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5-17 15:44

기획/ 벌크선사를 어쩌나…무너진 시황에 은행권도 고민

BDI 바닥서 횡보, 선사들 1분기에도 무더기 적자
금융위, 캠코펀드 집행 막아 원성

●●●“요즘은 선사 직원들이 서로 잘 안 만난다. 예전엔 자주 만나서 식사도 같이 하고 했지만 지금은 퇴근하면 집에 가기 바쁘다. 만나도 서로 할 얘기가 없어 서먹서먹하기만 하다.”

한 중견 벌크선사 관계자의 말이다. 벌크선 시장의 부진이 지루하리만치 장기화되면서 해운업계에 나타난 현상이다. 선사 직원들간 교류를 못할 만큼 업계 분위기는 얼어 있는 것이다.

미국발 금융위기로 고꾸라진 벌크선 시장은 회복의 기미를 좀처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올해 들어선 시장 환경이 더 안 좋다. 내리 4년째 불황이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컨테이너선 시장의 경우 지난 3월 이후 단행된 몇 차례의 운임인상이 성공을 거두면서 선사들도 단 열매를 거둬 들일 수 있었다.  시장 환경이 썩 여의치 않았음에도 선사들의 의지가 시장을 부양시켰다. 하지만 벌크선 시장은 다르다. 완전 경쟁시장인 까닭에 선사들이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운임회복에 개입할 여지가 크지 않다.

지난 2월 벌크선운임지수(BDI)는 역대 최저치인 647까지 떨어졌다. 이후 조금씩 상승추세를 이어 가고 있지만 회복 속도는 더디기만 하다. 지난달 중순께 BDI가 1000포인트를 다시 넘어섰을 때만 해도 시장 회복에 대한 청신호가 켜졌다는 평가도 있었다. 하지만 현재 시점에서 보면 여전히 갈 길은 먼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선형별로 운임지수가 바통 터치를 하며 등락을 거듭하고 있어 대세적인 상승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 주고 있다. 대형선이 오르면 중소형선이 떨어지고 중소형선이 오르면 대형선이 주저앉는 모습이다. 결과적으로 선사들의 유동성난도 더욱 가중되고 있다.

BDI 1천선 회복했지만…

BDI는 지난달 17일 1000선을 회복했다. BDI 1000포인트 재탈환의 배경엔 파나막스와 수프라막스 등 중소형선의 호조가 있었다. 특히 파나막스선의 일일 평균용선료는 4월 말 1만3877달러까지 상승, 케이프 선박보다 두 배나 높은 모습을 보여줬다. 남미 시장의 곡물 성수기로 빠른 회복세를 탔다. 수프라막스선 용선료도 1만1천달러대를 넘어서며 시장 회복을 견인했다. BDI는 중소형선들의 활약에 힘입어 1100포인트선까지 치고 올라갔다.

하지만 5월 들어 이 같은 시장 상황은 급반전했다. 상승의 원동력이었던 파나막스 시장이 하락세로 꺾였다. 15일 현재 BDI는 1130을 기록했다. 8일 1165로 고점을 찍은 뒤 5일(거래일 기준) 연속 하락했다. 파나막스선 일일 평균용선료는 1만300달러대까지 떨어졌다.

대신 케이프 시장이 상대적으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올해 들어 내내 하락세를 보이던 케이프 시장은 중국의 철광석 수요가 늘면서 과잉 공급된 선박을 일부 흡수하는 데 성공했다.

벌크선 시장의 앞날은 여전히 불투명하다는 게 중론이다. 만성적인 공급과잉이 시장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데다 세계 각국에서 불거지고 있는 유동성 위기도 먹구름이 되고 있다.

얼라이드쉽브로킹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 운항 중인 벌크선대는 9135척 6억3000만t(재화중량톤)에 이른다. 케이프사이즈 1억8400만t 파나막스 1억2700만t 수프라막스 9300만t 등이다. 올해는 신조선의 대량 유입으로 전체 선대가 1만척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신조 발주량은 2400척 2억t 정도다. 이 가운데 1억2천만t의 신조선이 올해 쏟아져 나올 전망이다. 케이프 3000만t, 파나막스 3400만t 수프라막스 2400만t이 올해 인도 예정돼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 가운데 1분기에만 305척 2600만t의 신조선이 인도됐다.

케이프 37척 660만t, 파나막스 64척 506만t, 수프라막스 88척 500만t 등이었다. 특히 케이프사이즈 선박은 지난 3년 동안 70%나 늘어났던 터여서 공급과잉은 더욱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유럽 지역 재정 위기가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는 점도 해운 시장을 불안하게 하는 요인이다. 특히 그리스는 최근 연립정부 구성에 실패하면서 유로존 탈퇴 가능성과 채무불이행(디폴트) 우려도 높아지고 있다.

반면 선박 해체량이 늘고 있는 건 긍정적이다. 1분기에 180척 890만t의 노후선들이 고철로 사라졌다. 지난해 연간 해체량(2430만t)의 37% 수준이다. 막대한 신조선 인도에도 불구하고 활발한 폐선으로 1분기 선복 증가량을 1500만t 수준으로 낮출 수 있었다.

중국의 철광석 수요가 최근 성장곡선을 그리고 있는 점도 케이프 시장의 호조로 이어질 것으로 보여 고무적이다. 중국 하이관(세관)에 따르면 1~4월 중국의 철광석 수입량은 2억6498만t을 기록, 지난해 같은 기간의 2억22987만t에서 15.3% 늘어났다. 1월 13.9% 감소했던 중국 철광석 수입량은 2월에 33.6% 폭증한 뒤 매달 증가세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2월 수입량(6498만t)은 지난해 1월(6887만t)에 이어 월간 기준으로 역대 두 번째로 많은 양이다.

선사들 실적 발표가 무섭다

시황 부진으로 벌크선사들의 영업실적도 초라하기 그지 없다. 지난해 금융감독원에 감사보고서를 제출한 149곳의 국적선사 가운데 77곳이 적자를 낸 것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벌크선사가 71곳이었다.

올해 들어선 벌크선사들의 경영난이 더욱 가중될 것으로 보인다. 운임은 지난해보다 더 하락한 반면 연료유 가격은 강세를 보인 까닭이다. 15일까지 올해 평균 BDI는 928을 기록 중이다. 지난해 평균 1549에 비해 크게 낮다. 반면 연료유 가격은 올해 들어 큰 폭으로 올랐다. 지난해 평균 651달러였던 선박 연료유 가격(싱가포르항 IFO 380cst 기준)은 올해 1분기 평균 730달러대로 상승했다. 13%가량 오른 것이다. 이달 들어 700달러선 아래로 떨어졌지만 선사들을 위로하기엔 턱없이 높은 수준이다.

주요 벌크선사들의 1분기 영업보고서도 적자행진을 이어갔다. STX팬오션은 1분기에 영업손실 1169억원 당기순손실 986억원을 기록했다. 1년 전에 비해 손실 폭이 각각 3배 2배 확대됐다. 매출액은 6.7% 줄어든 1조1164억원으로 집계됐다. 대한해운은 같은 기간 매출액 1859억원 영업손실 193억원 당기순손실  314억원을 각각 기록했다. 손실 폭이 1년 전에 비해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큰 규모의 적자다. 매출액은 27% 뒷걸음질쳤다. 삼선로직스도 영업손실 26억원 순손실 25억원을 기록한 것으로 집계됐다.

반면 폴라리스쉬핑은 큰 폭의 외형 및 이익 성장을 기록해 대조를 보였다. 매출액은 1349억원으로 59.8% 성장했으며 영업이익과 순이익도 각각 182억원 73억원으로 65.2% 54.7% 늘어났다. 폴라리스는 지난해에도 흑자경영을 일궈 주목을 받았다.

다량의 장기수송계약 화물을 확보하고 있는 게 지금과 같은 극심한 불황기에도 선전할 수 있는 비결로 지목된다. 폴라리스쉬핑은 브라질 발레를 비롯해 포스코 한국전력 등과 장기계약을 맺어 놓고 있다. 지난달에도 한전 자회사인 동서발전과  15년 동안 전력용 유연탄을 수송하는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폴라리스쉬핑은 2016년부터 인도네시아와 호주로부터 연간 90만t씩의 유연탄을 들여오게 된다. 지금과 같은 불황기에 해운선사들이 나아가야할 방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선사들, 대출 만기 연장에 사활

거친 가시밭길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이자 선사들은 유동성 확보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한진해운이나 현대상선 STX팬오션 등이 수천억원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한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STX그룹은 나아가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STX OSV를 매각하고 STX팬오션의 노후선들을 처분하는 방법으로 현금을 마련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회사채 발행도 중소형선사들에겐 남의 집 일이다. 중소선사들은 대출금 만기 연장을 위해 은행권에 매달리는 게 전부다. 은행권이 대출금 회수를 강행하지 못한다는 점은 선사들로선 다행스런 일이다. 이스라엘계 조디악마리타임에이전시의 에얄 오퍼 회장이 한 말에서 은행들이 최근 안고 있는 고민을 엿볼 수 있다.

오퍼 회장은 은행들이 선사들을 파산 처리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그는 “앞서 발생한 금융위기에서 선사들은 은행권에 선박을 압류당해야 했지만 지금은 은행들이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라며 “현재 가격으로는 선박을 팔아도 손실을 털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은행들은 오퍼 회장의 말처럼 현재 ‘울며겨자먹기’로 선사들에게 대출기한을 연장해 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벌크선사 관계자는 “선박펀드도 있긴 하지만 선사들은 가능하다면 기존에 거래한 은행들로부터 지원을 받는 게 좋다”며 “특히 산업은행이나 수출입은행 같은 국책은행은 그나마 선사에 호의적”이라고 전했다.

한편 벌크선사들이 깊은 수렁에 빠져 있는 상황에도 금융감독위원회가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가 선사들을 지원키 위해 마련한 예산을 집행치 못하도록 해 원성을 사고 있다. 캠코는 지난 2월9일 ‘금융회사부실자산 등의 효율적 처리 및 한국자산관리공사의 설립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의 국회 통과로 올해에도 국적선사들을 대상으로 선박을 매입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개정된 법은 캠코가 구조조정 기금을 쓰지 못하는 대신 고유계정을 만들어 해운사들을 도울 수 있도록 근거를 마련했다. 캠코는 선박 매입을 위해 1천억원 안팎의 예산도 배정해 놨었다. 하지만 갑자기 일이 틀어지고 말았다. 금융위원회가 해운시황이 살아나고 있는데다 공공기관 부실화가 심화되고 있다고 판단해 예산 집행을 막았기 때문이다.

지난해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금융위의 반대로 구조조정기금 집행이 한동안 보류됐었다. 하지만 구조조정기금 집행을 심의하는 주체인 공적자금관리위원회의 승인이 떨어지면서 막판에 선박 매입에 나설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캠코 고유계정은 금융위 승인에 의해서 집행이 결정되는 까닭에 상황이 녹록치 않다.

선사 한 관계자는 “현재 시중은행들이 해운사를 대상으로 자금대출을 모두 막은 상태이기 때문에 선사들이 기댈 수 있는 곳은 캠코펀드나 정책금융공사 등 일부밖에 없다”며 “국토해양부와 선주협회가 이 문제를 공론화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이경희 기자 khlee@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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