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면서 공급망 안전의 중요성이 커진 가운데 외항해운 단체에서 전략물자 공급망 안보를 달성하기 위해 국내 화주가 수송권을 행사하는 무역 조건을 확대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해 눈길을 끌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 에너지·자원 운송망 구축을 위한 국적선 적취율 제고 방안」이란 제목의 보고서를 낸 김세현 한국해운협회 부산사무소장은 기자와 만나 “에너지와 자원 공급망은 국내 대량 화주의 FOB(본선 인도) 방식의 무역 조건을 기반으로 국적선사와 화주가 10년 이상 장기 계약을 맺고 전용선을 투입하는 운송망을 구축해야 완성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FOB는 화물이 수출 항구에서 선박에 실릴 때까지의 비용을 수출자가 부담하고 이후 비용은 수입자가 부담하는 무역 조건이다. 수입자는 선박 확보와 최종 도착지까지의 물류까지 책임진다.
현재 우리나라 전략물자의 국적선사 적취율은 발전 연료를 제외하고 높은 편이 아니다. 남동·동서·중부·남부·서부 등 한국전력 산하 5대 발전사들이 수입하는 발전용 연료탄의 국적선사 점유율은 81%에 이른다.
반면 제철사는 66%, 정유사는 51%, 가스공사는 50% 정도만 국내 선사에게 수송을 맡기고 있다. 철광석과 액체 화물의 운송 주권에 심각한 균열이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대량화주 100% 국적선사와 거래 원해
이런 현실과 달리 정작 전략물자 화주들은 국적선사와 거래하는 걸 선호하는 것으로 조사됐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보고서에 따르면 설문조사 결과 전략물자 화주 100%가 국적선사와 운송 계약을 진행하길 바라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화주의 80%는 우리가 수송권을 갖는 FOB 조건으로 수입 계약을 맺길 희망했다.
수송 계약 방식을 두고 64%의 화주가 장기 계약의 일종인 CVC(연속 항해 용선) 또는 COA(화물 운송 계약)를 원했다. 다만 단발성 계약인 현물용선(스폿)을 선호하는 화주도 24%에 이르러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용선 계약 기간 선호도 조사에선 ▲5년(28%) ▲10년(26%) ▲1항차(19%) ▲1년(15%) ▲신조 연한(11%) 순으로 나타났다. 10년 이상의 장기 계약을 원하는 화주가 40%에도 못 미치는 셈이다.
김 소장은 공동 입찰과 FOB 계약 확대를 전략물자의 국적선 적취율을 끌어올리는 해법으로 제시했다. 그는 5개 발전사가 향후 발전 원료 수입 운송을 공동 입찰과 공동운항 방식으로 진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개별 입찰이 아닌 공동 입찰로 운송 계약을 체결하면 규모의 경제를 이뤄 도입 단가를 낮추고 운항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발전사와 선사가 10년 넘게 유지해 온 발전수송상생협의회를 통해 이 같은 방식의 수송 입찰이 가능할 것으로 내다봤다. 5대 발전사는 2026년에 7척, 2036년에 38척의 유연탄 운송 계약을 갱신하는 한편 2027년엔 친환경 에너지 전환 대책에 맞춰 10척의 LNG 운반선을 확보해야 한다.
김 소장은 국적선 적취율이 2025년부터 31% 수준으로 추락하는 가스공사의 경우 FOB 조건의 수입 계약 확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풀이했다. 9척의 LNG 수송 계약이 갱신될 것으로 예상되는 2029년에 FOB 거래를 확대하지 않으면 국적선 점유율은 21%까지 하락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는 또 카타르 등에서 LNG를 판매하면서 운송서비스와 패키지로 계약하려는 움직임이 확산하는 데 대응해 FOB 계약과 무관한 LNG선대를 운영할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별도의 전용선대를 운영하면 LNG 매매 협상 과정에서 우리가 수송권을 갖는 FOB와 수출자가 수송권을 갖는 DES(착선 인도 조건) CIF(운임 보험료 포함 인도 조건) 가격 모두를 제시받을 수 있어 경쟁력 있는 구매 단가 확보가 가능하다. 독립적인 LNG선단을 구성하면 시장에 급매로 나온 LNG 매물을 확보하거나 소형 LNG 유전에 공격적으로 투자하는 것도 노려볼 수 있다.
“그동안 우리 대량화주가 체결한 전략물자 수송 계약을 기준으로 적취율을 관리하다 보니 통계에 허점이 있었다. 가스공사는 모두 국적선사와 LNG 운송 계약을 체결했지만 우리가 수입하는 전체 LNG의 국적선 적취율은 50%밖에 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무역 조건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해외에서 에너지나 원료를 수입할 때 발전사와 제철사는 자신들이 수송하는 FOB 조건이 대다수인 반면 가스공사는 해외 수출화주가 수송권을 갖는 DES CIF 등의 계약비중이 50%에 이른다. 에너지·자원 공급망 안보를 실현하려면 국적선 적취율을 80% 이상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선사-대량화주 간 계약뿐 아니라 대량화물 수입 계약부터 철저히 관리하는 게 중요하다. 특히 친환경 정책으로 발전과 제철 원료의 큰 변화가 불기피한 상황에선 더욱 공급망 전반에 개입이 이뤄져야 한다.”
‘자원안보특별법 개정’ 국가가 화주계약 관리 긴요
김 소장은 국가 차원의 관리도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국가자원안보특별법」을 개정해 국가가 직접 화주 계약을 관리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기획재정부와 산업통상자원부가 공기업의 수입 계약을 승인할 때 FOB와 전용선 계약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재차 강조하지만 전략물자 공급망을 구축하고 관리하는 건 국가 안보, 국민의 안전과 직결된 사안이다. 위협에서 국민들을 보호하는 게 국가의 책무라는 점에서 개별 기업의 자율에 맡겨 둔 에너지·자원 운송망에 대해 정부가 책임 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은 에너지 위기를 겪으면서 정부 차원에서 에너지 운송 안보를 실현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남북이 대치해 있고, 수출입 물동량의 99.7%를 해운에 의존하는 우리나라도 이 같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는 또 전용선 계약에서 발생하는 화주 부담을 경감하는 정책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업 공시 상의 부채와 별도로 기재부의 공기업 재무 평가에선 전용선 도입으로 파생하는 부채를 제외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또 선박 금융 지원, 항비 절감, 세제 지원 등 선박 도입 단가를 낮추는 지원책을 마련해 전략물자 전용선 비중을 높이는 선순환 효과를 유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국형 LNG선 화물창 결함 문제로 SK해운과 가스해운이 소송전을 벌인 사례처럼 불필요한 분쟁으로 선사와 대량화주가 계약을 기피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표준계약서를 도입하는 한편 최저가 낙찰제 대신 수행능력, 입찰가, 사회적 책임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종합심사낙찰제를 시행하는 혁신적인 조치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화주는 ‘우리가 왜 선사의 안정적인 계약을 제공하는 희생을 해야 하느냐’고 질문한다. 국회도 장기 계약 운임이 현재의 시장 운임보다 높으면 끊임없이 화주인 공기업을 공격한다. 일부 선사도 최저가 낙찰제의 특성상 당장의 계약을 따내려고 중고선과 용선 투입을 마다하지 않는다.
기재부의 기업 평가 기준, 산업부의 계약 승인 절차 그 어디에도 안정적인 운송망 부문은 평가하지 않고 가격만을 최우선시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가스공사가 수송권 확보를 포기한 LNG 수입 계약을 카타르와 체결하면서 우리나라 LNG 공급망에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도자료를 내고 많은 이들이 이에 동의한다. 이게 바로 우리나라 에너지·자원 안보의 현실이다.
해운협회 각 팀장들이 현안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도록 한다는 취지에서 시작한 현안보고서 과제가 당장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언론의 역할처럼 누군가의 인식에, 누군가의 정책에 참조가 되고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부산항이슈등 영남권 선사 애로 해소에 주력
김 소장은 전략물자 적취율 제고 방안 설명을 마치고 부산사무소에서 1년 반의 시간을 보내면서 관심을 기울인 중점 업무를 소개했다.
“협회 회원사가 176곳인데 이 중 35%인 62개 선사가 부산과 영남에 본사를 두고 있다. 부산에 오자마자 구성한 분과위원회를 분기별로 개최하고 매주 2~3개 선사를 직접 방문해 의견을 듣고 있다. 다수의 민원이 숙원 사업이거나 추진에 시일이 필요한 사안이다. 가시적인 결과물을 전달해 드리지 못하는 업무는 진행 상황을 공유하거나 협회 활동을 안내해 드리고 있다.
컨테이너선사들은 부산항을 이용할 때 불거지는 애로사항을 주로 호소한다. 동원터미널 개장, 허치슨부두 이전과 제반 비용 문제, PNC(부산신항만)의 OCR(광학 문자 인식) 도입 추진과 비용 일괄 청구 이슈, AMP(육상 전원 공급 장치) 이용 확대, 항만부대업과의 요율 협상 등이 최근 당면한 현안이다. 오래 전부터 컨테이너선사 지점장과 본부장 등으로 구성된 지구협의회와 실무 협의회를 운영하고 있다. ”
그는 앞으로 현지 회원사 방문을 더욱 강화할 계획이라고 밝히면서 부산사무소에서 새롭게 추진하는 사업으로 중대재해처벌법 대응을 들었다.
“영업이익을 많이 내 법인세를 고민하는 선사가 있었는데 다행히 부산사무소 직원이 방문해 톤세 제도를 이용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 일로 회원사 방문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 아울러 부산사무소 뉴스레터 서비스를 개설했다. 일일이 찾아뵙지 못하는 선사들에게 뉴스레터로 매일 새로운 정보를 제공할 계획이다.
앞으로 중처법으로 회원사가 피해를 보지 않도록 반드시 알아야 할 사건사고의 해석과 판례를 안내하고 있다. 특히 컨테이너선사의 경우 외부 작업자에서 인사 사고가 났을 때 안전 조치 미흡으로 선사 대표자에게 피해가 확대되지 않도록 부산사무소가 개별적으로 현장 작업자들의 안전을 점검하고 있다.”
< 이경희 기자 khlee@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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