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남 편집위원 |
이규만 지원자는 경력으로 봐서는 쓸 만 해도 인사권자인 군 출신 김용배 이사장은 사람을 뽑는 데는 경력이나 능력 이전에 신분이나 성분(?)이 중요하다고 평소에 강조하는 터였다.
그래서 이규만 지원자를 당해 경찰서에 신상조사를 의뢰했다. 1974년 1월에 선포된 유신헌법 반대를 주도한 소위 ‘동아투위(동아자유언론 수호투쟁위원회)’ 사건 관련으로 강제 해고됐던, 당시로선 어마어마한 시국사범(?)이었다. 협회로선 당연히 금기시하는 대상이었다.
긴급조치 위반이란 너무나 엄청난 사실에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들은 당국이나 사주가 반대하는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신문·방송·잡지에 대한 외부압력 배제, 기관원 출입금지, 언론인의 불법연행 거부 등을 요구하며 자유언론을 수호하고 민주화 운동을 위해 투쟁할 것을 다짐하며 투쟁을 벌였던 세간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헌정 사상 7차로 개정된 유신헌법(체제)은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령의 선포,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금지, 헌법의 일부 효력정지와 비상국무회의에 의한 대행, 새 헌법개정안의 공고 등을 내용으로 하는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했고, 10월27일 평화적 통일 지향,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를 표방한 개헌안이 비상국무회의에서 의결·공고되었으며 이에 따라 그해 11월 21일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투표율 92.9%에 91.5% 찬성으로 확정되었던 것.
전국 외항 해운업계를 대표하여 구심점 역할을 다할 것을 정관에 담아 결성된 공익성을 띤 선주협회 같은 경제단체에서, 사건의 정당성 여부는 차치하고 동 사건의 주모자격이었던 인물을 취업시킨다는 것은 김이사장 입장에서는 산하의 수많은 회원사들의 눈과 입을 의식해야 하는 특별한 사정도 있거니와 국군통수권자의 국가적 통치이념에 반대하는 직원을 자기 조직에 수용한다는 건 태극무공훈장을 탄 스스로의 가치관이나 국가관을 저해한다는 생각과 만의 일이라도 조직의 수장으로서 감당할 후환까지도 고려해야 한다는 눈치가 역력했다.
협회의 회장이나 이사장 그리고 전무나 상무 등 조직의 수뇌부를 선임하는 경우도 총회나 이사회의 결의로서 결정이 가능했다. 하지만 과장급 직원 한 명을 뽑는데 전 조직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고 필자로서는 선주협회보란 당시로서는 대외 상징적인 간판업무를 맡길 편집 담당자를 결정해야 하는 일이라 더욱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경찰 당국은 동아투위같은 사건 관련자의 취업 허가 여부는 총괄적 상위 기관인 중앙정보부(CIA) 소관이란 단서를 달았다.
후에 여성부 장관을 지내기도 한 권영자 초대 위원장이 중심이 된 동아투위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계속 집권을 주요 골자로 하는 소위 유신헌법을 반대, 부정, 비방하는 모든 행위를 보도할수 없게한 내용의 긴급조치 1, 2호를 위반, 당국이 광고주를 압박하여 광고게재를 억압하자 백지 및 유료 격려광고가 밀려오는 등 신문지면도 시끄러웠었다.
결국 ’75년 3월에 자유언론에 앞장섰던 130여명의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 등의 강제 해고로 막을 내린 뒤 흐르는 세월 속에 묻히는가 했던 이 사건은 2001년에는 정부가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한편 정보당국에 조회 결과 동아투위 관련자는 면죄부를 내린 상태여서 당시로선 민간부문 취업을 권장하는 입장이란 언질을 받고 채택 여부를 두고 망설이던 김이사장은 드디어 이규만 조사부 과장 발령을 결재했다.
손에 익은 솜씨라 오는 날부터 이과장은 원고 작성을 비롯한 일체의 협회보 작업을 특유의 순발력 있는 동작으로 처리해서 부서장인 필자는 얼마간 정신없이 바빴던 손길을 늦추고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
그런데 전향 후(?) 개전의 빛도 역력했고 근신도 하며 몇 달간 잘 나가는가 했더니 그러나 어느날 갑자기 무단결근을 하는 게 아닌가. 가족들도 행방을 모른다고 되레 필자에게 물어 왔다. 아니나다를까 그 버릇 뭐 못 준다더니 수소문한 바 강제 해직된 옛 동지들이 또 큼지막한 사건을 벌인 것이었다.
잠잠한가 했더니 지면을 달구며 동아투위 주최로 명동 한일관에서 개최된 ‘유신헌법반대 결의대회’에서 성명서를 읽은 장본인이 바로 이과장이었던 것이다. <계속> < 서대남 편집위원 dnsuh@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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