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14 09:29

알기 쉬운 해상법 산책(38)/ “화물이 변했다” 액체화물의 오염·변질 사고

법무법인 세경 최기민 변호사


선적할 때 5였던 숫자가 양하할 때 26이 되어 있었다. 허용치는 20이었다. 배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페놀(phenol)의 색상 수치 이야기다. 2001년 미국 텍사스에서 2000t가량의 페놀을 선적한 선박은 두 달 가까이 항해하여 부산에 도착하였다. 선적 직후 화물창에서 채취한 샘플의 색상 수치는 5였는데, 양하 직전 같은 화물창에서 채취한 샘플의 수치는 26이었다. 화물량은 그대로였지만, 그것은 더 이상 수하인이 사려던 물건이 아니었다.

수하인은 본래 용도로 쓰지 못하게 된 페놀을 헐값에 팔았고, 그 차액을 보험금으로 지급한 적하보험자가 운송인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1심은 운송인에게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항소심이 이를 뒤집었고, 대법원이 그 결론을 확정하였다(서울고법 2003나72322 판결, 대법 2005다21593 판결).

액체화물의 오염·변질 사고는 물건이 사라지거나 부서지는 사고가 아니라 숫자가 변하는 사고라는 점에서 다른 화물 사고와 다르다. 숫자 하나가 변하는 순간 수백, 수천t의 액체화물은 본래 용도로 쓸 수 없는 물건이 되어 폐기되거나 헐값에 팔리고, 그 차액이 곧 클레임 금액이 되어 운송인에게 돌아온다.

화물을 싣고 나면 선박의 화물창은 양하할 때까지 아무도 열지 않는 밀실이나 다름없다. 그 안에서 화물이 변했다면 범인은 어디에 있을까. 밀실 트릭의 고전적인 해법은 크게 네 가지다. 범인이 정말 안에 있었거나, 밀실이 애초에 밀실이 아니었거나, 밀실에 들어오기 전부터 피해자에게 문제가 있었거나, 피해자가 스스로 죽었거나.

화물창 안에서 벌어지는 오염·변질 사고의 원인도 비슷하게 갈린다. 화물창에 남아 있던 직전 화물의 잔류물이나 세척 뒤에 남은 세척수는 밀실 안의 범인이 될 것이다. 선내 라인을 타고 들어온 오염원이나 다른 화물창의 화물이 범인이라면, 밀실은 애초에 밀실이 아니었던 것이다. 육상 탱크나 육상 라인에서 이미 오염·변질된 화물은 밀실에 들어오기 전부터 피해자에게 문제가 있었던 경우이고, 화물이 제 안에 이미 변할 씨앗을 품고 있었다면 피해자가 스스로 죽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다시 위 대법원 사건으로 돌아가 보자. 적하보험자가 지목한 범인은 셋이었고, 모두 배 안에 있었다. 직전 화물이었던 황산이 화물창과 라인(배관)에 남아 있어 페놀과 섞였다는 것, 항해 중 온도관리가 잘못되었다는 것, 황산에 부식된 스테인리스 화물창의 철이 변색을 부추겼다는 것이다. 반면 운송인은 페놀이 제 성질과 제조 공정에서 남은 부산물 때문에 저절로 변색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상법은 해상운송인에게 운송물의 수령·선적·적부·운송·보관·양륙·인도에 관한 주의의무를 지운다. 그 주의를 다하였음은 운송인이 스스로 증명하여야 한다. 다만 상법은 운송물의 특수한 성질 또는 숨은 하자, 이른바 고유하자(inherent vice)로 인한 운송인의 면책도 인정한다. 헤이그-비스비 규칙 제4조 제2항 (m)호에 해당하는 사유다. 운송인은 이 면책사유가 있었다는 사실과 운송물의 손해가 그 사유로 인하여 보통 생길 수 있는 것임을 증명하여야 한다. 그 증명이 되면 이번에는 화주가, 운송인이 주의를 다하였더라면 손해를 피할 수 있었음에도 그 주의를 다하지 아니하였다는 점을 거꾸로 증명하여야 한다.

법원이 무엇을 따졌는지를 보면 공방이 얼마나 치열하였을지 짐작이 간다. 화물창은 선적 전에 찬 바닷물로 네 시간 씻고 증류수로 헹군 뒤 환기하고 걸레로 훔치고 말리는 순서로 청소되었다. 검정인은 첫 점검에서 부적합 판정을 내렸고, 다시 청소한 뒤에야 청결증명서를 내주었다. 적하보험자는 그래도 황산이 83.1ppm 남아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법원은 그 농도라면 2000t 화물에 황산이 100리터 가까이 남아 있었다는 뜻인데 청소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그만한 양을 놓칠 수는 없다고 보았다. 황산만으로는 페놀이 변색하지 않는다는 감정 결과도 있었다. 문제의 화물창은 배관이 다른 화물창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온도는 항해 중 8일간 기준인 섭씨 55도 아래로 내려갔지만 5도 이상 떨어진 적은 없었고, 하루 3도 이상 가열한 적도 없었는데, 페놀은 그 정도 온도 변화로는 변색하지 않는다. 황산으로는 스테인리스가 녹슬지 않고, 철이 닿아도 페놀은 변색하지 않는다. 적하보험자가 세운 범인 후보는 이렇게 하나씩 제외되었다.

 
▲울산항 액체부두 전경


결국 샘플이 범인을 가렸다

그러나 범인 후보를 지운 것만으로 운송인이 이긴 것은 아니다. 운송인의 과실이 추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운송인은 페놀에 고유한 하자가 있었음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고 그 증명을 해 낸 것이 바로 샘플이었다. 특히 매니폴드 샘플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매니폴드에서 채취한 샘플은 화물창에 들어간 적 없는 페놀인데, 양하할 때 검사해 보니 색상 수치가 25였다. 화물창에 들어가지 않은 페놀이 화물창 안의 페놀만큼 변하였다면 원인이 화물창에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페놀에는 극미량의 불안정한 불순물이 남아 온도를 올리지 않아도 스스로 반응하여 변색을 일으키고, 그 반응은 시간과 온도에 따라 빨라진다는 감정 결과도 더해졌다. 법원은 결국 운송인에게 고유하자 면책을 인정하였다.

이처럼 액체화물의 오염·변질 사고에 적용되는 법리는 추리소설의 해법처럼 논리에 맞고 상식에도 맞는다. 그러나 법리는 단순해 보여도 실제 사건은 기록과 샘플에서 갈린다. 선적할 때 5였던 숫자가 양하할 때 26이 되기까지,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말해 준 것은 배가 미리 떠 두었던 샘플 한 병이었다. 따라서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항상 자료를 완비하여 만약의 경우에 대비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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