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상선과 현대중공업을 필두로 한 범현대가의 경영권 분쟁이 현대상선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현대상선은 22일 오전 본사 대강당에서 열린 정기주주총회에서 재무제표 승인과 이사선임의 건, 이사 보수한도, 정관 일부 변경 안건을 모두 원안대로 가결했다.
특히 이사보수한도와 정관 일부 변경안은 현대중공업 등 일부 주주들의 반대로 표결까지 가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원안 통과를 확정 지었다. 현대상선 지분 15.2%를 보유한 현대중공업과 6.8%를 보유한 현대삼호중공업, 2.4%를 보유한 KCC, 현대백화점 등이 반대했으나 현대상선 우호지분과 일반 주주들의 찬성으로 통과했다.
이로써 현대상선은 2년 만에 재연된 범 현대가와의 경영권 분쟁에서 지난 패배를 설욕했다. 2011년 주총에서 현대상선은 우선주 발행한도 확대를 추진했다가 범 현대가의 반대로 무산된 바 있다.
현대상선은 총회에서 현정은 회장과 유창근 사장을 사내이사로, 허선 연세대 법무대학원 겸임교수, 에릭 싱 칩 홍콩인터내셔널터미널 사장을 사외이사로 조용근 세무법인 석성 회장, 배국환 농협금융지주 사외이사를 감사 및 사외이사로 각각 선임했다. 이밖에 이사 9명에 대한 보수한도를 지난해와 같은 100억원으로 동결했다.
이날 주총에서 재무제표 승인을 비롯해 이사 및 감사 선임 의안은 참석 주주들의 지지 속에 순조롭게 통과됐다.
하지만 이사보수한도와 정관 개정 의안 승인을 두고 현대상선과 현대중공업측이 대립각을 세우며 긴장된 모습이 연출됐다.
현대상선은 당초 두 번째 의안이었던 ‘정관 일부 변경의 건’을 마지막 순서로 미루고 주총을 진행했다. 현대중공업측이 정관 개정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전날 밝힌 까닭에 비교적 쟁점에서 비켜나 있는 안건을 앞 순서로 배치해 시간을 절약하겠다는 포석이었다.
현대중공업은 2년 전과 마찬가지로 정관 개정뿐 아니라 이사보수한도 승인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을 밝혀 현대상선을 곤혹스럽게 했다.
주총에 참석한 현대중공업과 현대삼호중공업 등 현대중공업그룹 대리인들은 "현대상선이 지난해 막대한 규모의 적자를 냈음에도 경쟁사보다 이사 보수 한도가 높다"고 주장하며 표결에 부쳐 승인 여부를 판가름 낼 것을 요구했다.
반면 소액주주나 다수의 주주들은 시간 낭비란 점을 들어 의장 직권으로 처리해줄 것을 요청했다. 주주 한명동씨는 “보수안건을 갖고 표결을 갖는 건 시간만 허비한다”며 “의장 직권으로 승인하라”고 주문했다.
한 때 “간편하게 반대주주만 확인해서 결정하자”는 한 주주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반대표만을 검표하는 방식으로 긴급 표결이 진행되기도 했으나 검표까지 끝난 상태에서 무산되고 말았다. 현대중공업측 법률대리인들이 반대표만을 집계하는 약식표결이 법률상 하자가 있다고 이의를 제기한 까닭이었다.
결국 현대상선은 참석한 전 주주들을 상대로 정식표결을 진행했다. 표결은 9시40분께 시작돼 1시간 뒤인 10시40분께야 끝이 났다. 표결 결과 참석한 주식 1억2359만8220주 중 찬성 65.62%, 반대 34.38%로 이사보수한도 안건은 원안대로 통과됐다. 일반 결의 사항인 이사보수한도 안건은 참석 주식의 과반수가 찬성하면 가결된다.
현대상선은 이사보수한도 반대에 대해 현대중공업의 ‘치졸한 발목잡기’라고 규정했다. 보수한도는 한도액만을 정해 놓은 것으로 실제 사용액과는 다른 데다 이번에 상정된 보수한도는 금액을 늘리는 것이 아닌 지난해 수준으로 동결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중공업의 주장과 달리 현대상선의 이사보수한도는 경쟁사보다 낮거나 비슷한 수준으로 파악됐다. STX팬오션은 현대상선의 2배인 200억원이며 한진해운은 7명의 이사에 대해 60억원을 보수한도로 정해 놓고 있다.
정관 개정안 표결에 대한 검표를 주주들이 지켜보고 있다. |
마지막으로 미뤄진 정관 개정 의안도 현대상선과 현대중공업의 치열한 공방 끝에 가까스로 통과됐다.
이날 현대중공업측 대리인은 “정관 개정안이 통과되면 이사회 결의만으로 제3자배정 유상증자가 거의 무제한적으로 가능하게 돼 주주의 신주인수권을 과도히 침해한다”는 점 등을 들어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반면 현대상선과 다수 주주들은 주요 주주인 현대중공업이 현대상선의 원활한 경영을 막고 있다고 강하게 질타했다. 주주 문재갑씨는 “현대상선의 대내외적 여건에 미뤄 자금조달이 매우 중요한 상황인데도 자금조달을 원활히 하려는 정관 개정을 막겠다는 건 손발을 묶어 바다로 빠뜨린 뒤 죽으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이어 “세계 최고회사들인 삼성과 현대중공업은 각각 전체 주식 5억주 중 1억주를, 1억6천만주 중 4천만주를 우선주로 하고 있다. 특히 제1종 제2종 제3종 우선주로 나눠 다양한 우선주를 발행하고 있는 현대중공업을 칭찬해주고 싶다”는 말로 에둘러 현대상선의 우선주 발행한도 확대 계획을 지지했다.
한 주주는 “2년간 1조5천억원의 적자를 본 현대상선은 조만간 유동성 문제를 겪을 가능성이 커 자금을 차입하거나 증자를 해야 한다”며 “현대중공업은 (현대상선의) 지난 증자에 참여도 안 해 놓고 자금조달을 목적으로 하는 정관 변경에도 반대한다. 대주주라면 책임을 져야 하는데도 소액주주들은 안중에도 없는 행동을 한다”고 비판했다.
주주 최덕희씨가 “정관 변경 안 중 문제되는 부분에 대해서만 투표를 통해 처리하자”고 중재를 시도했으나 현대중공업측 대리인들은 정관 변경안 전체를 반대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하며 표결을 거듭 요구했다.
결국 표결에 부쳐진 정관 개정 의안은 주총 시작 후 3시간이 지난 이날 오후 12시께 참석 주주 67.35%의 찬성, 32.65%의 기권 및 반대로 통과됐다. 특별 결의 대상인 정관 개정안은 전체 주식수 과반의 참석과 참석 주식수 3분의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가결 요건을 충족한다.
한편 현대중공업은 표결이 끝난 뒤에도 주주들의 위임장 여부를 철저히 확인해줄 것을 요청, 현대상선은 주총이 끝난 뒤에도 위임장을 일일이 대조하기도 했다.
현대그룹 측은 이날 현대중공업의 태도를 두고 현대상선 경영권에 대해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속마음을 드러낸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현대중공업은 지난해 3월 주총에서 정관변경을 통해 우선주 발행한도를 4천만주로 확대해 놓고, 현대상선 정관 변경안에 반대한 것은 모순적이란 지적이다.
현대상선은 최근 불어 닥친 해운경기 불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어 선제적인 자금 확보가 필요한 상황이다. 또 선박투자 확대 등을 위해 자본확충의 필요성이 있는 만큼 이번 정관 변경은 회사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는 평가다.
현대상선 관계자는 “이번 표결은 현대중공업 등이 아직 현대상선 경영권에 대한 적대적 M&A 의지를 버리지 않고 있다는 증거”라며, “현대중공업 등은 빠른 시일 내에 보유하고 있는 현대상선 지분 일부를 현대그룹에 넘기고 이번 주총을 계기로 현대상선 경영권에 대한 욕심도 버려야 한다”고 촉구했다.
< 이경희 차장 khlee@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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