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금융권이 조선업황이 안 좋다고 경쟁력 있는 기업들까지 홀대하는 건 너무한 것 아닌가요. 중소기업들이 최소한 숨통을 틔울 수 있는 공간을 어느 정도 마련해줘야 한다고 봅니다.” 한 중소조선사 관계자의 넋두리다.
12척. 올해 상반기 대한조선(4척) 삼강S&C(4척) 대선조선(2척) STX조선해양(2척) 등 국내 중견조선사들이 수주한 선박들이다. 전 세계 발주량 증가로 조선사들의 팍팍했던 살림살이가 조금은 나아졌다지만 대부분의 건조 물량은 대형조선사에 쏠렸다. 지난해까지 간간히 들려왔던 국내 중형조선소들의 수주낭보는 올 들어 거의 끊기다시피 하고 있다.
수출입은행에 따르면 중견조선사들의 올해 상반기 수주량은 전년 대비 24% 후퇴한 27만CGT(수정환산톤수)를 기록했다. 우리나라 전체 수주량 496만CGT 대비 5.4%에 불과한 수치다.
일감 역시 바닥을 보이고 있다. 한 때 ‘조선 빅4’로 불렸던 STX조선해양의 수주잔량은 23만CGT로 급감했으며, 성동조선해양 대선조선은 클락슨 순위집계에서 빠지는 수모를 겪었다.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 등 이른바 ‘조선 빅3’의 수주잔량이 1400만CGT에 육박한 것과 비교하면 대조적이다.
중소조선사들은 저가수주를 무기로 내세운 중국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일감 확보에 사력을 다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과의 경쟁에 앞서 금융권의 RG(선수금환급보증) 발급 거부는 조선사들의 수주 활로를 가로막는 주범으로 꼽히고 있다. 올해 초 정부가 RG를 적극적으로 발급하겠다고 입장을 표명했지만 현장에선 다른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RG는 조선사가 부도나거나 배를 제때 건조하지 못할 때 선주가 조선사에 지급한 선수금을 은행이 대신 물어주는 지급 보증이다. RG 발급이 막힌다는 건 수주량 감소로 이어져 조선사들의 일감 확보에 큰 영향을 미치며 폐업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낳기도 한다.
올해 STX조선해양 한국야나세 삼강S&C 등의 조선사들은 RG 발급이 이뤄지지 않은 탓에 선박 수주를 눈앞에서 놓쳤다. STX조선의 대주주인 산업은행은 자산매각이 원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RG 발급을 거부했다. 현재 RG 발급 기준은 신용등급에 맞춰져 있다 보니 등급이 낮은 중소형조선사들로선 일감 확보가 쉽지 않다. RG 발급 수수료 또한 0.3~0.5% 수준인 대형조선사와 비교해 몇 배나 많은 2~3%를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금융권의 RG 발급은 신용등급이 상대적으로 높은 대기업에 쏠리고 있다. 자유한국당 정유섭 의원에 따르면 지난해 은행권의 조선사 대상 RG 발급금액 6조1400억원 중 중소조선사에 발급된 금액은 단 0.4%인 272억원에 그친 것으로 드러났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대형조선사에 지원되는 액수 중 단 1%만이라도 경쟁력 있는 중소기업에 투입돼야 한다는 하소연이 나오고 있다.
일감절벽 여파로 중소조선사들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 있다. 정부와 금융권이 단지 조선업이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경쟁력 있는 조선소까지 방관한다면 기업들의 줄도산이 현실화될 수 밖에 없다. 중소조선소가 건조해왔던 선박이 중국으로 이탈할 경우 우리나라의 고용환경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RG 발급 가이드라인을 완화해 중소조선사들이 생존할 수 있는 활로를 열어줘야 하는 이유다. 5000억~1조원 규모의 별도 펀드를 조성해 중소조선소를 지원하는 방안도 고려될 만하다.
9월14일엔 조선업계 최대 잔치인 15번째 ‘조선해양의 날’ 기념식이 열린다. 대기업과 중소조선사들의 양극화가 더욱 심해진다면 조선해양행사는 ‘반쪽짜리’에 그칠 수밖에 없다. 수주량 감소로 몸살을 앓고 있는 중소조선에 RG 발급이 원활히 이뤄지고 기업들이 숨 쉴 수 있는 생태계가 조성될 때 조선해양인들의 잔치도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기업과 정부 금융권의 노력으로 가시밭길을 걷고 있는 중소조선이 반등하길 기대해본다.
< 최성훈 기자 shchoi@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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