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2-09 15:20
KSG에세이/ 무늬만 海技士 평생을 짝퉁으로 살며 얻은 벼슬 “해운계 甘草” (27)
서대남 편집위원
G-5 海運韓國을 돌이켜 보는 추억과 回想의 旅路 - (27)
필자가 말로만 듣던 수학교사 출신의 이창호 선배 교우와 최호숙부인 내외가 무인도 개척 정신으로 손수 이룩했다는 남국의 정서 무르녹는 말로만 듣던 그 섬 위도는 찾아가는 바다와 파도와 기암, 바윗돌 사이의 동굴과 뱃길 모두가 목가적 동화요 금아(琴兒) 피천득이 일컫는 청자연적(靑磁硯滴) 같은 수필이며 몽테뉴와 베이컨의 에세이 그 자체였다.
그 후로도 주말은 가끔 영남의 알프스라는 가지산 천성산 등 가까운 산을 찾기도 했다. 자연은 아름다워도 거만하지 않고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으며 귀천도 따지지 않고 빈부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걸 배울 수 있는 스승이었다. 게다가 찾아오는 목적을 알려고 하지도 않으며 찾는 모든 이에게 격려와 위로로 답해 주지만 인간의 절대 고독은 함께 나눌 수 없는 숙명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았다.
97년 釜山지부·런던사무소 폐쇄 常務職 없애고 직원도 감원
97년이 저물자 IMF 체제는 단기 외채를 갚지 못할 만큼 유동성이 부족한 위기에 몰리면서 성장이나 물가와 국제수지 등 기초경제 여건이 비교적 건실함에도 불구하고 경제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대기업이 연쇄부도를 내고 금융기관은 거액의 부실채권을 떠안는 사태로 번지는 악순환을 겪으며 해운도 카오스상태에 패닉현상은 날이 갈수록 심해갔다.
신조 BBC 확보가 전무하고 고금리에 부채비율의 급격한 상승으로 선박확보가 불가능하게 되자 협회는 KFX자금(정부보유외환) 이용과 낯선 EXIM BANK(수출입은행) 자금 이용을 추진하는가 하면 BOK(한국은행)에도 기존의 사용 중인 KFX 자금의 상환 유예를 건의하는 등 갖은 방법을 동원하며 경색된 돈줄의 숨통 터기에 온 힘을 쏟기 시작했다.
조직적인 경제활동과는 거리가 먼 일용직의 근로자들도 심리적인 위축과 실직으로 소비가 축소되고 정서적으로 황폐해져 앵겔지수가 다락같이 올라가고 호구지책의 일자리마저 잃게 된 서민들은 황량한 동토의 툰드라 지대에 내동댕이 쳐진 처절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걸 실감할 수가 있었다. 시쳇말로 장난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그 해에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사상초유의 흥행기록을 올리며 호화여객선 침몰의 참상과 비극적인 사랑을 테마로 한 영화 타이타닉 (Titanic)을 다시 만들어 셀린 디온이 주제음악 ‘My heart will go on’ 을 불러 쌍끌이로 흥행에서 왕대박을 터뜨리게 되자 케이트 윈슬릿과 캐스팅 롤을 맡은 신예 ‘레오나르드 디카프리오’ 의 이름을 따서 IMF하의 빚더미를 풍자하여 “내 오늘도 언제야 빚 갚으리오(디카프리오)”란 유행어를 만들어 인구에 회자 시켰던 기억이 인상깊게 남는다.
올 것이 온 것일까? 드디어 운명의 날이 난데없이 닥쳐왔다. 1998년 1월20일. 한국선주협회는 정기총회를 열고 청천벽력 같이 부산지부와 런던사무소를 폐쇄하는 한편 상무이사제를 없애고 직원들도 일부를 감원하는등 IMF체제 하에서 해운업계의 구조조정과 슬림화를 위해 협회를 타겟으로 희생양의 시범을 보이는 신호탄을 올렸다.
선사들이 비상사태를 맞아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선 구조 조정이, 그리고 절약과 내핍이 필수적인 것까지는 이해가되지만 그렇다고 메인포트 부산항의 심부름센터(?) 선주협회 부산지부를 폐쇄하겠다고 결의한 조치와 처사는 누구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기발한 발상이었는지는 불문가지로 하고도 도저히 납득이 가지않는 졸열한 처사로 생각돼 분통이 터졌다. 찌른 송곳은 멀쩡해도 찔린 가죽은 상처가 컸다.
釜山근무 3년이 30개星霜 월급쟁이 終着驛 될 줄이야
상무이사 자리를 폐지하여 임원 셋을 없애는 것까지는 상당한 예산의 절약효과와 외항해운업체의 고비용 임원급을 솎아내는데 기여할 수 있고 솔선 수범을 보이는 상당한 전시효과도 있어 차제에 비생산적인 조직의 환부를 도려내는데도 빌미를 삼을 수 있음직도 했다.
그러나 비록 필자의 숟가락을 없앤다 해도 섭섭은 하나, 이해가 갔지만 선박대리점협회나 검수검정협회 하역협회 등등은 같은 여건에서도 부산지부를 그냥 두는데 규모나 예산의 축소같은 차선책이나 최후의 궁여지책을 전혀 고려치 않고 즉각 폐쇄라는 극약처방을 내려야 할 정도로 그리도 쉽게 지울수 있는 하부 조직이라면 36년전 1962년에 부산분실이란 이름으로 문을 연 까닭은 뭔지가 궁금했다.
또 임기가 만료된 임원은 총회에서 재임명을 결의하지 않으면 그 날이 제삿날(?)이 되지만 한방에서 3년을 함께 보낸 부산지부의 차장급 과장급과 여직원 그리고 본부의 부장급을 비롯한 직원들은 아닌 밤에 이게 무슨 홍두깨요 날벼락인지 기가 막히고 억장이 무너지는 노릇이었다. 지휘관을 잘 못 만난 탓이요 모진 놈 곁에 있다가 벼락을 맞은 꼴이라고 무척 필자를 원망했으리라.
3년전 부산에 내려올 때 백의종군 정신으로 죽은듯이 지방근무 3년을 무사히 마치면 서울로 가리라던 야무진 꿈은 서울은 서울이로되 보따리 싸서 일산 호수공원 벗삼으며 약관 57세에 집으로 가서 노인정을 찾아 가야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삼천갑자 동방삭이도 저 죽을 날은 몰랐다더니 손가락에 장을 찍어도 이 난국은 벗어날 대책이 없었다.
離別酒 “들어라 마지막 잔이다. 날이 새면 이 항구도 이별이란다”
당시 IMF가 바로 “I Am F”라는 말로서 ‘F학점의 낙제생’에 루저요 못난이라는 뜻이라고 나누던 농담의 방정식 주인공에 바로 필자가 첫 케이스로 대입되리란 예상은 천만 뜻밖이었으니 말이다. 기업들은 신규채용을 전면 중단했고 심지어 직장의 젊은이들도 예고없는 해고가 예사였으니 임원으로 세 임기를 장수한(?) 상무이사가, 평소 회갑을 퇴임이나 정년의 기준으로 생각해 오긴 했으나, 예순에 3년을 못 채운 아쉬움을 들먹이는 건 한창 분수를 모르는 파렴치한 넌센스 였으리라.
하지만 넓은 바다와 거대한 선박에 규모 큰 선사들 그리고 고품위 인격들의 마인드는 해운장래를 두고 필자가 보기엔 분명 종지에 담은 좁쌀이었다.
마침 부산에 같이 내려와 근무해 왔던 금융계의 J군과 K군도 동시에 퇴임이 결정되어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들어라 마지막 잔이다. 날이 새면 이 항구도 이별이란다. 갈매기 비에 젖어 날개 시려 울고 있다. 하룻밤 풋사랑이 왜 이다지도 나를 울리나. 잘 있거라 잘 가거라 미련두고 나는 간다.”와 “돌아와요 부산항”을 열창하며 회원사와 해운계 지인들과 송별회를 일과 삼아 연일 술자리를 벌였다.
복근을 만든다고 평행봉 철봉에 역기까지 열심히 들던 태종대와 조깅코스로 새벽등산을 다니던 봉래산에서 부터 부산 일원의 광안리와 해운대 성사포를 비롯하여 일광 기장과 자갈치 횟집을 두루돌며 친구들과 어울려 한잔술에 시름을 잊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기억은 지금 돌이켜 봐도 그 처연한 몰골에 눈시울이 젖는다.
길 잃은 에뜨랑제나 보헤미안이 된 기분으로 때로는 정처없는 유랑의 무리나 집시처럼 비록 필자 혼자만이 겪는 소외나 퇴임은 아니로되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그간 짧은 부산 3년에 반추되는 생각은 왜 그리도 많았든지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치는 추억속 애환이 밤마다 동삼동 주공아파트 구석구석에 가득히 쌓이곤 했다.
참대 갈대 엇 벤 길을 신벗어 들고 새 날듯 친정집 가는 며느리 기분으로 부산서 3년근무 마치고 서울로 복귀하는 날은 미리 챙겨 싸둔 살림살이 타이탄에 싣고 조수석에 앉아 오밤중에라도 홀연히 경부고속도로 타겠다던 소박한 꿈은 멀리 날아간 파랑새가 되고 만 것이었다.
가끔 주말 심야에 논스톱으로 밤길을 달려 경부간을 눈감고도(?) 오르내릴 때 퇴직하면 경부간 총알택시 기사를 하자던 생각이 문득 나기도 할 정도고 그러나 한가지 다행했던 일은 해양계 대학 졸업예정자인 맏 상제(?) 녀석이 그 해 하반기에 새로이 출범하는 해양환경 관련 공기업의 공채모집에 당당히 합격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인생여정 삶의 릴레이랄까. 일자리 이어달리기 해운계 트랙경기에서 부자지간에 정확한 바통터치를 하여 메달권에 입상을 한 셈이었다.
취업난 풍자 2태백, 4오정, 5륙도 流行 직장만 구하면 SKY
IMF 때문에 대학을 졸업하고도 하늘의 별따기로 취업이 너무나 어렵던 시기라 꿩 잡는게 매였기에 취업이 최고의 장땡에 관심사였다. 당시 취업 재수생이나 졸업 예정자 중 급여나 대우에 상관없이 아무 곳이건 직장을 잡는 사람이면 무조건 SKY대학 출신으로 불렸던 것이다. 유행어 2태백(20대 태반이 백수), 3팔선(38세가 퇴직선), 4오정(40대나 50대가 정년), 5륙도(50대 60대까지 일하면 도둑놈)가 그 때의 암울했던 취업배경을 잘 풍자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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