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6-04 09:00

이호영칼럼/ 돌아가신 은사님을 추억하며

이호영 함부르크항만청 한국대표
이호영 함부르크항만청 한국대표

5월이라는 1년 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이 함께 몰려 있는 것은 이렇게 아름답고 행복할 때 내가 오늘 존재할 수 있게 도와준 가장 소중한 사람들의 고마움을 생각하라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된다.

‘은혜를 안다’는 것은 요즘처럼 살벌한 세상에서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우리 대부분이 “적어도 나만은 은혜를 소중히 안다”고 자부하며 살지만 과거를 돌아보면 나도 은혜를 잊고 사는 사람 중의 하나라는 것을 발견하고는 정신이 번쩍 든다.

내가 존경하고 사랑했던 대학시절 교수님이 돌아가셔서 동기동창들과 함께 문상을 간 것도 벌써 십 수 년이 넘었다. 나는 교수님이 와병 중이신 것도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부음을 접했지만 그 무렵 교수님이 암으로 투병 중이셨던 걸 나 말고 가까이 있던 친구들은 다 알고 문병도 갔었다고 한다.

그 사실을 알고는 면목 없고 죄스러운 마음으로 문상을 마치고 난 후, 이미 몰라보게 커서 성모병원 안과의사가 됐다는 장남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 얼마 후 그 곳으로 사모님이 나오셨다.

학생 때부터 댁에 찾아가면 언제나 친절하게 음식 수발을 해 주시던, 그리고 사회생활을 할 때면 깍듯이 성인으로 대해주시고 우리 집사람에게도 자상하게 대해주셨던 사모님이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은 채 “병석에서도 늘 말씀을 하셨어요. 호영 군이 놀러 왔어도 벌써 왔을 텐데 못 오는 것을 보면 아마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일게야 라며 보고싶어 하셨죠”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사모님의 손을 꼬옥 잡고 “죄송합니다”라는 말 이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호상 격으로 문상객 동문들을 응접하는 사람은 그 교수님 밑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당시 수산청의 국장을 하던 몇 년 후배였는데 “형님, 정 교수님은 형님 이야기를 자주 하셨어요. 못 말리는 친구지만 어디에 내 놔도 손색없는 자랑스러운 제자라고 학생 때부터 말씀하셔서 우리들이 모두 부러워했었지요.” 이 말을 듣고 나는 엉엉 울어버리고 싶은 마음에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학창시절 여름방학 때 가정교사로 소일거리를 할 때, 가르치던 아이들을 데리고 학교에 가 비어있는 강의실에서 아이들은 자습하게 하고 나는 바다에 들어가 수영을 하곤 했다. 그 때마다 정 교수님 조교들에게서 열쇠를 받아 실험실 수도로 샤워를 하고 실험대 위에서 낮잠을 자다 들켜 혼나기도 했지만 대개 눈감아주시던 일도 기억난다.

또 군 제대를 하고 유학시험을 보겠다고 교수님께 뜻을 밝혔더니 실패했을 때 실망해서 포기할까 염려되는지 “한 번에 될 생각 말게. 첫 번째 시도에서는 국사나 합격하고 영어는 그 뒤에 천천히 합격하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임하게나!” 하셨던 분! 내가 이 분을 지도교수 격으로 모셔 가까이 의논하며 지냈던 것은 이 분이 미국 MIT공대출신이셨기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의 명문대에 유학하셨던 이 분의 경험으로 도움받고 싶었다. 내가 유학시험에서 영어와 국사를 한 번에 합격하자 맨 먼저 이 분께 전화로 알려드렸다. 그 뒤 삼호무역 시험 때는 이 분이 추천을 해 주셨고 마침내 합격하자 교수님 중에는 이 분께 제일 먼저 합격을 알려드렸다.

인연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아 내가 삼호무역을 그만두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이 분께서는 나를 당시 자기가 연구 개발 이사로 계셨던 대한종합식품 양국진 사장에게 인사시켜 스카우트까지 해 주셨다. 그 계기로 내가 대한종합식품에서 일하게 됐던 것이다.

대한종합식품에서는 교수님의 분야와 달리 무역 분야에서 일하게 됐는데 양국진 사장과 정 박사 두 분이 세계 일주 여행을 떠날 때 데리고 갈 사람을 물색하고 계셨다. 그 때 수 많은 쟁쟁한 사람들을 물리치고 불과 과장, 대리에 불과했던 내가 발탁이 됐던 것은 교수님께서 나를 적극 추천해서였다.

여행 중 성격이 강하셨던 예비역 중장출신의 양 사장으로부터 우리 둘이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나는 정 박사께 맘 놓고 불평을 하곤 했다. 하지만 정 박사께서는 누구에게도 불평 하지 않으셨다. 내가 양 사장께 발끈하고 대들까봐 언제나 나를 다독거리곤 하셨던 자상한 분이셨다.

일정을 마치고 귀국할 때, 내가 홍콩에서 회사직원들에게 나눠주려고 포르노 필름이 열 장씩 내장된 볼펜을 20개 사서 보여드리자 “자네 세관에서 들키면 어쩌려는가?” 하시기에 “당신도 하나 가지라고 주렵니다”고 했더니 “그러면 되겠군!” 하시며 같이 낄낄대던 일은 노소를 넘은 교류였다.

교수님과 나 둘 다 대한종합식품을 떠나고나서도 굴 수출문제로 우리 관계는 계속 이어졌다. 또 내가 대한해운공사, 대한선주 등 해운회사에 다니던 시절에 교수님께선 세종대학장이셨다. 그 때 교수님으로부터 “무역·해운 분야에 대해 세종대에서 특강을 좀 해줄 수 없느냐”고 제의가 들어왔을 때 바빠서 그 요청에 응하지 못한 것이 지금도 아쉽게 생각된다.

교수님이 돌아가시고나서 나는 미국 시애틀에있는 친구 강 사장에게 부음을 전했다. 그 때 그가 내게 하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내가 해묵은 크리스마스카드를 얼마 전에 받았는데 - 정교수께서 지난 크리스마스에 써 놓고 미처 보내지 못한 카드가 있는 것을 문갑정리를 하다가 찾았기에 늦었지만 보낸다는 말과 함께 - 날짜가 작년 것이었다”며 “아마도 그 때 돌아가실 것을 대비해서 문갑을 정리하셨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강 군은 나와 함께 대학 때 정 교수를 잘 따랐고, 내가 대한종합식품에서 굴 수출 시장을 개척할 때 강 군이 미국 이스트포인트시푸드에서 근무하며 자기 사장을 데리고 와 우리가 모두 함께 상담도 하고 즐기기도 같이 하던 사이였다.

그런지도 벌써 십 수 년이 흘렀고 나는 그 안에 교수님의 미망인도 찾아뵙지 못한 것이 생각나 또 다시 후회스럽고 죄송한 마음에 참으로 괴롭다. 어찌 그리도 무심했을까? 그 때는 대한선주를 그만두고 대한선주 문제로 대검 중수부에 불려 다니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 고심하고 있던 터였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아닌데 왜?

오늘 우연히 옛날 사진을 보다가 교수님을 발견하고 그 분 생각이나 그 분을 추모한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많은 은혜를 입고 살지만 그 은혜를 너무도 쉽게 잊어버려 사람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다. 그런데 나마저도 그렇다니... 금년에는 꼭 사모님이 계신 곳을 찾아 인사라도 올려야 되겠다는 생각에 이 글을 쓰며 마음에 결심을 되새긴다. 정 박사님, 그립습니다! 사모님, 죄송합니다.

앞으로의 삶에서는 또 다시 때 늦은 회한에 사로잡히는 일을 되풀이해선 안 되겠다. 그 누구라도 부모님이 계셨기에 비로소 이 세상에 태어났고, 스승이 계셨기에 오늘의 내가 만들어졌지만 그들 모두가 돌아가버린 이 세대에게 5월은 자녀들을 위해서 기쁜 마음으로 은총을 느끼며 사는 것이 또 하나의 의미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코리아쉬핑가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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