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1-27 16:07
기획/ “시황 침체보다 악성루머가 더 무서워”
선사들, 루머로 영업·재정 쌍둥이 타격
선박브로커, 거래없어 쓸쓸한 ‘정시퇴근’
●●● 요즘 해운업계는 뒤숭숭하다. 지난 10월 대표적인 근해 정기선사인 씨앤라인이 영업 중단을 선언한데 이어 부정기선 부문 중견선사인 파크로드도 최근 채무불이행 선언으로 사실상 파산상태를 맞았다. 미국발 금융위기에 따른 갑작스런 세계 경기 위축이 화근이었다.
씨앤라인의 몰락으로 한국 해운업계는 외국 하주들의 불신에 맞닥뜨렸다. 특히 일본 하주들은 한국 선사들과 중국 선사들의 열악한 재무환경에 의심을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지난 80년대 초반 해운합리화의 칼바람을 헤치고 40년 역사를 쌓아온 중견선사가 이렇듯 쉽게 영업중단에까지 이른 것이나 중일항로 최대 선사였던 심스라인이 저가 운임이 부메랑이 돼 결국 파산에까지 이른 것을 보면 하주들의 이같은 불신은 타당해 보인다.
해운업계는 파크로드의 경우 규모와 성장세를 놓고 봤을 때 회사 몰락으로까지 이어질 만큼 무분별한 확대에 나선 것은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다. 시황 상승세를 감안해 적절한 투자를 감행했으나 시황이 하루아침에 고꾸라지면서 미처 대처할 수 없었던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란 분석이다.
지난 1996년 해운중개업체로 설립된 파크로드는 지난 2003년 핸디막스급 건화물선을 매입하고 운항에 나서면서 외항해운업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지난해엔 해운업 호황을 등에 업고 매출액이 3배까지 신장한 3천억원에 이르렀다. 하지만 해운업 시황이 고점이던 올해 7월께 파나막스급 선박을 40여척 용선해 사업확장을 시도하면서 유동성 위기에 노출된 것으로 파악된다. 선박 용선을 기점으로 8천포인트대를 기록하던 건화물선운임지수(BDI)가 폭락세를 보이며 800포인트 선까지 떨어진데다 금융위기까지 겹쳐 화물 영업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해운선사들은 제2의 씨앤라인, 또다른 파크로드가 되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다. 최근의 시황에서라면 멀쩡하던 기업도 하루아침에 유동성위기를 맞을 수 있어 우려스럽다. 특히 해운업계에 확산되고 있는 유동성 루머가 자신들을 겨냥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는 상황이다.
케이프사이즈 운임보다 파나막스 운임이 더 높아
유사 이래 최악의 불황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심각한 상황이지만 해운기업들의 사무실 전경은 평소와 다름 없이 안정된 모습이다. 특히 정기선사들의 경우 업무 특성상 분주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B/L(선하증권)을 발급하고 화물 선적을 진행하는 여직원들의 바쁜 일상에서 최근 업계를 강타하고 있는 불황의 그늘은 쉽게 찾아보기 어려웠다.
영업 일선에서 뛰고 있는 영업 담당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책상에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는 영업서류 다발을 뒤적이거나 화물 유치를 위해 회사 밖에서 동분서주하는 모습은 지난 호황기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표정 한 켠에서 언뜻언뜻 비치는 앞날에 대한 불안감에서 최근 직면한 어려움을 가늠할 수 있었다. 영업담당자들은 현재 해운업계 시황이 한계 수준까지 다다랐다는데 공감하고 있었다.
근해항로를 취항하는 정기선사 관계자는 최근 중국의 경기 악화를 엿볼 수 있는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자사 홍콩 주재원의 말을 빌어 “‘홍콩의 고속도로를 한참 달렸는데도 컨테이너가 한대도 보이질 않았다’고 하더라”며 “미국의 소비시장이 급격히 위축되면서 남중국의 인형공장이 아예 가동을 중단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파산위기를 맞고 있는 미국 자동차 메이커들을 예로 들며 이들 업체의 어려움이 해운업으로 확산될 수 있음을 우려했다. 그는 “경기가 나빠지면 자동차 시장이 가장 먼저 타격을 받는다. 디트로이트 지역의 연쇄 도산 가능성이 불거지고 있다는데, 해운업도 큰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자동차기업들은 해운선사 입장에서 볼 때 대형고객들중 하나다. 자동차 완제품 뿐 아니라 관련 반제품(CKD)나 부품 등의 물동량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특히 타이어는 정기선사들이 앞다퉈 유치를 노리는 대량화물 중 하나다.
부정기선업계 관계자는 최근 건화물선 시황 악화로 케이프사이즈 선박(18만DWT내외) 운임이 파나막스급(7만DWT 내외) 선박 운임을 밑도는 이해 못할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고 전했다. 현재 거래되고 있는 파나막스선 일일 용선료는 7천~8천달러선임에 비해 케이프사이즈 용선료는 3천달러 아래로 떨어진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는 “케이프사이즈는 철광석을, 파나막스는 석탄을 주로 수송한다”며 “최근 경기 침체로 철강 원자재인 철광석은 그 수요가 크게 떨어졌지만 석탄은 난방이나 발전용으로 기본 수요가 꾸준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지방대리점사들은 외국선사의 선박 입항이 뜸해 일손을 놓고 있는 상태라고 푸념하고 있다. 또한 선박브로커(해운중개업자)들은 영국과의 시차 관계로 선박 거래가 퇴근시간 이후 한밤중에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부정기 시황 급락으로 요즘엔 정확하게 퇴근시간을 지키고 있는 실정이다. “거래가 없어 회사문을 일찍 나서고 있지만 직원들 뒷모습은 쓸쓸하기만 하다”는 브로커회사 임원의 말에서 이들 기업의 최근 상황을 엿볼 수 있다.
“해운업계 인력 고용불안 현실화”
시황 위축은 곧 고용불안으로 이어짐은 두말할 나위 없다. 꼭 회사 파산이 아니어도 해운선사들이 본격적인 몸집 줄이기에 나설 경우 대량 실직 사태는 불가피한 상황이다.
해운기업들의 고용 축소 징후는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세계 1위 컨테이너 선사인 머스크라인은 중국 광저우 서비스 센터를 폐쇄할 것이라고 밝혀 직원 700여명의 실직이 예상되고 있다. 싱가포르 선사인 NOL은 비용구조가 높은 북미 지역 사무소 인력 1천명 감원을 시작으로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서 구조조정을 시작할 계획이라고 밝혀 해운업계의 관심이 쏠렸다. 북미지역 감원규모는 전체 인력의 9%에 이른다. NOL은 싱가포르 본사에서도 50명의 인력을 감원할 예정이다.
국내 부정기선사 한 관계자는 “금융위기가 실물경제로 확산되면 해운업은 직격탄”이라며 “이런 기회를 통해서 해운업계가 내실을 키울수 있으면 좋겠지만 선사들이 도산하고 실직자들이 양산되고 하면 동종업계 종사자로서 우울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외국선사 관계자는 “내색은 안하고 있지만 본사에서 언제 고용축소 얘기가 나올지 몰라 신경이 부쩍 곤두서 있는 상황”이라며 “업계가 전반적으로 힘든 상황이라 이직이 쉽지도 않아 더 큰 문제”라고 말했다.
한편 해운업계는 근거 없는 악성루머들이 무차별적으로 양산되는 것에 대해서 공포감을 토로하고 있다. 그 루머의 타깃이 되는 해운기업들은 하주들의 선적기피 대상에 포함되거나 은행권의 대출 기피 기업으로 분류돼 영업과 재정 양쪽에서 피멍이 들 수 있어 심각하다.
악성루머는 정기선과 부정기선을 가리지 않고 있다. 현재 착실히 영업을 벌이고 있는 견실한 선사나 물류회사까지 그 대상에 포함되고 있다. 물론 그 대상으로 지목된 기업이 루머의 내용과 같은 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근본 원인이 회사의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었는지 악성 루머에 의한 것이었는지는 곰곰히 따져볼 일이라고 다수의 해운업계 관계자들은 말한다.
유동성 악화 루머에 휩싸였던 흥아해운이 최근 이에 대해 강하게 반박한 것도 더 이상 이를 방치하다가는 회사가 더 큰 곤경에 처할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흥아해운측은 “지금까지 금융권 상환기일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고, 용선료, 하역비 결제도 한번도 늦춘 사실이 없다”며 “악성루머가 더이상 한국 해운산업에 악영향을 미쳐선 안될 것”이라고 일련의 루머를 일축했다.
이와 관련 한 선사 관계자는 “악성루머가 시황 하락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선사들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며 “어디서 화물이 잡혔다는 얘기가 나와서 확인해 보면 전혀 근거 없는 얘기가 태반”이라고 말했다.
루머의 타깃이 됐던 선사의 한 관계자는 “루머 내용이 사실이 된다고 해서 그 루머가 사실을 기반으로 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며 “오히려 멀쩡한 회사가 루머의 희생양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해 자중해야 할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사업구조 다변화도 필수 덕목”
갑작스런 해운 침체를 통해 해운선사들은 안정적인 포트폴리오 구축에도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같은 해운업이라 하더라도 정기선이나 건화물선, 탱크선, 냉동화물선 등의 부문에 따라 체감하는 시황은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일례로 건화물선이 지난 몇 년간 최대 호황을 구가하다 몇 달 사이에 사상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린 것과 비교해 정기선은 호·불황의 간극이 크지 않다는 점에서 안정적이라 할 수 있다. 국내 양대 선사인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이 정기선과 부정기선 부문의 비중에 조화를 꾀하는 것도 안정적인 경영을 위한 사업 다각화 조치로 볼 수 있다.
이와 관련 냉동화물 전문선사인 쉬핑랜드는 최근 부정기선사로는 처음으로 종합물류기업 인증을 통과해 주목을 받고 있다. 파크로드와 같은 해 설립된 쉬핑랜드는 냉동화물운송에서 시작해 건화물선 시장으로 발을 넓힌 케이스다. 냉동선 부문과 건화물선 부문의 매출구조가 50:50으로, 중견선사치고는 꽤 안정적인 사업 포트폴리오를 구축하고 있다는 평가다.
이 회사 임원은 “올해 냉동화물 운임은 오히려 큐빅피트당 80달러에서 100달러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며 “냉동선은 신조 발주가 거의 이뤄지지 않아 대선이 잘 이뤄지지 않는데다 최근 노후선 해체가 많이 이뤄지면서 선복량이 감소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임원은 “냉동화물 시장은 운항경험이 중요할 뿐 아니라 선박 구입도 쉽지 않아 신규 선사 진출이 제한적”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국내에서 냉동화물 운송을 벌이고 있는 선사는 5~6개사에 불과한 실정이다.
원목 수송시장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는 티피씨코리아도 그런 점에서 주목받고 있는 회사다. 건화물선중 원목선 시장도 냉동화물 시장만큼이나 진출이 제한돼 있어 최근의 시황 하락에서 다소 비켜나 있다는 평가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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