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국가주석은 작년11월 중국 최고지도부 7명이 모두 참석한 회의에서 주변국외교의 키워드로 ‘친(親)·성(誠)·혜(惠)·용(容)’네 글자를 제시했다. 주변국과 친하게 지내면서 성의를 다하고, 중국의 발전 혜택을 나누면서 포용하겠다는 의미였다.
2014년 1월 외신 인터뷰에서는 “’투키디데스의 함정’을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중은 그런 전철을 밟지 말자는 것이었다. ‘시진핑 식(式) 외교’는 주변국들을 끌어안으면서 미국과 충돌을 피하겠다는 의미로 읽혔다.
기원전 5세기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벌인 스파르타와 아테네를 연상시킨다. 그리스 최강이던 스파르타는 급부상한 아테네에 자원과 인재를 속속 뺏기자 전쟁을 벌였다. 혈투 끝에 두 나라가 다 몰락하자 어부지리를 얻은 마케도니아가 그리스 전체를 차지했다.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기존 패권국과 신흥 강국의 대립이 전쟁을 야기하는 이런 과정을 ‘투키디데스 함정’이라고 명명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 낀 한반도 또한 투키디데스 함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처지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힘을 합쳐 입지를 넓혀도 모자랄 판에 한쪽은 조잡한 무인기를 날려대고 한쪽은 정쟁으로 일관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스파르타와 아테네 모두 무너졌다는 교훈을 되새겨야 할 나라는 미국과 중국만이 아니다. 그러나 최근 중국의 주변국 외교는 ‘친·성·혜·용’과는 거리가 멀다. 중국은 5월 초 베트남과 영유권 분쟁 중인 남중국해에 1조원짜리 석유시추선을 일방적으로 설치했다. 작년 10월 리커창 총리가 베트남을 방문해 “남중국해 석유와 가스전을 공동으로 개발하자”고 약속했던 것을 180도 뒤집은 것이다. 또 필리핀과 영유권 분쟁 중인 해역에는 군용 비행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이런 조치는 지난 4월말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일본과 동남아시아를 순방한 시점과 궤를 같이한다. 당시 오바마 대통령은 중·일 분쟁 지역인 댜오위다오가 “미·일 안보조약의 적용 대상”이라고 했고, 필리핀과는 22년 만의 미군 복귀에 합의했다. 중국의 주변국 외교는 결국 미·중 외교의 종속 변수라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은 미국과도 충돌을 피하지 않는 분위기다. 팡펑후이(房峰輝) 중국군 총참모장은 지난달 16일 미군 심장부인 펜타곤(미 국방부 청사)에서 “조상이 물려준 땅을 한 치도 빼앗길 수 없다”며 “석유 시추를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은 영토·주권 등 이른바 ‘핵심 이익’이 걸린 문제라면 ‘투키디데스의 함정’에도 기꺼이 뛰어들겠다는 태도다.
5월20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중국 방문을 앞두고 최근 모스크바에서 중국 매체들과 인터뷰를 갖고 “중국은 신뢰할 수 있는 친구”라고 밝혔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달 20~21일 상하이에서 열리는 ‘아시아 교류 및 신뢰 구축 정상회의(CICA)’에 참석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두 사람의 만남은 작년 이후에만 6번째다. 두 사람은 또 지난달 20일 시작하는 중·러 합동 해상훈련의 개막식에도 나란히 참석했다. 이번 훈련은 중·일 분쟁 지역인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 인근 해역에서 시행된다. 중·러 전함 16척과 잠수함·전투기 등이 대거 동원된다. 푸틴 대통령은 인터뷰에서 “우리(중·러)는 역사를 제멋대로 고치고 파시스트를 미화하려는 시도를 계속 저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의 과거사 왜곡을 비판한 것이다. 그는 “러시아 동포 수천명이 (2차 대전 때) 중국 동북지역을 침략자(일제)의 손에서 구출하기 위해 생명을 바쳤다”며 중국과의 역사적 유대도 강조했다. 중·러가 동아시아 지역 안보와 역사 문제에서 미·일 동맹에 공동으로 견제 전선을 펼치는 모양새다.
베이징대 역사학부 김동길 교수는 이날 “현재 중·러 관계는 6·25 전쟁 직후인 1950년대 중반 이후 60여년 만에 최고의 밀월 기를 구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20세기 이후 중국·러시아(소련 포함) 관계는 1921년 중국공산당 창당을 소련공산당이 지원하면서 본격화한다. 중·소관계의 1차 밀월 기는 중국이 소련의 요청으로 6·25 전쟁에 참전하면서 형성됐다. 소련은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치른 중국에 경제 부흥을 위한 자금과 기술을 듬뿍 지원했다. 1953년 중국의 1차 경제개발 계획이 소련식 공업화 모델을 채택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그러나 양국 관계는 1960년 이른바 ‘중·소 이념 분쟁’으로 금이 가기 시작했다. 당시 소련은 중국과 국경분쟁 중이던 인도에 최신 무기를 팔았고, 중국은 예전처럼 소련에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이런 갈등은 1969년 국경선을 놓고 총격전을 벌이는 사태로 번졌다. 중·소 국경분쟁은 1986년 고르바초프가 양보할 뜻을 밝히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중·러 밀월은 1950년대와 현재 모두 최강국인 미국이 중요 변수다. 그러나 60년 전 양국을 묶어준 끈이 ‘이념(공산주의)’이었다면 지금은 ‘실리(경제·외교적 이익)’라는 분석이 많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크림 반도를 합병하고 나서 미국 등 서방국가의 제재와 투자 감소에 직면해 있다. 중국도 남중국해에서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베트남·필리핀과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다. 일본과는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를 놓고 대치중이다. 중·러 모두 이념보다 상대의 실질적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다.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 기업인을 대거 이끌고 방중하고, 중·러의 합동훈련 장소가 댜오위다오 부근인 것은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아무 때나 중국이 주변국과 미국을 향해 무조건 낯을 붉히는 것은 아니다. 시 주석은 세계적 명마인 ‘한혈마(汗血馬)’를 선물로 들고 온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과 전통적 우방국인 파키스탄 국회 지도자를 극진히 환대했다. 중국은 미국의 해상 연합 훈련 ‘노하우’를 배우기 위해 6~8월 미군 주도로 열리는 ‘환태평양합동군사훈련(림팩)’에 사상 처음 참가하기로 했다고 한다. 또 시 주석은 6~8월 중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중국 최고 지도자가 집권 이후 평양보다 서울을 먼저 찾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요즘 한·중 관계가 수교 이후 가장 좋다는 평가가 많다. 현재 중국은 한국을 ‘친·성·혜·용’으로 대접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중국은 북한 급변 등 한반도 상황을 놓고 미국과 충돌하고, 한반도 문제가 중국의 영토·주권을 침범하는 위기가 온다면 언제든 낯빛을 바꿀 수 있다. 언제나!< 코리아쉬핑가제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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