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1-19 11:00
KSG에세이/ 무늬만 海技士 평생을 짝퉁으로 살며 얻은 벼슬 “해운계 甘草” (24)
서대남 편집위원
G-5 海運韓國을 돌이켜 보는 추억과 回想의 旅路 - (24)
그간 영업과는 거리가 먼 행정업무 언저리에서 늘 일해 왔으나 현업부서 부산에 온 후로는 별도로 관심을 쏟지 않는 한 이상하게도 아침 저녁으로 바다와 부두와 배 그리고 선적이나 하역현장을 보고 컨테이너를 실은 섀시들이 분주히 오가는 부둣길을 지나며 맞대고 살면서도 지금 해운업계가 어느 방향을 향해 가고 있고 어떤 형편에 처해 있으며 또 어느 규모로 운영되고 있는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거시적 시정(視程)은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평소 어느 분야나 부서에 근무했건 간에 해운계에서 밥벌이를 했다면 자기가 수행했던 업무를 200자 원고지 30매 정도는 불시 기고를 하거나 준비된 원고 없이 하시라도 100분 강의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타 업종 종사자들이나 후진들에게 체면이 서지를 않겠느냐고 작심해 왔던 필자의 지론이 말짱 도루묵이 되고 황폐해 가는 것 같아 자괴감마저 느껴지곤 했다.
현장에선 해운의 이론적 체계화나 장기전망을 정립한다는 것은 일상 업무와는 거리가 멀었고 하루하루를 아무 탈 없이 지나면 최고였기에 로직(이론) 추구 자체가 돼지목에 진주요 쇠귀에 경읽기였다. 지방 근무를 오래하면서 낫놓고 기억자만 생각하는 구조로 두뇌나 사고가 단세포화되는 듯 했다.
“원고없이 百分강의 가능해야 海運人 자처할 자격”이 所信
지방청의 항무과나 부두운영과에서 실시하는 항만사용이나 선석회의에 참석하거나 웨이버접수 여부를 체크하는 일이나 예도선과의 현장 마찰을 조정하는 일은 단순히 선주들의 이익을 프로텍트 한다는 입장에서 가재가 게 편만을 들거나 내 논에 물대는 아전인수 격으로 처신해서는 결코 해결될 일들이 아닌 게 수두룩 했던 것이다.
임의도선이건 강제도선이건 선박의 입출항시에 필수적인 사용예선 마력수를 두고 벌이는 신경전만 해도 장난이 아니었다. 라싱이나 라인핸들링 작업을 두고도 가장 중요한 안전우선 원칙보다도 비용절감을 고집하는 선사측과 맞서 선주측 비용지출은 아랑곳 없이 규정이나 원칙에 의해 수입 측면만을 고집하는 사례가 충돌을 빚었다.
컨테이너 전용부두 CY(컨테이너장치장)의 프리타임(무료장치기간) 부여 일수를 두고 일삼던 실랑이 하며 예도선 정계지 정의 하나만을 두고 벌이던 논쟁과 옥신각신도 다반사였다. 당사자끼리 해결을 못보고 공식적인 문제로 삼을 경우에는 이를 다독이며 양보와 협상을 이끌어 내는 중재기능 역할을 다하는 게 현장에 자리 잡은 부산지부의 주된 일과였던 것이다.
95년 外航商船隊 천만톤 돌파로 世界海運 10위권 도약
95년만 해도 세계 교역량 46억8천만톤에 우리나라 무역량이 4억 2,500만톤에 달해 전년비 13.4%가 늘었고 국적선 적취율은 23.3%를 기록했다. 연중 선박 확보량도 신조선과 중고선 도입을 합해 1백54만톤에 달했고 그해 9월에 사상 최초로 외항선대 규모가 372척 1,054만톤으로 1,000만톤을 돌파하고 세계 10위권의 해양강국으로 발돋움 했다.
협회도 IMO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9월부터 런던에 사무소를 개설하고 초대 현장소장에 정해용 국제부장을 임명, 파견했고 한국도 IMO 이사국으로 재선임되어 해운의 국제적 지위향상에 큰 걸음을 내딛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도 서울이나 부산 모두 선주단체의 위상은 높낮이를 따지기 이전에 해운단체 중에서도 그 규모나 예산면에서도 초라하기 이를데 없었고 행정부 4급 과장이나 총경급 경찰서장에도 못 미치는 비교 열위적 파워로 매김되는 건 이해가 안갔다.
무역이 경제 젖줄인 우리나라 수출입화물을 누가 실어날라 먹고 사는데? 그나마 왕년에 장차관급 상투잡던 알량한 출입기자 시절의 못된 기질이나 아랫입술 씹으며 이빨까는 악질 근성이라도 들이대지 않으면 아예 업계 정의는 도처에서 실종되고 먹혀들지가 않는 상태였다.
그리고 당시 ‘본사 출장’ 혹은 ‘확대간부회의 참석’ 이란 형태로 서울에 갈 수 있는 여비규정은 항공권 구입비를 포함하여 한달에 2회, 즉 격주 기준으로 책정된 예산의 범위 내에서 서울에 갈 수가 있게 되어 있었다. 당시는 지방에 근무하는 점소장이나 기관장들이 이 같이 정기적으로 상경하는 행사를 두고 해학적인 우스개로 ‘화분 물 주러 가기’ 혹은 ‘의무 방어전 출정’ 등으로 희화화 했던 풍류와 향수는 아마 지금은 거의가 고희나 희수를 넘기기도 했겠지만 외롭게 지방근무 하던 뭇 샐러리맨들의 애환이 깃든 인생 한 때의 영원한 노스텔지아와 추억으로 남았으리라.
따라서 필자가 부산 근무 후 낙서 삼아 우스갯 글로 사이버 글방에 올려 네티즌 들로부터 엄청난 웃음을 자아냈던 “화초물주기(*)” 가 대충 생각난다.
隔週로 京釜오가며 지방근무 哀歡 달래던 에피소드 못잊어
샌드페블(*) 봄마다 베란다 화초 분갈이 때마다 빙그레 웃고
경부간 오가며 화초 물주던 부총(*) 시절 생각나 낙서함다.
한때 지방 근무하며 지내던 시절의 애환담긴 우스개지요.
오해 마시고 제가 키웠다는 화초얘기 함 들어 보실래요?
본 후엔 바로 지우세요 옆지기들께 정보새면 큰일 나니까.
지금 옆방 권사님이 정성들여 가꾸는 화초를 보다가 문득
옛 부산 근무 외롭던 시절 화초 물주던 생각 절로 나는군요.
업무에 시달리고 홀애비 특유의 외로움에 날마다 지치면서
그래도 일주 무사히 마치고 금욜밤 기차 아니면 승용차나
토요 오후편 비행기로 화초 물주러 서울로 향하던 군상들.
두고온 화초 시들지 않게 급수전 관리에 물통도 바짝 달고
서울가 정성들여 물주고 일욜 밤차나 월욜 새벽 비행기로
다시 한주 맞아 부산 근무지로 향해야 하는 서글픈 부총들
휴식이 오히려 과로이기도 한 주말 의무행사 화초 물주기
그래도 그 시절은 급수전 물 마를 날이 없었으니 천만다행.
화초도 종류나 나이따라 물주기도 가지 각색이라 더군요
한달에 한번 짜리 보름에 한번 일주에 한번짜리 등등등
그러나 꽃의 습성따라 적어도 이틀에 한번 짜리도 있고
심지어 매일 어김없이 물을 줘야 하는 화초들도 많아서
어떤 직장인은 화초 물주러 매주 상경 힘드니 하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아예 화초를 화분채로 부산으로 옮겨서
양지바른 아파트 베란다에 두고 지극정성 흠뻑 물을 줘도
넘치게 수분 흡수하는 화초 주인은 물주다 쌍코피가 났고
대개는 보름이나 한주에 한번씩 물을 줘도 갈증을 면하나
과하게 물을 필요로 하는 화초들은 키우기가 참 벅찼지요.
부산서 엉뚱한 화초에 물을 주고 상경후에 재고가 모자라
집수 비상계획을 수립하는 촌극이 빚어지기도 했고 이를
해명차 진땀 뺀 야화는 대하소설로 엮어도 몇권이 될걸요
실제 키워보면 인화초란 예민해 아무리 정성들여도 힘들고
상경 낭군을 용의자 취급 홀키는 눈초리 피하기도 어렵죠.
그리고 가끔은 이웃 화초도 돌보며 자원봉사 하던 분들이
부산으로 옮긴 제집 화초때문에 못 돌봐 의리가 없다느니
핀잔도 많이 듣고 해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는 등등으로
인화초 정성들여 키우기 후일담이 자주 회자되기도 했죠.
안전빵 서울서 온 부총을 먹이감으로 삼는 암캐도 많아서
저도 60년 넘게 해묵은 분재 하나를 옆방에 키우고 있지만
당시 딴집 화초 자원봉사 사실이 발각되어 곤욕을 치렀고
아직 생활비 인상용으로 옛 전과사실 들먹여 죽을 맛인데
한번실수는 병가지상사가 절대 안통하는게 이웃 비밀봉사
돌부처도 돌아 눕는단데 한번 실수로 평생 발목 잡히지요.
특히 요샌 온갖 정성 다 들여도 시들 나이에 악만 남아서
물주기보다 비료나 화분 장식비용이 많이 들어 고민이나
허나 갓 자란 30년생 40년짜리 새 것으로 바꾸기도 힘들고
시쳇말로 하늘도 도저히 그 속을 이해하기 힘든게 여자니
화초를 키운다는게 더욱 묵은 화초 흉치 않게 돌본다는게
얼마나 어렵고 골치 아픈가를 모두 실감하며 살고 있겠죠.
그래도 애완용 보다는 화초가 훨씬 낫다는 얘기가 있으니
모두들 조강지처 묵은 화초 한 그루에 지극정성 쏟으시고
화초 물주기가 힘들어도 비아그라 시알레스 신세는 금물
애완용은 경제사정과 건강 배려 사지도 키우지도 맙시다!
<‘부총’ 이란 당시 타지 근무자가 ‘부산에 오면 누구나 총각이 된다’ 에서 유래한 ‘부산총각’ 의 준말. ‘화분 물주기’와 ‘의무방어전’은 멀리 떨어져 직장근무를 하는 남편들이 부인에게 정기적으로 사랑을 해 준다는 뜻. ‘샌드페블’은 필자가 인터넷 카페에서 사용하는 닉네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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