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국가들은 기간산업 보호를 명분으로 컨테이너선 해운산업의 공동행위를 인정하고 있다. 무분별한 운임경쟁으로 경쟁선사들이 도산하고 시장이 독과점으로 치달을 경우 그 피해는 오롯이 화주의 몫으로 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제도적인 지원을 근거로 해운기업들은 운임동맹(shipping conference)을 결성해 시장 안정화를 꾀해왔다. 구주운임동맹(FEFC)의 해체 이후 1000달러 이상을 호가하던 아시아-유럽 간 뱃삯이 서울-부산 간 육상운송료보다 낮은 수준으로 떨어진 데서 해운카르텔의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유럽항로의 혼란은 한진해운 파산의 도화선이 됐다.
우리나라도 해운산업의 공동행위를 인정하는 나라 중 하나다. 해운법에선 해수부장관 신고를 전제로 외항해운기업의 공동행위를 허용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 여러 운임협의체가 활동 중이다.
하지만 동맹이 존재한다고 해서 운임이 선사 마음대로 움직이는 건 아니다. 수요와 공급이라는 시장논리를 근본적으로 거스를 순 없는 까닭이다. 특히 공급이 몰리는 과열경쟁시장에선 손익분기점을 밑도는 바닥권을 형성하기 일쑤다.
현재 한중항로 수출운임은 20달러가 채 안 된다. 경부선 KTX 요금보다 낮은 돈으로 중국까지 컨테이너 하나를 실어보낼 수 있다는 얘기다. 원가에도 크게 못 미치는 운임 수준은 많은 연근해선사들이 적자에 허덕이는 근본적인 이유다.
이런 가운데 지난 5일과 6일 이틀간 공정거래위원회에서 현대상선과 흥아해운 장금상선 3곳과 한중항로협의체 동남아항로협의체를 방문해 대대적인 가격 담합 조사를 벌였다. 해운사 영업담당자들의 컴퓨터와 휴대폰 복사본이 모두 공정위로 넘어갔다고 한다. 공정위가 선사를 직접 방문해 압수수색에 가까운 조사를 벌인 건 한국 해운 역사상 처음이다.
이번 조사는 인천에 소재한 목재합판유통협회의 진정이 배경이 됐다. 목재수입상들은 선사들이 올해 들어 유가 급등에 대응해 받기 시작한 긴급비용보전할증료(ECRS)를 문제 삼았다. 베트남 현지에서 해상운송료를 지불하는 조건(C&F)으로 목재를 수입해왔음에도 선사들이 담합해 도착항에서 수입화주에게 ECRS를 청구했다는 주장이다.
화주의 불만을 십분 이해하더라도 공정위의 이번 조사는 몇 가지 지점에서 아쉬움을 준다. 우선 조사 대상이 된 베트남산 수입목재가 가장 헐값에 운송되는 품목이란 점이다. 선사들은 목재 운송료가 지난해까지 20달러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ECRS를 붙이면서 그나마 100달러로 올랐지만 손익분기점 아래인 건 마찬가지다. 운송원가를 밑도는 운임을 끌어올려 적자에서 벗어나고자 한 행위가 공정거래 위반 사유인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게다가 ECRS는 도착지 징수가 원칙이어서 무역조건과는 상관없이 수입화주에게 일괄적으로 부과했다는 선사들의 해명도 들린다.
해운법에서 규정한 해운업계의 공동행위가 공정위 조사로 위축될 수 있다는 점도 우려스럽다. 해운업계 일각에선 해운법과 공정거래법의 이해 충돌이 향후 운임협의체 존폐 논란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외국선사는 빼놓은 채 국적선사에만 조사의 칼끝을 겨눈 것을 두고 형평성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도 포착된다.
문재인 정부는 한진해운 파산 사태로 붕괴된 한국해운을 다시 살리기 위해 해운강국 건설을 100대 국정과제에 포함하고 실천방안인 해운재건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올해는 해양진흥공사가 설립돼 해운의 안전판 역할을 충실히 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정부의 이 같은 노력에도 아직까지 한국해운호는 어둠의 망망대해에서 힘든 노정을 이어가는 실정이다. 가뜩이나 쪼그라든 한국해운이 공정위 조사로 더욱 움츠러드는 결과를 낳아선 안 된다. 한 치의 치우침 없는 공정한 조사와 현명한 판단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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