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주협회, ‘선주책임제한규정 개정’ 추진…D·O징구제 부활 목소리도
해운불황의 장기화로 인해 우리나라 외항해운업계가 사상 최악의 상황에 직면한 가운데 일부 악덕 수입업자들로 인해 해운이 동네북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어 이에 대한 대책마련이 시급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수입화물에 대한 무단 반출사고다. 수입업자가 보세창고에 입고된 화물을 몰래 빼돌려 처분한 뒤 해외로 도피하는 범죄행위로써 피해규모가 엄청난데도 처벌은 솜방망이에 불과해 동일수법의 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다.
현실이 이러한데도 불구하고 수입화물을 수송하는 해운기업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도 없는 실정이다.
한일항로에 취항중인 국적선사 T사는 지난해 3월 우리나라 수입업체인 효산스틸에서 수입하는 콘크리트용 철근 3004t(일본수출업체 한와, 시가 20억원 상당)을 일본 요코하마항에서 싣고 인천 내항 1부두로 안전하게 수송해 하역업자인 (주)청명의 보세창고로 입고시켰다.
하지만 같은 해 4월 초 하역업자가 선사의 화물인도지시서(D·O) 발급 없이 수입화주에게 수입화물을 무단으로 반출했다. 앞서 하역업자는 D·O없이 화물을 무단 반출할 경우 민·형사상 책임을 지겠다는 각서를 수송선사인 T사에 제출했다.
이 화물은 입항전 수입신고를 통해 통관이 완료된 후 반입된 내국 물품으로, 하역업자가 임의로 선사의 D·O 징구없이 자유롭게 반출이 가능하다는 점을 노려 수입업체인 효산스틸 대표는 이 화물을 임의로 처분한 뒤 중국으로 도주했다.
이런 와중에 같은 해 6월 수출업체가 오리지널 선화증권(B/L)을 제출하고 화물을 수송한 T사에 화물의 인도를 요구했으며, 11월에는 물품대금 회수를 위해 일본에 기항한 T사의 용선선박을 압류했다.
T사는 수출업체인 송화주의 청구에 대해 선박소유자책임제한을 법원에 신청했으나, 법원은 상법 제769조 제1호의 ‘선박의 운항에 직접’ 관련해 발생한 손해에 관한 채권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서울중앙지법 2013.11.1. 선고 2013 책 2)
이어진 2심에서는 청구를 기각했다. 해상운송인을 보호하기 위해 상법에 규정된 선주책임제한규정이 국내 법원에서 선박의 운항과 직접 관련된 것으로 그 범위를 한정함으로써 해운기업들은 최소한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있다.
현행 상법상 운송인의 운송물 인도책임의 범위(상법 제795조)를 선적에서부터 화물을 수하주에게 인도하는 시점까지로 규정한 반면에 선박소유자책임제한 범위(상법 제769조)는 선박의 운항에 직접 관련된 사항으로 규정하고 있다.
운송물 인도책임 범위와 선박소유자책임제한 범위가 다른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법원은 화주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여 운송인들에게 무한책임을 부과하고 있어 상법 관련규정의 개정이 시급한 실정이다.
결국 재판 결과와 상관없이 현행 통관제도의 허점을 악용하는 일부 부도덕한 수입상들 때문에 선사들만 골탕을 먹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화물이 이같이 무단으로 반출되어도 선사는 이를 예방할 장치가 없어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번 사건의 경우 화물 가액이 2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화물의 종류에 따라서는 천문학적인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더해지고 있다.
지난해 3월 이후 인천항에서 무단반출돼 처분된 철재 피해금액은 250억원에 달할 정도로 무단반출 범죄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민주당 배기운 의원은 지난해 10월 인천항만공사 국정감사에서 “각 항만공사에서 한정된 부두와 선석에 많은 민간하역업자를 선정함으로써 무단반출을 부추기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10년 전 발생한 PETACO 사건은 그 피해액이 수천억원에 달해 관련 당사자들 뿐만 아니라 해운업계를 경악하게 했다.
PETACO 사건은 지난 2003년 10월 불법으로 화물인도지시서 없이 화물을 인도받고 440억원 가량의 신용장 대금을 결제하지 못하고 도산한 사건으로 사주는 해외로 도피하고 석유수입부과금, 대리점 선금 등 수천억원대의 피해가 발생했다.
지난 1970년대 초반까지는 수입화물을 통관하려면 신고서류와 함께 선사가 발행한 화물인도지시서(D·O)를 반드시 제출하도록 했었다. 그러나 수출입 간소화라는 명분으로 이 D·O 징구제도가 폐지됐다.
선주협회는 그동안 수차례에 걸쳐 무단반출 사고예방을 위해 D·O 징구제도를 부활해 줄 것을 국무총리실과 관세청 등에 지속적으로 건의해 왔다.
관세청은 “수입화주와 은행, 선사, 보세구역 운영인간 물품대금, 운임, 보관료의 지급여부는 사인(私人) 간의 채권·채무관계로 관세청이 개입할 사항이 아니며, D·O 징구제도 부활시 재산권 침해와 통관지연 등 추가 물류비용이 초래된다”며 수용불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선주협회는 항만당국에 수입화물 무단반출 방지를 위한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해 줄 것을 건의하는 한편, 선주책임제한규정이 운송인의 운송물 인도책임의 범위와 일치되도록 고려대학교 해상법연구센터, 한국해법학회, 한국해운물류학회 등 연구단체와 함께 상법 개정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 이경희 기자 khlee@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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