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1-29 11:00
논단/ 영국법원의 소송중지명령
정해덕 법무법인 화우 파트너변호사/법학박사
■ West Tankers 사건 등 최근의 동향을 중심으로
1. 영국법원의 소송중지명령
소송중지명령(Anti-suit Injunction)은 상대방 당사자가 현재 진행 중인 소송 또는 중재절차 이외의 다른 관할에서 동일한 소송 또는 중재절차를 진행하는 것을 금지하는 명령을 말한다.
영미국가의 법원은 동일 소송(또는 중재)이 자국 및 외국에 계류중인 때 필요한 경우 소송당사자인 외국인이나 외국회사에 대하여 소송중지명령을 내릴 수 있다고 하며, 그 근거로서 두 개의 주권이 하나의 대인소송에 놓여 있을 때 법원은 다른 주권국가의 소송에 영향을 받지 아니하며, 병행소송이 허용되더라도 판결 시까지는 하나의 소송으로 변론되어야 하고, 국제 예양의 원칙도 법원이 필요한 경우 주의를 기울여 제한적으로 소송중지명령을 내릴 것을 필요로 한다는 점 등이 제시되어 왔다. 또한 소송중지명령은 소송당사자에 대한 명령일 뿐 외국법원을 기속하는 것이 아니므로 주권침해의 문제는 발생하지 아니한다고 하여 왔다.
특히, 영국법원은 중재합의에 위배되는 다른 국가에서의 소송절차를 중지하는 소송중지명령을 비교적 쉽게 허용하여 왔다고 할 수 있는데, 최근의 사례에서 적어도 EU회원국간에는 EU Regulation 규정상 소송중지명령을 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있어 그 추이가 주목된다. 따라서, 이하에서는 위 EU Regulation 내용 및 최근의 사례들을 검토한 후 소송중지명령에 대한 영국법원의 입장변화 및 최근의 동향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2. EU Regulation44/2001
(1) 1968에 제정된 Convention on Jurisdiction and the Enforcement of Judgements in Civil and Commercial Matters, 일명 브뤼셀협약(Brussles Convention of 27 September)은 2000. 12. 22. 유럽연합회의에서 규약(Regulation)으로 채택되어 2002. 3. 1. 발효되었다. 위 EU Regulation은 EU 회원국 내의 민사, 상사 분쟁에 관한 관할, 판결의 승인, 집행을규율하는 획일적인 규칙으로서, 원칙적으로 국적에 상관없이 피고의 주소지가 관할지가 되고 EU 회원국의 법원의 판결 등은 다른 절차 없이 다른 EU 회원국에서 승인되고 강제력이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EU 회원국간의 동일소송에 대한 소송중지명령은 원칙적으로 위 Regulation에 반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2) 한편, 위 Regulation article 1. (2)(d)(arbitration exception)은 중재에 대한 적용제외규정을 두고 있고, 따라서 당사자들은 위 관할의 제한을 받지 않고 당사자들이 합의한 장소에 중재를 신청할 수 있고 중재합의에 따른 중재절차 진행 중에는 당사자가 위 Regulation에 의한 적법한 관할지에 소송을 제기하더라도 그 소송절차에 대하여 소송중지명령을 발할 수 있고, 이는 위 EU Regulation의 취지와도 모순되지 않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EU Regulation 해석상 중재절차 진행 중 다른 나라에서 소송을 제기하더라도 영국법원이 소송중지명령을 할 수 없다는 취지의 판례가 나오고 있다. 이하 이러한 사례들에 대하여 살펴본다.
3. West Tankers Case(Allianz SpA(formerly Riunione Adriatica di Sicurta SpA) v. West Tankers Inc (C-185/07) [2009] 1 AC 1138.)
(1) 사안의 개요
선박소유자인 West Tankers는 이탈리아의 석유회사인 ERG와 용선계약을 체결하여 ERG가 선박을 이용하던 중 선박이 이탈리아 시칠리 섬 남동부에 있는 항구도시 Syracuse에서 ERG 소유의 석유를 굴착하는 둑과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하여 ERG의 보험회사인 Allianz가 ERG에게 보험금을 지급하였는데, ERG는 중재조항에 따라 런던에서 West Tankers를 상대로 Allianz로부터 지급받은 보험금을 초과하는 부분의 손해를 청구하는 중재를 신청하였다.
한편, Allianz는 West Tankers를 상대로 자신들이 ERG에게 지급한 보험금을 보상받기 위하여 EU Regulation article5(3)에 의하여 불법행위지 관할법원으로 관할권을 갖는 이탈리아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West Tankers는 영국법원에 Allianz가 이탈리아에서 제기한 소송에 대하여 Anti suit injunction을 발할 것을 신청하였고 영국고등법원(High Court)은 소송중지명령을 허용하였다.
이에 상대방이 영국최고법원(House of Lords)에 항소하였는데 영국최고법원은 유럽공동체법원(ECJ(European Court of Justice))에 Anti-suit injunction을발할 수 있는지 여부에 관한 의견조회를 하였다(영국은 유럽공동체의 회원국이므로 유럽공동체법원의 판단에 구속된다).
(2) 유럽공동체법원의 판단(2008. 9. 4. ECJ 결정)
유럽공동체법원은 영국최고법원의 의견조회에 대한 2008. 9. 4.자 결정에서 이미 중재절차가 진행 중이라 하더라도, 상대방 당자자가 EU Regulation 44/2001에 의하여 인정되는 EU 회원국의 관할 법원에 추가로 소를 제기하는 것을 금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위 결정취지는 EU Regulation 44/2001에 의하여 인정되는 EU 회원국의 관할 법원에 추가로 소를 제기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EU 회원국 상호간의 신뢰에 근간을 둔 EU Regulation 44/2001의 취지에 반하고 따라서 관할법원의 판단 권한을 침해한다는 것이다.
4. Wadi Sudr Case(National Navigation Co v Endesa Generacion SA(The Wadi Sudr) [2009] EWCA Civ1397)
(1) 사안의 개요
Endesa는 석탄판매 회사로부터 석탄을 구매하고 선하증권을 교부받았는데, 위 선하증권에는 런던을 중재지로 하는 중재조항이 있었다.
Endesa가 구매한 석탄은 National Navigation이 소유한 선박 Wadi Sudr에 의하여 해상운송되었는데, 석탄운송이 지연되어 Endesa는 National Navigation을 상대로 스페인법원에 선박의 Arrest와 석탄의 지연배송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를 제기하였다.
한편, 같은 날 National Navigation은 영국법원에 채무부존재의 소를 제기하고, 중재합의에 따라 런던에 중재절차를 신청하고 영국법원에 Endesa가 소유한 선하증권에 중재조항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선언해 줄 것과 Endesa가 스페인법원에 제기한 소에 대한 소송중지명령을 신청하였다.
영국법원은 소송중지명령은 West Tankers 결정취지에 따라 기각하면서도 National Navigation의 중재주장은 이를 받아들였으며, 이에 대하여 항소법원에 항소가 제기되었다.
(2) 영국항소법원(Court of Appeal)의 판단
스페인법원은 본안전 판단으로 선하증권상의 중재합의는 효력이 없으며, 또한 National Navigation가 영국법원에 소를 제기함으로써 스스로 중재합의의 효력을 포기하였다고 판단하였고, 영국항소법원은 2009. 11월 스페인법원의 관할권과 본안전 판단이 EU Regulation 44/2001에 의하여 인정되며, 따라서 영국법원은 스페인법원의 판단에 구속된다고 판단하고, National Navigation가 신청한 소송중지명령신청도 기각하였다.
5. 결어
위에서 본 최근의 사례들에 의하면 중재 합의에 의하여 런던에서 중재절차가 진행 중이라 하더라도 상대방 당사자는 관할권을 갖는 다른 EU 회원국의 법원에 동일한 내용의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가능하고, 중재를 신청한 당사자는 영국법원에서 소송중지명령을 받기가 어렵게 되었다. 다만, 영국법원은 EU 회원국 이외의 국가에 제기된 소에 대해서는 여전히 소송중지명령을 발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영국법원은 최근 중재조항에 불구하고 카자흐스탄법원에서 진행 중인 소송에 대해서 소송중지명령을 발한 바 있음 AES UST-Kamenogorsk Hydropower Plant LLP v UST-Kamenogorsk Hydropower Plant JSC (2010) EWHC 772(Comm)).
위 사례들에서 볼 수 있듯이 소송중지명령에 대한 영국법원의 입장변화에 따라 적어도 EU 회원국 내에서는 런던에서의 중재합의의 강제력이 약화되어 런던을 중재지로 하는 중재합의가 감소되고 이에 대한 반사적인 효과로 파리, 제네바 등이 중재지로 부상할 것으로 예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동일사안에 대하여 상대방 당사자가 EU 회원국이냐 아니냐에 따라 소송중지명령을 허용하고 허용하지 아니하고 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국제 예양이나 타국관할의 존중, 주권보호 등 국제적 법원칙을 고려하여 볼 때 소송중지명령은 EU 회원국 여부에 관계없이 허용되어서는 아니되며 예외적으로 허용되더라도 엄격하게 제한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관한 영국법원의 향후 동향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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