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7-22 09:26
KSG에세이/ 무늬만 海技士 평생을 짝퉁으로 살며 얻은 벼슬 “해운계 甘草”(7)
서대남 편집위원
G-5 海運韓國을 돌이켜 보는 추억과 回想의 旅路 - (7)
80년2월말경 퇴근길 서소문동 배재빌딩 사무실 근처에서 간부 몇명과 소주를 한잔 하던 중에 인사권자인 최전무이사 왈 느닷없이 불쑥 “서부장! 당신이 낼부터 토달지 말고 해무부를 좀 맡아 줘야겠어!” 아니 이게 무슨 아닌밤 홍두깨며 날벼락이란 말인가?
“네? 무슨 말씀이신지...다시 한번?” 못 들었을리야 없었겠지만 믿기지 않으니 우선 귀를 의심할수 밖에 없었고 순간 아찔할수 밖에.
낯선 곳에 왔지만 한 부서에서 7년여가 지나니 이제 조사부장으로 이골이 나서 눈감고 휘저을 판인데 난데없이 해무부장이라니 무슨 운명의 장난으로 뒤집어질 판.
당시는 윗선 뿐만 아니라 하위 직급이나 부차장급도 관계부처의 임시직이나 서기 및 주사나 사무관급이 산하단체로 낙하산급은 아니어도 파라솔(?) 정도를 타고 내려오기가 다반사였고 작은 단체의 경우는 업무수행 능력과는 상관없이 서기관급이면 전무정도로 내려보내는게 예사였을 때다.
어차피 해기사 출신이 아닐진데 파라솔급으로 내려와 해무를 맡았던 담당부장이 있는데도 적임자가 아닌 탓일까 아니면 필자가 신선놀음으로 도끼자루를 썩히고 있다고 밉상으로 생각한 까닭에설까 여하간 바꿨으니 갑자기 뾰족한 묘수가 없다면 자리를 옮겨 앉는 수 밖에 없는 노릇. 이튿날 1980년 3월1일을 기해 울며 겨자먹기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친다는 기분으로 해무부장 자리로 냉큼 옮겨 앉긴 했다.
어린시절 고향서 한두번 낙동강 나룻배를 타고 먼산 나무하러 갈때와 서울와서 창경원서 보트 한두번 타본 게 승선경력의 전부인데 해양계 대학을 나와서 상당기간 승선경력을 쌓고 그것도 선장이나 기관장을 거친 중견 해기사 출신이 맡아야할 선주협회 해무부장 자리를 갑작스레 맡으라니 브릿지에 올라 본선을 당장 운항하거나 엔진룸실 책임을 지는 일은 아니로되 당시 해무분야에 산적한 업무를 일람하노라면 눈앞이 캄캄했다.
그리고 생판때기 필자보다 능력있는 선기장 출신을 한사람 뽑으면 될텐데 뜬금없이 왜 비해기사로 자리를 바꾸라는지 그저 그 심뽀(?)가 야속하기만 했다.
알아야 면장을 한댔는데 알고서도 어려울, 배를 바다에 띄워 돈을 버는 해운기업의 가장 핵심적인 근간이 되는 본선자체에 대한지식이나 이들 운항요원들의 교육훈련 및 선박과 선원에 관련되는 각종 법령 및 안전문제와 보험문제 그리고 국제항로에서의 제반협약 이해 및 대책수립 외에 산별노조 중 10만 조합원이란 막강 선원노동조합을 상대로 사용자 측의 노사대책 수립시행 등 제목만 보고도 머리에 쥐가 나는 판이니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는 노릇이었다.
궁하면 통한다? 천만에! 이건 턱없이 그럴 사안이 아니었다. 본선과 해상경험이 풍부한 해기사 중심으로 운영되는 해무위원회를 소집한 협회의 해무부장이 내용의 이해나 대책수립은 고사하고 모든게 첨 듣는 용어와 내용인데다가 더하여 영문약자나 이니셜로 표시하고 대화를 해대니 쇠귀에 경읽기로 도대체 말귀를 알아 듣지를 못해 필자가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고무새총도 안 쏴 본 나에게 LMG나 박격포를 안겼으니 우선 어디를 당겨야 발사가 되는지를 알 길이 없는 건 당연지사 일수 밖에.
앞서도 언급했듯이 70년대를 지나 80년대 부터는 본격적으로 급속한 수출신장에 따라 우리의 외항 선복량이 급격히 늘어나는 데다가 안전을 중시하는 국제해운시장도 IMO및 ILO라는 세계해운 총독부(?)를 만들어 UN기구가 직접 관장하는 체제하에서 세계해운이 새로이 개편되는 과정이라 STCW를 비롯해서 SAR, MARPOL, CORLEG 에 FGMDSS, PSC니 해서 운항안전과 규제를 주내용으로 하는 각종 국제협약이 셀 수도 없이 쏟아지던 때였으니 설상가상이란 말이 이럴 때의 필자같은 경우를 두고 생긴 말이라면 적절하겠다.
그래도 다행이 1, 2등항해사 출신의 계장 과장 차장직의 해기사 출신들이 충실히 받춰줘 앞가림을 하며 닥치는 업무를 꾸려나가기 시작은 했으나 전문분야의 내용을 잘 모르는 부서장이 문제점으로 야기되는 맡은 바 업무를 원만하게 수행하는 데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도둑질도 배워야 한댔기에 우선 수능시험 공부하듯 해양계 대학의 양대산맥 한국해대 목포해대 교과목과 커리큐럼 개론을 제목만이라도 익혀 서당개가 풍월을 읊고식당개가 라면을 끓이는 식의 어깨너머 공부를 시작함과 아울러 선사의 해기사 출신 간부들은 모두가 스승이란 기분으로 동냥공부를 시작하기로 작정하고 암기위주의 주입식 벼락치기 공부로 돌진하는 엔테베 작전에 돌입했다.
독한 맘을 품고 불치하문(不恥下問)이려니 아무에게나 모르는건 물어서 배우고 틈 나는대로 관련자료의 제목만이라도 익히기에 온 정성을 기울이고 업계는 물론 관계당국이나 학계등의 해기인맥을 파악하고 그 분위기에 동화되려고 노력을 기울이며 온갖 정성을 쏟았다.
그러니 업무분야별로 지금은 이미 은퇴했거나 각계 거물급으로 활동하고 있는 하선해서 육상근무를 하는 해기사 출신들에게 쪽집개 과외를 일삼았으니 모두가 멘토에 스승이요 지금은 은사인 셈이다.
그렇게 수삼년 제 앞을 못가리며 짝퉁생활을 계속하다 보니 꾀도 생기고 요령도 늘어 드디어 반풍수가 지관인양 행세하는 비법을 터득하게 되고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니 해기사들과 어울려 완전히 그 쪽 족보에 편입되는 기현상을 빚기도 했고 당시 내로라 하는 싱글 기수들과 일하며 심부름을 하다보니 한국해운 선박 선원정책의 모든 분야에 실무적으로 깊숙히 개입하지 않을 수가 없게되어 가는게 아닌가.
승선후에 육근을 시작해 협회에 일보러 오는 해기사들이나 일반계 출신들이 해무부, 그것도 본선이나 해기사 관련 행정 일체를 맡은 협회의 해무부장이고 보니 짝퉁인 나더러 으례 해기사려니 예단하고 “몇 기 되시느냐?”는 질문에는 한결같이 상투적인 모범답안이 준비 돼 있었다.
첫번째 답은 “난 1, 2기 싱글기수 부터 모든 기수에 이르기까지 필요에 따라 어느 기수에고 갖다 끼워도 되는 조커 기수요 그때 그때 다른 외일드카드 기수이외다”였고 상황에 따라 두번째 답은 좀 더 구체적으로 “42년 1월생이니 한국해대로 쳐서는 빠르면 16기, 늦으면 17기쯤 될 테고 목포해대로 말할것 같으면 8기나 9기 상당이겠지만 본인은 짝퉁이니 진품과 구별해서 전자로는 16.5기, 후자로는 8.5기 쯤으로 알고 있소이다”라며 안기수(비 해기사 출신을 지칭하는 해운계 슬랭) 출신이 소수점을 찍어 차별화된 별난 기수를 만들어 내기도 했던 에피소드가 압권이었고 가까운 지인들 사이엔 널리 알려져 이 해프닝은 지금도 필자 특유의 좌중 우스갯소리로 통한다.
사실 제대로라면 한국해대 17기에 목포해대 9기쯤 일텐데 중간에 한해 쉬느라 늦은데다가 고교동기들의 느즈막 진학으로 한국해대 19기까지가 있는터라 필자의 기수는 16기에서 19기까지를 오르내리는 롤러코스트 기수나 구기종목 스포츠의 승패율 따지기 ‘경우의 수’와 비슷해 개그프로 웃찾사의 ‘그때 그때 달라요’를 방불케 조삼모사 하는 통에 본인 스스로도 정확히는 모르고 오늘을 살고 있는 셈이다.
여하간 당시는 급격히 늘어나는 선복량이 필요로 하는 해상직원 수요예측과 이를 충족시키는 인력의 교육훈련을 감당할 양성기관의 설립대책 논의를 위해 수차례에 걸쳐 이를 협의하고 결정하는 협회 해무위원회를 열어 각사의 사장과 중역들이 머리를 맞대고 묘안을 찾기에 골몰했다.
그래서 그 때를 전후해서 한국해대 전수과의 부활, 부산과 인천의 선원학교와 해기연수원의 설립, 해외취업선원의 규제와 인천해양대학 신설 등을 논의했고 급기야 신문광고를 통해 단기코스의 해기사를 양성하여 각 선사에 배정하고 부산과 인천 선원학교를 신설해서 고등학교 과정의 해상직원을 교육시켜 각 선사에 배정하던 기억이 새롭다.
한가지 참으로 요상한건 해운시황의 요란한 전망이 대개 빗나가기가 일쑤듯 거창하게 수립한 해기사 수요예측도 해당 시점에 가보면 거의 맞아 떨어지지 않는 징크스가 반복되는건 무슨 조화인지 지금 생각해도 그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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