 구매력으로 운임경쟁력이 낮은 데다 단독운항 체제와 부족한 선대로 서비스 빈도는 뒤처지고 항로 다양성 면에서도 한계를 띠고 있다고 진단했다. 한진해운 파산과 오랜 불황에 따른 재무구조의 악화로 기업 불안정성도 계속 이어지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화주는 운임을 의사결정 기준의 최우선 가치로 삼아 불황엔 낮은 시장운임을 주장하고 호황기엔 운임인하를 압박한다고 지적했다.
상생협력으로 선사 적취율제고, 화주 적기운송
윤 센터장은 이 같은 환경에서 이익을 공유하는 상생모델을 확립할 경우 선사는 손익변동 폭을 줄여 재무적 안정성을 제고할 수 있는 데다 고객 충성도를 확보해 적취율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현재 국내 컨테이너화물의 국적선 적취율은 연근해항로 60%, 원양항로 20%다. 특히 구주항로의 경우 10% 미만으로 파악된다.
화주는 선복이 부족해지는 호황기에 적기 수송이 가능해지고 운송비용 안정화를 꾀할 수 있다. 불황기에 이익 일부를 이전함으로써 세금 이연 효과를 볼 수도 있다.
윤 센터장은 선화주 상생 문화가 정착하기 위해선 불황기에 이익을 선사에 이전한 화주가 호황기에 그 이익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하는 계약구조의 설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른바 신뢰 확보다.
계약 과정에서 이익의 이전이 일어날 수 있는 기준을 운임지수 등을 반영해 설정하고 보증기금이나 해양진흥공사 등 이행보증기관을 지정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는 “중국효과로 전대미문의 해운 호황기를 구가했던 2003~2008년을 제외하더라도 월별 선사 손익변동 폭은 매우 크게 나타났다”며 “이 같은 흐름은 선사와 화주 모두에게 긍정적이지 못하다”고 말했다. 다만 상생 전략이 현실화되기 위해선 선사의 원가 경쟁력 제고가 선행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윤 센터장은 선사와 조선사도 선화주와 마찬가지로 지수와 연계해 호황기엔 선가를 할인하고 불황기엔 선가를 할증하는 방식의 윈윈 전략을 모색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선사로선 호황기에 낮은 가격으로 배를 지어 이익을 거두고 그 이익을 내부 유보함으로써 저시황기에 발주 여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 이 전략의 장점이다. 조선소도 불황기에 상대적으로 높은 선가로 신조물량을 수주할 수 있는 데다 호황기엔 저선가 수주를 통한 세금 이연 효과를 볼 수 있다.
해운사와 조선사가 선형을 공동 개발하는 상생 방안도 제시됐다. 조선사가 선박운항 데이터를 보유한 선사와 협업해 4차산업혁명 기술을 적용한 친환경 표준선형을 개발해 중국시장에 뺐긴 벌크선박 등의 시장경쟁력을 재건할 수 있다는 견해다.
이 밖에 국적선사의 국내 조선소 발주를 늘리기 위한 방법으로 그리스와 같은 선주 모델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국가신용을 이용한 선주사 육성 전략으로 관공선을 민간에서 소유하고 관에서 운영하는 방안이 소개됐다.
국적선사의 국내 발주 비중은 우리 조선산업이 세계 1위를 차지했던 2010~2014년 5년간 8.8%에 불과했다. 2015년부터 지난해는 14.8%로, 여전히 낮은 수준이다. 반면 일본은 53.6%를 기록, 절반을 넘는 물량을 자국 조선소에 몰아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감몰아주기 개선이 전제조건
이어진 토론에서 한종길 성결대 동아시아물류학부 교수는 선사와 화주 조선사 간 상생 생태계가 정착하기 위해선 그룹 내 일감몰아주기 관행이 먼저 개선돼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는 계열사 일감몰아주기 문제를 개선한 일본을 예로 들어 “우리도 지금처럼 계열 내 이익만 추구한다면 상생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며 “상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구조를 어떻게 만들어 낼 지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교수는 일본은 과거 그룹 내에 조선소와 선사 종합상사를 두고 내부거래를 해오다 계열사 부실로 전체가 무너지는 문제가 발생하자 국가 차원에서 수송선단 방식을 도입해 상생을 이뤘다고 소개했다.
유창근 현대상선 사장은 선사와 화주의 상생 문제는 선사의 운임 경쟁력과 서비스 다양화가 전제 조건이라고 지적했다.
“우리도 대형선, 연비가 좋은 친환경선박을 짓고 환경규제에 대응한 탈황시설을 가져서 운임경쟁력을 키워야 한다. 서비스 다양화 측면에서도 남미 아프리카의 도시화가 빠르게 되는 시점에서 (대형선뿐 아니라) 중소규모의 선대를 갖고 다양한 노선의 요구에도 준비해야 한다.”
이어 선사와 조선사 간 상생은 기술 협력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는 “한국 조선소들이 저황유나 연비 등의 기술적인 문제를 유럽계 선사의 대형선 건조를 통해 축적해왔다”며 “이다음 LNG선이나 수소전기 개발을 통한 혁명적 변화에선 국적선사와 국내 조선소가 긴밀하게 협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영무 선주협회 부회장은 해운과 조선이 상생의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선 행정 일원화가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해운과 조선이 위기가 발생했을 때부터 상생하자고 했는데 잘 안됐는데, 행정부처가 서로 달라서 그런 거 같다. 지금과 같이 (해운은) 해양수산부 (조선은) 산업통상자원부로 나뉘어 있으면 상생의 길은 요원하다.”
이 밖에 이기환 한국해양대 해양금융대학원장은 “한국해운의 신용도 회복을 위해 자금조달의 형태를 변화시키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조언했고, 전준수 한국해양대 석좌교수는 “2020년 환경규제로 해운이 돈을 벌 수 있는 산업으로 도약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고 스크러버(탈황장치) 설치를 지원받을 수 있도록 정부와 금융권을 설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날 해양수산부 김양수 차관은 축사에서 “선화주 상생과 공정거래 정착을 위해 우수선화주 인증을 부여하고 다양한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한편 장기운송계약을 법에 명문화하겠다”며 “발전사 경영평가에 국적선사 이용실적을 반영하고 선화주 불공정 거래를 금지하는 해운법 개정도 준비하고 있다”고 정부 정책을 소개하고 민간에서도 상생 생태계 구축에 적극적으로 나서주길 당부했다.
< 이경희 기자 khlee@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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