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5자에 이어>
다. 피고 은행의 손해배상책임을 과실상계 내지 책임제한에 따라 감경할 수 있는지 여부
원심판결 이유를 앞서 본 법리와 기록에 비추어 보면, 이러한 원심의 판단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그대로 수긍하기 어렵다.
가) 이 사건 대출계약 제3조 제2항에 따르면, 이 사건 대출계약은 성동조선이 원·부자재 구매대금 입금 요청을 할 때 대금 결제를 위해 원·부자재 매도인의 계좌에 대금을 직접 입금하거나 그 구매를 위해 발행된 신용장 대금을 결제하는 이른바 직접 지급방식에 의한 대출 실행만 허용했다. 이 사건 보증계약 중 특약 제3항 및 약관 제6조 제1호에 따르면, 직접지급방식 외의 방식으로 대출을 실행하는 것은 신용보증조건 위반에 해당하고 피고 공사는 그 대출에 관한 보증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에 따르면 성동조선의 계좌로 원·부자재 구매대금 상당액을 입금하는 방식으로 대출을 실행하는 것은 그 자체로 직접지급방식에 의한 대출이 아니어서 신용보증조건 위반에 해당해 피고 공사의 면책 사유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사건 대출계약 제3조 제2항 본문은 인출요청서에 명시된 대출금계좌로 대출금을 입금하는 방식으로 대출을 실행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규정했고, 그 계약서에 첨부된 인출요청서 양식에서는 성동조선을 그 대출금계좌의 예금주로 기재하고 있다. 위 규정 등에 따르면, 성동조선의 계좌로 대출금을 지급하는 것은 이 사건 대출계약이 허용하는 대출 실행 방식이라고 잘못 해석할 소지가 있고, 원고와 피고 은행 모두 그 내용을 오해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이 사건 대출 중 성동조선의 원·부자재 구매대금 결제 후 대출이 실행된 이른바 사후대출방식에 의한 부분 외에 구매대금 결제 전 실행된 부분도 대체로 원고가 성동조선의 계좌로 대출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실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 역시 이 사건 대출계약에서 정한 직접지급방식을 준수한 것은 아니었지만 피고 공사는 사후 대출방식에 의한 대출 부분에 대해만 면책을 주장했고, 결국 성동조선의 계좌로 실행된 대출 중 대출 실행 시점이 원·부자재 구매대금 지급 전·후인지에 따라 피고 공사의 보증금 지급 여부가 달라짐으로써 면책 부분에 관한 원고의 손해가 현실화된 것이다. 이와 같이 원고가 입은 손해, 특히 사후대출로 인해 피고 공사가 면책됨으로써 발생한 손해는 계약 자체에 해석상 오해할 소지가 많은 내용이 들어 있었고, 원고와 피고 은행 등이 공통해 그 부분 계약 내용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것이므로, 그 손해를 피고 은행에게만 부담지우는 것은 공평의 원칙에 맞지 않다.
나) 원고는 피고 은행과 마찬가지로 대출 업무에 대한 전문 지식과 능력을 보유한 대형 은행이다. 이 사건 대출에서 참여은행인 원고는 관리은행인 피고 은행으로 해금 수임인으로서 인출요청서와 대출금의 용도에 관한 증빙서류의 적정 여부 등을 심사하는 의무를 부담하게 했지만, 차주인 성동조선과의 법률관계에서는 여전히 자신의 판단과 책임 하에 성동조선의 신용위험 등을 부담하면서 이 사건 대출을 실행하는 대주의 지위에 있었다. 이 사건 대출은 짧은 기간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서 실행됐는데, 회차별로 대출 실행 전에 이루어지는 서류 심사 등의 업무를 오로지 피고 은행이 전담해 수행해야 했다. 이와 같은 원고와 피고 은행의 지위와 역할, 대출 실행 경위 등의 사정을 고려하면, 피고 공사가 면책됨으로써 원고에게 발생하는 손해와 관련한 위험을 피고 은행이 전적으로 부담하는 것은 형평의 관점에 비추어 부당하다.
다) 원고는 피고 은행 및 중소기업은행과 대주단을 구성해 성동조선에게 이 사건 대출을 실행하면서 피고 은행을 관리은행으로 정하고 수임인으로서 대출실행조건 충족 여부 등을 검토하는 업무를 수행하게 했다. 그런데 피고 은행은 같은 대주의 지위에 있는 원고 및 중소기업은행과 마찬가지로 성동조선으로부터 이 사건 대출금의 분담비율에 상응하는 이자 수익을 얻은 것 외에 관리은행으로서의 업무수행 대가를 따로 수령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피고 은행이 직접 실행한 대출금에 대해 피고 공사의 면책에 따라 입은 손해를 부담하는 것 외에 같은 경위로 원고가 입은 손해까지 이 사건 대출의 관리은행으로서 선관주의의무 위반을 이유로 전부 부담하게 된다면, 피고 은행이 이 사건 대출로 얻게 되는 이익에 비해 지나치게 과도한 책임을 부담하는 것이 돼서 신의칙 또는 공평의 원칙에 반한다고 볼 여지가 많다.
4. 비판적 검토
결론적으로 법원은 1) 이 사건 대출 실행에 신용보증조건 위반이 존재해 피고 공사는 이 사건수출신용보증계약 약관에 의해 면책되며, 2) 피고 은행은 ‘신디케이티드론’에서 관리은행으로서 부담하는 선관주의의무를 위반했고, 3) 그럼에도 공평의 관점에 비추어 피고 은행의 손해배상책임이 제한될 여지가 있다고 보았다. 1)의 쟁점에 대해, 법원은 한국무역보험공사가 설정한 신용보증약관의 면책사유인 ‘은행이 신용보증조건을 위반한 경우’는 은행의 신용보증조건 위반행위와 보증사고의 발생 사이의 인과관계를 요건으로 하지 않는다고 해석하는 것이 그 문언에 부합하고 제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인 해석이라고 한 대법원 2010년 9월9일 선고 2007다5120 판결의 법리를 따른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의사표시 일반의 해석에서보다 그 문언 자체에 더욱 무게를 두는 약관조항의 해석 원칙에 대한 법리(대법원 2009년 7월9일 선고 2008다88221 판결 참조)를 고려했을 때, 합리적인 것이다. 2)의 쟁점에 대해, 법원은 신디케이티드론(syndicated loan) 거래의 참여은행과 참여은행으로부터 신디케이티드론 관련 행정 및 관리사무 처리를 위탁받은 대리은행의 법률관계 및 이 경우 대리은행이 부담하는 선관주의의무의 범위에 대한 대법원 2012년 2월23일 선고 2010다83700 판결의 법리를 따른 것이다. 즉, 신디케이티드론 거래에서 참여은행과 대리은행의 법률관계는 위임관계이고, 이 경우 구체적인 위임사무의 범위는 신디케이티드론 계약의 대리조항(agency clause)에 의해 정해지지만, 참여은행과 대리은행은 모두 상호 대등한 지위에서 계약조건의 교섭을 할 수 있는 전문적 지식을 가진 거래주체라는 점에서 원칙적으로 대리은행은 대리조항에 의해 명시적으로 위임된 사무의 범위 내에서 위임 본지에 따라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로써 위임사무를 처리해야 하고, 명시적으로 위임받은 사무 이외의 사항에 대해는 이를 처리해야 할 의무를 부담한다고 할 수 없다. 3)의 쟁점에 대해, 법원은 신의칙 또는 공평의 원칙에 의해 대리은행의 선관주의의무에 따른 책임을 제한할 수 있다고 보았는데, 참여은행과 대리은행이 모두 대출 업무에 대한 전문 지식과 능력을 보유한 대형 은행임에도 이 사건 대출계약 자체에 해석상 오해할 소지가 많은 내용이 들어 있었고, 양쪽 은행이 공통해 그 부분 계약 내용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해 손해가 발생했다는 점을 그 근거로 삼았다. 다수의 대주들이 대주단(syndicated lenders)을 구성해 하나의 대출계약서에 의해 공통의 조건으로 차주에게 자금을 대출하는 신디케이티드론 거래의 구조와 법적 성질을 고려했을 때, 이는 타당하며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볼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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