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가, 수익성’ 성공여부 가늠자…용대선 사슬도 걸림돌
●●● 드디어 정부가 해운업계를 대상으로 구조조정의 칼을 빼들었다. 정부는 2월19일 금융위원회 진동수 위원장의 브리핑을 시작으로 해운업계 구조조정에 착수했음을 밝혔다. 진 위원장은 이날 “관계부처로 구성된 실물금융지원협의회를 통해 업종별 구조조정의 긴급성, 전체적인 방향 등을 점검해서 채권금융기관 중심의 구조조정 때 반영토록 하겠다”며 “현재 해운업에 대해 관계부처 간 구조조정 방향에 대해 협의중”이라고 말했다.
구조조정 방향에 대해선 “구조조정 기업의 자산 매각을 활성화하거나 지분 인수 등을 위한 구조조정 펀드의 설립을 활성화토록 하겠다”고 말했다. 산업은행 등 공공기관 등에서 먼저 시작하고 필요시 사모투자전문화사(PEF)의 제도 개선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또 “자산관리공사(캠코)를 중심으로 금융기관들의 부실채권 매입을 확대하도록 하겠다”며 “은행이 보유한 가계 및 특정부문 기업대출 등의 부실채권도 인수·정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캠코가 금융권 부실채권 인수
정부는 캠코의 부실채권 인수 여력 확충을 위해 6천억원인 자본금을 3조원까지 최대 5배 가량 늘린다는 계획이다. 또 한국은행 10조원, 산업은행 2조원, 기관 및 일반투자자 8조원 등 총 20조원 규모의 은행자본확충펀드를 조성해 이중 12조원을 3월부터 은행권에 지원하기로 했다. 이 자금은 은행이 중기 신규대출이나 만기연장 등 실물경제 지원과 워크아웃 기업에 대한 신규자금 지원 등 기업구조조정 지원과 부실채권 정리에만 쓰여지게 된다. 사실상 외환위기 이후 포괄적인 의미의 공적자금이 다시 부활하는 셈이다.
결국 정부 구상은 금융권을 직접 지원하는 한편으로 기업들에겐 자산이나 계열사를 정리토록 해 간접적인 유동성 지원을 한다는 방침이다. 다만 해운업의 경우 글로벌 비즈니스란 산업 특성상 건설·조선업처럼 등급을 매겨 아웃라인을 정하지는 않을 것으로 파악됐다. 채권단이 해운기업의 재무상태를 면밀히 분석해 회생시킬지 퇴출시킬지를 자체 판단하도록 유도한다는 방침이다.
정부 관계자는 “예전 해운산업 합리화와는 다르게 정부의 역할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며 “공정자금을 특정업계에 직접 지원하는 건 현재로선 있을 수 없으며 금융업계를 통한 간접적인 지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관계자는 “정부 차원에서 등급을 나누지도 않고 (회생 또는 퇴출) 기업이 거명되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선박펀드로 선박 해외 유출 막는다
정부는 구조조정 과정에서 선사들의 선박이 헐값에 해외로 팔리지 않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은행법이나 보험업법의 규제를 받지 않고 국내 투자자들이 이들 선박들을 사들일 수 있도록 선박투자회사법을 손질한다는 계획이 그것이다. 유동성 지원 방안으로 논의됐던 ▲우량 업체만을 대상으로 원리금 상환을 유예하는 방식과 ▲선박을 채권화해 유동성을 지원하는 선박 펀드형 중 후자에 속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 한나라당 박상은 의원이 대표 발의한 선박투자회사법 개정안이 현재 국회 국토해양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개정안은 해운업체의 채무상환을 목적으로 매각되는 선박에 투자하는 선박펀드는 ▲존립기간 3년과 대선기간 2년을 면제하고 ▲현물출자가 가능하고 ▲주식추가발행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은행법과 보험업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금융기관의 타 회사 주식보유 비율 규정제한과 연결재무제표 작성 의무도 적용되지 않는다.
선박펀드 조성에 개입되는 대부분의 규제를 풀어 선사들이 즉각적으로 선박 처분에 나설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의도다. 현물출자가 가능토록 한 것은 채권단이 선박을 직접 선박펀드에 출자할 수 있도록, 주식 추가발행 허용은 선박이 억류됐을 때 이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선박펀드에 매각된 선박은 해운사가 다시 용선(Sales & Leaseback)해 영업에 지장을 초래하지도 않는다는 이점이 있다. 이른바 구조조정을 위한 특수한 형태의 선박펀드인 셈이다.
국토해양부 관계자는 “지금까지 국내에서 조성된 선박펀드는 10년 이상의 장기펀드가 대부분이었지만 구조조정시기엔 시장 불확실성이 커 장기투자는 힘들다”며 “현재로선 선박 거래가 일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해운 시장을 관리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국내 투자자들이 선박투자에 쉽게 접근할 수 있어 선박의 해외 유출도 막을 수 있는데다 해운시장 재편도 자연스럽게 이뤄질 수 있을 것이란 계산이다. 정부는 이 같은 선박펀드가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혜택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2012년까지 한시적으로 운영할 방침이다. 국토해양부는 해운업 구조조정이 시급한 만큼 법안처리 순서를 앞당겨서라도 선박투자회사법 개정안이 이번 임시국회에 통과될 수 있도록 사활을 걸고 있다.
1/4 토막난 선가, 선사에 유동성 해갈될까
하지만 이 같은 계획이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중고선을 선박펀드를 통해 매입한다는 것이어서 최근 급전직하한 선박 가격이 걸림돌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해운산업이 심각한 부실에 직면한 지금 선박 가격은 불과 반년 전의 정점일 때와 비교해 4분의 1토막 난 상태다.
작년 상반기 1억4천만~1억5천만달러대를 웃돌던 케이프사이즈 선박(12만~17만DWT급)은 올해 들어 3천만~4천만달러로 곤두박질쳤다. 최근 2천만달러대로 거래된 사례도 눈에 띈다.
파나막스 선박(5만~8만DWT급)의 경우 작년 상반기 7천만~8천만달러의 가격대를 형성하다 최근 2천만~3천만달러대로 떨어졌다. 해운거래가 실종되자 선박 규모가 더 큰 케이프사이즈선 가격과 파나막스선 가격이 비슷해진 셈이다.
선사들은 선박 가격이 크게 떨어진 상황에서 선박을 매각하는 것은 경영개선에 효과가 크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오히려 선사들의 자금난을 부추길 우려도 제기된다. 벌크선사 관계자는 “현재 선박들은 부실정도가 매우 심한 자산들인데 이를 시세대로 매각토록 한다면 선사들에겐 도움이 전혀 안 된다”며 “장부 가격의 반도 안 되는 상황에서 현재 시세대로 선박을 정리하도록 하면 선사들은 파산하고 말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게다가 최근 해운시황이 바닥세를 쳤다지만 여전히 불투명한 상황에서 수익성이 보장되지 않는 선박펀드에 선뜻 투자자들이 나설지도 의문이다. 실제로 선주협회가 지난해 11월 NH투자증권과 선사들의 유동성 지원을 위해 선사들의 선박을 환매조건부으로 매입키로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바 있으나 아직까지 구체적인 계약으로 이어지지는 않고 있다.
NH투자증권 관계자는 “현재 논의가 진행 중이며 신용공여 문제를 다른 기관에 협조를 구하는 단계”라며 “최종 성사 단계에 이르지 않았으며 나중에 (협의가) 틀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용대선 사슬 굴레 어떻게 끊나
해운업 구조조정에서 또 다른 걸림돌은 지금까지 업계 안팎에서 무수히 지적되고 있는 ‘용대선 사슬’에 의한 거래구조다. 선박 한 척을 놓고 여러 선사들이 얽히고설킨 용대선 사슬은 해운산업이 사상 최대의 호황을 구가하던 지난해 상반기까지만 해도 적은 노력으로 높은 수익을 낼 수 있는 선진 해운경영기법으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시황이 반년 만에 사상 최악의 상황으로 고꾸라지면서 이 같은 거래 관행은 해운업계의 부실을 확대시킨 주범으로 지적되고 있다.
지난해 10월말 채무불이행(디폴트)을 선언한 파크로드나 올 2월초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법정관리(기업회생절차)를 신청한 삼선로직스도 용대선 사슬의 피해자이자 가해자들이다.
이들 선사들은 해운거래대금을 받지 못해 파산단계에 이르렀지만 용대선 사슬 구조로 이들과 거래한 제3의 선사들까지도 경영 악화의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컨테이너 선사들이 물동량 하락으로 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도 체감하는 부실의 정도가 벌크선사들보다 덜한 것은 용대선 사슬 거래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으로 지적된다.
이번 구조조정에서도 용대선 사슬 거래에서 하위 단계의 선사들을 퇴출할 경우 회생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됐던 상위권 선사들까지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게다가 산업 특성상 외국 선사들과도 용대선 거래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국내 해운선사들의 정리로 해운업계 부실을 해결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 같은 문제점들은 해운업의 산업 특성을 근본적으로 분석해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한편 해운업계는 정부의 지원이 조속히 이뤄지기를 거듭 촉구하고 있다. 현재 3~4월께 구조조정의 구체적인 내용을 잡는다는 정부 방침도 안일한 생각이라는 지적이다.
선주협회 관계자는 “선박 구조조정 스케줄에 맞춰 (해운업 지원을) 한다고 하면 늦는다. 최근 국제 시장에서 1만~2만달러에도 배를 잡고 있는(억류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이 같은 선사측 부담을 털고 해운업계가 위기를 극복토록 하기 위해선 유동성 지원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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