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5 海運韓國을 돌이켜 보는 추억과 回想의 旅路 - (47/최종회)
전통적인 농사꾼 집안에서 조부모님은, 다 성인으로 키우지는 못했지만 아들 아홉에 딸 일곱을 보태 열여섯 자녀를 낳으셨다고 했다. 17세 때 16세의 아버지와 조혼을 하고도 7년간 생산을 못해 여러 차례 쫓겨날 뻔 했던 어머니는 드디어 일제 강점기 1942년 음력 정월 열엿새에 첫 출산으로 필자를 낳은 후에는 4남3녀 7남매를 스트레이트로 생산했다.
농사를 짓지만 시골치고는 제법 넉넉한 전답에 머슴 두고 살며 다복하단 말을 들었으나 시골부자는 일 부자라 했듯 맏이로 태어난 필자는 어릴 때부터 공부보다는 논밭에서 꼴머슴처럼 일꾼으로 살았었던 기억뿐이다.
대구나 서울 등 외지로 유학을 간 친구들이 많았으나 필자는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마치고 농사일을 돕다가 우연한 기회에 친척의 권유로 부산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당시 16세로 고향을 떠나 지금까지 54년간 타향살이를 하게 된 단초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래도 땅 팔고 소 팔아 아들딸을 도시의 최고학부까지 보낸 사실은 연구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장한 부모님’ 군수상을 타기도 했다.
16세때 고향떠나 타향살이 몇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54년
동아고(東亞高) 야간부에 중간 입학을 해서 한 학기를 다니다가 다음 해에 주간으로 편입을 했다. 1년을 허송한 탓에 2년제를 다닌 셈이고 또래에 비해 1년이 늦어지게 됐다.
1960년 4.19의거에 이어 61년 5.16군사혁명으로 국가고시가 시행됐다. 다음해 1962년 문교부는 대학교육개혁의 일환으로 대학입시제를 전면적으로 개혁하고 전국대학의 법정정원 150%만을 뽑는 예비고사를 통해 이에 합격한 사람에 한해 대학입학자격을 부여하는 혁명적인 조치를 단행했다. 국민의 기본권이라 할 수 있는 대학교육 기회의 첫 관문인 응시 자체가 1.5배수 정원에 못들면 시험도 못 치게 엄격히 제한을 받게 된 것이었다.
이미 손에 쥐고있는 점수표를 만지작이며 전차를 타고 서울의 3개대학을 둘러보고 우선 석조건물이 맘에 들고 야성이 엿보여 필자의 독자적 판단으로 술마시기 좋은 고대 영문학과에 영문도 모르고 입학을 했다.
그러나 필자는 재학중 사병으로 입대해서 육군하사로 최전방에서 보낸 3년과 복학 후 정교사 자격 취득을 위한 추가학점 따기와 교생실습, 전공과목 재시험 등등으로 인해 입학후 무려 8년이란 대학생활을 하는 동안에 ‘공부만 빼고’는 뭐든지 부지런하고도 열심히 캠퍼스생활을 했다고 자부한다.
군대복무 포함 8년간 대학생활, 공부만 빼고는 다 열심히
술, 친구, 미팅, 응원 등 닥치는대로 열심이 했고 특히 술 마시는 데는 고교시절부터 대학시절과 군대에서도 가히 골수 주당, 리틀 자이언트란 별명이 무색하지 않게 빼어난 발군의 실력을 보였고 누구와 겨뤄도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스포츠나 구기를 실제 제대로 하는 건 별로 없어도 밖에서 경기가 있을때 응원 출석 하나는, 학점때문이기도 했지만, 휴강분위기 선동과 함께 선두주자로 뛰어난 실력을 보였던 것으로 회상된다.
작년만 해도 고연전(高延戰) 정기전이 있는 날은 첫날의 야구와 농구 및 아이스하키는 중계방송이나 인터넷으로, 둘째날 럭비와 축구는 목동 경기장 현장에 가서 어느 한 종목도 소홀함이 없이 목이 터지라 응원을 했다. 재학생과 함께 어울려 어깨동무로 거리행진을 끝내고도 모자라 안암동 참살이길 뒤풀이 현장까지 가서 높낮이 학번 구별없이 마주치는대로 어우러져 밤을 팼고 그러기를 50년 가까이 되풀이 해 온 것 같다.
필자는 비록 나이가 들어도 미녀는 낮 친구요 추녀는 밤 친구라 했듯 남들이 비웃어도 저홀로 푸른색을 띠어 왔고 먼저 누워도 나중에 일어나는 게 여자란 말처럼 어느 행사를 두고도 먼저 가서 나중까지 마감하는 걸 의리로 여겨왔다. 얼마 안가서 어차피 바닥을 보일 정열이요 정력일진데 묵혀 없애느니 쓰서 없애는 편이 낫다는 게 소신이었기 때문이다.
앞서 수차례 언급했듯이 필자는 기이하게도 “영문도 모르고 영문과”를 나와서 “경제도 모르며 경제신문 기자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해운도 모르면서 해운단체”로 가서 일하던 중 끔찍하게도 “승선·해무경험도 없이 해무부장”으로 전문 해기사 보직을 맡아 해양계 대학을 나와서, 그것도 선장이나 기관장급으로 승선경험이 풍부한 마도로스가 수행해야 할 직무를 감당하는 등 자신의 지식이나 능력과는 걸맞지 않은 엇박자로 긴 세월을 여태껏 살아냈었던 것 같다.
모자람의 미덕? 영국의 시성(詩聖) 쉘리의 명시 ‘무질서의 아름다움(Sweet in Disorder)’을 되뇌며 필자는 빗나간 스스로의 모자람을 위로받는데 익숙했었다. 누구에게나 삶은 춥다고 파고드는 안방의 아랫목은 아니기 때문이리라. 맑은 날 삿갓 준비를 게을리 했고 밀짚모자를 겨울에 사두지 못한 때늦은 후회의 연속, 패자부활전이 삶의 전부이기도 했고.
筆者 스스로 수여한 爵位 ‘한국해운 평생홍보대사’에 자부심
그래서인지 필자는 나이들면서 지식에 걸귀가 들린 듯 늘 배움에 갈증을 느끼며 산다. 살아가면서 아무리 애를 써도 성차잖아 지식의 섭취욕으로 열을 올리며 발을 동동 굴려도 더욱 목마르다. 전문서적을 읽고 지식을 쌓기에는 너무 늦었고 그냥 넘기려니 조바심으로 안절부절 못 하면서도 신이 만든 물보다 인간이 만든 술을 더 사랑하며 살아 온 것도 사실이다.
싸레기 지식 동냥을 위해 우선 손쉬운 출근길 전철신문 포커스, 메트로, AM7, 노컷뉴스에서부터 퇴근길 선반 위의 시티라이프, 이브닝뉴스에 이르기까지 몽땅 구해서 그것도 밑줄을 치며 아등바등 읽어낸다. 일간 종합지, 경제지, 월간 잡지 등 세상사는 데나 직장 업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줄 알면서도 습관적으로 부스러기 상식 하나라도 놓칠세라 제목이라도 눈에 익히려고 안간힘을 쓰는 자신이 우습기는 하다.
그래서 채권 장수 같은 가방 속은 항상 너덜너덜한 신문으로 꽉 차 있고 늘 못 다 읽은 신문들은 아파트 거실이나 사무실 책상에도 수북이 쌓여 있다. 연휴가 와도 등산 한번 못가며 제대로 정리도 않고 가위질만 일삼는 스크랩벽(癖)의 필자이기도 한건 벼는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듯 그래도 NIE (Newspaper in Education)를 통해서라도 잡학박사 학위(?)쯤은 따고 싶은 필자의 노욕 때문이리라.
해운과 관련되는 업종이라면 어느 누구와도 어울려 하나 되려는 동질성을 추구하다보니 비록 짝퉁이지만 외형으론 닮은꼴이 돼 갔고 그러다 보니 진품흉내를 내며 그럴싸한 포장으로 양화를 구축하는 악화로 변해갔다. 소속이나 조직의 기능상 약방의 감초같이 업무의 중심에서 여러가지 일을 충직한 머슴처럼 시키는 대로는 할 일을 했다고 생각된다.
60년대 말부터 40년이 훨씬 넘게 가슴이 쪽빛 바다색깔로 물들도록 한국해대와 목포해대 등 양개 대학 출신 싱글기수 원로님들을 비롯해서 외항해운업계에 종사하는 중진들을 모시고 입안했던 각종 정책의 수립이나 시행과정에 짝퉁인 필자가 동참하여 심부름을 하지 않은 분야가 과연 몇 군데나 있을까?
그래서 언젠가 필자에게 붙여진 별명이 해양계 출신들의 조커요 와일드 카드였으니 필요시 부르면 언제고 달려가 미력한 힘이나마 거들어, 주요 정책을 풀 하우스나 포 카드로 만들어 오늘의 세계 5위 한국해운에 일조를 했다면 지나친 자찬일까?
지금까지 두서없이 적어왔듯이 바다와 배 그리고 해운이란 깃발아래 그것도 가짜, 모조품, 유사품, 위조품, 이미테이션, “무늬만 해기사”에 “짝퉁”으로 내로라하는 기라성 같은 진품들과 어울려 살아온 지난날을 회상하며 필자는 전가의 보도처럼 들먹인다. “한국해운 근세사 50년은 이 머릿 속에 있소이다!”하며 한전앞에서 촛불을 켠다.
그리고 하찮은 소직으로 위축이 될 때면 언제나 타천자천으로 필자가 스스로 수여한 작위 “귀하를 대한민국 외항해운계와 양대 해양대학 및 해양한국의 국내외 평생 홍보대사로 명하노니 최후의 그날까지 최선을 다 할지어다!”를 머리에 떠 올린다. 그 어느 업종보다 보람 있었고 그 어떤 직위보다 자랑스러웠으며 그 무슨 영예보다 영광스러운 “짝퉁 해기사”의 인생도 이제는 저문다.
감격·감사의 에필로그 “짝퉁해기사 40년세월 후회는 없다!”
강한 자가 오래 남는 게 아니라 오래 남는 자가 강한 자라고 했다. 그러나 해운업은 누가 뭐래도 “바다로 세계로 미래로!”라는 슬로건 아래 오늘의 한국경제를 이룩한 도약의 발판이며 국민경제의 생명선이라는 이름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값비싼 명품이요 고귀한 브랜드요 귀중한 보석이기에 ‘짝퉁해기사’로 살아온 필자의 해운계 40여년 세월에 후회는 없다.
끝으로 칠순여행도 미룬 채 이같이 지난날을 뒤돌아보며 필자의 초라한 삶을 해운과 연관지어 졸필을 연재할 수 있게 기회를 주신 KSG 발행인 김명호 회장님과 정창훈 전무이사 겸 편집국장님 그리고 정성껏 교정과 감수로 도와주신 이경희 차장님을 비롯한 KSG 전 스텝들에게도 큰 절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멀리 휴스턴과 마닐라에서 매번 격려를 보내준 김진석 한태희 친구야 참으로 고맙다.
많은 관심 보여주신 해운계 원로님들과 선후배님들, 업계 임직원님들, 만날 때마다 격려의 말씀 너무나 감사하고 특히 매회 자료제공에 협조해 주신 한국선주협회 김영무 전무이사님을 비롯한 각 팀징님들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씀 전합니다. 여러분 모두 부디 건안 하십시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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