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2일 매실밭에서 도피자의 사체가 발견되자 의혹이 꼬리를 물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지난 4월에 죽은 변사체를 유 회장으로 둔갑시켜 뒤늦게 발표했다고 말했다. 4월에 변사체가 발견됐다는 제보가 근거였다.
물론 제보자의 착각이었다는 발표가 뒤따랐으나 믿지 않겠다는 데는 백약이 무효였다. 착각은 무럭무럭 자라 국민의 반이 착각할 지경에 이르렀다.
세월호 사고 이후 두 달 동안 발생한 순천 서면지역 변사사건 53건 중 유 회장 시신이 발견된 동네의 변사사건은 딱 한 건뿐이고 4월에 신고된 건 없었다는 경찰 해명에도 의혹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보름 남짓 동안 시신부패가 그렇게 심할 수 있느냐는 지적은 그나마 합리적인 의심에 속했다. 하지만 전문가가 기온과 습도, 파리 떼들의 접근 정도에 따라 부패 진행이 다를 수 있고, 일주일 전이라도 반건조화 정도까지 부패가 가능하다고 설명해도 불신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점은 여느 음모론과 다르지 않았다.
시신이 유 회장을 가리키는 핵심 단서는 많았다. 쌍둥이끼리도 다른 지문이 서로 일치하고, 금니 10개 등 독특한 치아 기록과 구조가 똑같았다. 이런 사실을 얘기해도 막무가내였다. 국과수가 세계 일류 수준의 감정기관이란 사실과 상관 없이 그들의 DNA검사를 믿지 못하겠다는 게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왼쪽 손가락 일부 마디가 절단된 상태도 일치하는데?”
설명을 갖다 붙여도 불신을 살찌우는 격이 되고 만다. 음모론이 제기되면 늑대와 양치기 소년 같은 현상이 만들어진다. 진실을 얘기하지만 어느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감식에 입회한 경찰관이 시신의 키가 유 회장보다 10센티나 작게 측정됐다고 주장한 녹취록은 세간의 의심에 날개를 달아줬다. “7.30 보궐선거가 다가오는데 무슨 거짓말을 못하겠어?” 하는 식이다.
서정민은 신문을 보다가 울화가 치밀어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금니 10개 등 사망자의 신체적 특징을 보고받고도 별다른 의심 없이 일반 변사자로 처리한 담당 검사에게 직무태만 여부를 따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도피자의 시신 발견이 언론에 보도되자 며칠 간격으로 도피 조력자들이 체포되거나 자수했다. 이튿날 도피자의 큰형이 체포되고, 신 엄마가 자수했으며, 일주일 후 여동생 부부가 체포됐다.
7월 29일 이른 아침 운전기사가 인천지검에 전화를 걸어 자수 의사를 밝혔다. 전날 그의 부인과 김 엄마가 자수한 시간대와 비슷했다. ‘대포폰’으로 서로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자수 시기를 저울질했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었다.
기사는 자수 의사를 밝힐 때 경기도 안성 일대에 있었다. 원래 선박 목수였던 그는 자신이 직접 수리한 집에서 숨었다. 인근에 구원파 아파트가 이백 채 이상 있었으니 자수하지 않았다면 그를 찾기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보다 나흘 전인 7월 25일 오후 7시경 장남과 여경호원이 용인의 Y 오피스텔에서 저항 없이 체포됐다. 좁은 공간에서 이어진 97일 간의 도피생활은 이렇게 마감했다. 빈 오피스텔로 알려진 곳에서 수도와 전기 계량기가 돌아갔으니 경찰이 수상히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검거 2시간 전. 경찰은 오피스텔 현관문 앞을 막고 강제로 문을 열 준비를 마쳤다. 열쇠 수리공이 대동했다. 창문은 소방차 사다리로 막았다. 자살방지용 매트리스도 깔렸다. 도주가 불가능한 상황.
“수경아, 머리를 왜 묶었어?”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묶은 여경호원을 본 그가 물었다.
“선생님, 밖을 보세요. 사다리차가 보이지 않습니까. 이제 나갈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그래 맞다. 네가 무슨 죄가 있냐. 어릴 때부터 넌 내 친동생과 같았지. 충성심 많고 믿음 좋은 너를 붙잡고 있었으니 미안하다. 네 남편과 애 둘 한테도 송구하구 나.”
남자는 여자의 손을 잡았다. 이별이 임박할 때는 손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그럼 먼저 나가거라. 경찰한테 태권도는 사용하지 마라. 나라를 지키는 사람들이다.”
농담 같은 진심이다. 그녀는 두 손을 들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문이 열리자 곧바로 경찰이 오피스텔 안으로 진입했다. 남자에게 수갑이 채워졌다. 둘은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았다. 경찰은 항복을 표시한 유대균에게 땀을 닦아주었다.
오피스텔에서 처음엔 주인인 하 씨가 드나들며 생수와 먹거리를 제공했지만, 5월 말부터는 이마저도 끊겨 쌀과 김치, 물만두 등으로 버티며 은신 생활을 해왔다. 또 사십 도에 육박하는 폭염에 시달리면서 한때 백삼십 킬로그램까지 나갔던 몸무게는 이십 킬로그램이나 빠졌다.
카메라 앞에서도 꼿꼿하던 여자는 30여 분간 눈물을 흘렸다. 느닷없이 체포돼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인지 남편과 이혼 소송을 하는 등 의지할 가족이 없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유대균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서정민은 이순정과 호암아트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던 중이었다. 미술을 좀 안다는 이순정의 제의에 못 이겨 따라 나섰다. 저녁 9시인데도 더위는 여전히 기승을 부렸다. 유 씨가 화제로 등장하자 이순정은 의외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에 있을 때 그 사람 큰누나를 만났는데 동생이 한때 촉망 받는 미술작가였다고 하더라구요. 조각을 했는데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작가라고 평가를 받았대요.”
“평단에서 그런 평가를 받았다고? 아무렴 동생 이야기니 주관적으로 평가했겠지.”
“아녜요.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체적인 평가는 호의적이었던 건 맞아요.”
“활동 시기가 언제쯤인가?”
서정민 쪽에서 호기심이 동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요.”
“그러니까 미술계, 조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유대균 그러면 대충 다 알겠군.”
“다 알죠, 지금도 많이 알아요.”
“…그렇게 유명했었단 말야?”
“한국의 로댕이라고 부른 사람도 있었다고요.”
이순정의 부연 설명이 따랐다.
“인간의 신체를 통해 삶의 희로애락을 표현한 작품이 많았어요. 로댕이 추구했던 작품세계와 비슷했죠.”
“그런데 요즘 그 사람 이름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물론 내가 문외한이긴 해도.”
“저도 궁금해서 알아봤는데 2004년 이후엔 공식적인 활동 기록이 별로 없어요.”
“그건 왜 그런가?”
“잘 모르겠어요. 무슨 이유에선지 그 이후로 미술계에서 사라졌어요.그런데 그런 작가들이 한두 명은 아니에요.”
“작품 특징은 어때?” 사실 서정민은 유대균의 작품이 궁금했다.
“서민의 삶이나 희로애락, 애절한 몸부림을 표현한 것도 있고 철학적인 성찰이나 진리추구를 하는 듯한 종교적인 느낌이 드는 작품도 많이 만들었어요.”
“언론보도를 보면 굉장한 사치 취향이 있고 모아놓은 수집품들도 아주 고가라고 하던데?”
“그가 모은 미술작품이 수백억 원대라는 얘기도 있어요. 실제로 로댕 작품도 그가 운영하는 식당에 있다는 이야기가 있고요.”
신문에는 검찰이 압수한 미술작품들 중에 상당한 고가품이 있다고 하나 구체적인 작품목록은 나오지 않았다. 외제차에 집도 대궐이라 하는 걸로 봐서 비싼 작품이 있을 만하다고 서정민은 생각했다.
“그 사람 작품이 팔리거나 거래가 되나? 미술시장에서?”
“지금은 없어요. 촉망 받던 젊은 작가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어떤 일로 갑자기 사라진 것 자체가 좋게 보이지 않는 거죠.”
프랑스에서 장녀, 미국에서 김혜경이 검거됐으나 미국에 거주하는 차녀와 차남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정보망 좋은 사설탐정들이 차남의 행적을 뒤쫓았으나 쓸 만한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그가 뉴욕에 별장을 갖고 있다는 사실만 회자됐다.
차남은 멕시코로 넘어간 것으로 추정됐다. 범법자가 미국사회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건 어렵지 않으나 다시 들어오는 건 무척 어렵다. 국경 지명수배범 명단에 오른 이상 신원 조회를 통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차녀와 차남은 FBI도 공조를 못하는 혼란스러운 멕시코 법질서를 등에 업고 유유자적한 도피 생활을 하고 있을 거란 추론이 설득력을 얻었다.
사고 후 반년이 흐른 10월 중순까지 횡령·배임으로 구속된 청해진 임원은 14명, 유 씨 가족의 도피를 돕다가 구속된 비호세력은 15명이었다. 흐린 물 안에 있으면 흐려지기 마련이다.
<이 작품은 세월호 사고의 역사적 사실에 작가의 허구적 상상력을 가미한 창작물이며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기업 지명 등은 실제와 관련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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