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그룹은 5일 조중훈 창업주 탄생 100주년을 맞아 경기도 용인시 하갈동 소재 신갈 선영에서 60여명의 그룹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기념 추모행사를 가졌다.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는 ‘수송으로 나라에 은혜를 갚는다’는 의미의 수송보국(輸送報國) 철학을 바탕으로 한 나라의 동맥인 수송 사업을 발전시켜 대한민국 국가경제를 발전시킨 인물이다.
1920년 2월11일(음력) 서울시 서대문구 미근동에서 조명희 선생과 태천즙 여사의 4남4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45년 11월1일 25세의 나이로 인천에서 트럭 한대를 가지고 한진그룹의 모태인 한진상사를 창업했다.
조 창업주는 사업가의 기본 소양은 신용이라고 믿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한진상사의 기반은 모두 쑥대밭이 됐지만, 그 간 쌓아온 ‘신용’의 힘으로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신용에 얽힌 그의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1956년 어느 트럭회사로부터 임차한 차량의 운전기사가 수송을 맡은 미군 겨울 파카 1300여 벌을 차떼기로 남대문 시장에 팔아 넘긴 사고가 발생했다.
조 창업주는 직원 한 명을 남대문 시장에 상주시키고 도난 당한 물건이 시장에 유통되면 전부 사들이도록 했다. 금전적으로 당시 3만달러라는 엄청난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지만 미군들은 그의 확고한 ‘신용’을 확인하게 됐다.
그는 축적한 경험과 자금을 바탕으로 수송물류 사업의 범주를 넓히고 사업의 안정성을 다져나갔다. 1967년 7월 해운업 진출을 위해 대진해운을 창립하고, 같은 해 9월 베트남에 투입된 인원과 하역장비 차량 선박 등에 대한 막대한 보험료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동양화재해상보험을 인수했다. 1968년 2월엔 한국공항, 8월에는 한일개발을 설립하고 9월에는 인하공대를 인수했다.
이듬해인 1969년엔 만성 적자에 시달리던 국영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해 본격적으로 항공사업에 뛰어들었다. “국적기는 하늘을 나는 영토 1번지고, 국적기가 날고 있는 곳까지 그 나라의 국력이 뻗치는 것”이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간곡한 권유를 받아들여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1977년 5월 육·해·공 종합수송그룹의 완성을 위해 경영난을 겪고 있던 대진해운을 해체하고 컨테이너 전용 해운사인 한진해운을 설립했다. 또 1989년 5월 한진중공업을 설립해 청년시절 일본 고베의 조선소에서 주경야독하면서 키웠던 청운의 꿈도 이뤘다.
조중훈 창업주는 평소 ‘낚시대를 열 개 스무 개 걸쳐 놓는다고 해서 고기가 다 물리는 게 아니다. 진정한 낚시꾼은 한 대의 낚시대로도 많은 물고기를 잡는다’는 ‘낚시대 경영론’을 설파했다. 한진그룹이 수송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사업만 운영하는 종합물류그룹으로 성장한 배경이다.
그는 국내 수송물류사에 큰 족적을 남기고 2002년 11월17일 8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한편 이날 추모행사엔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조현민 한진칼 전무만 참여하고 경영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은 불참했다.
< 이경희 기자 khlee@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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