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7-29 10:28
KSG에세이/ 무늬만 海技士 평생을 짝퉁으로 살며 얻은 벼슬 “해운계 甘草”(8)
서대남 편집위원
G-5 海運韓國을 돌이켜 보는 추억과 回想의 旅路 - (8)
또 한국해대 실습선 ‘한바다호’승조원들의 대우가 일반 상선대우에 크게 미치지 못하여 그 대책을 장고한 끝에 나온 결과가 국적선이건 외국적선을 막론하고 한국배출 해기사가 승선한 5000총톤 이상의 선박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척당 2만원씩을 갹출키로 하고 협회 해무부장이 징수를 맡아 직무규정에도 없는 악명높은 세리(稅吏) 노릇을 해야만 했던 기억은 참으로 이채롭다.
금세 국립 목포해대에서도 누구는 인삼뿌리 누구는 무우뿌리의 ‘나도 밤나무’논리로 강력한 지원요청을 해 와 ‘유달호’에도 즉시 지원을 하지 않을수 없어 징수액을 높이기위해 아예 퇴임한 초대 선주협회 김병두 전무이사를 강제 징수전담 순회특사로 임명해서 해외취업선사들이 몰려있는 부산지역을 비롯한 전국을 두루 돌며 실습선 지원 특별회비를 현지 독려했던바 그런 일이 지금 같으면 가능했을까? 호랑이 담배피우던 시절 이야기 같다.
그래서 해외취업 외국선사들은 “국립대학이 해기사를 양성하는데 필요한 비용의 일부를 외국의 민간기업에 떠맡기는 처사는 한국정부의 국고를 지원하라는 말인데 이를 규정한 강제징수 국제 조세법규가 있냐?”며 반발이 심하자 미납의 경우는 한술 더 떠 당해선박에의 해기사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으름짱을 놓기에 이르렀고 막판에는국제법에 의해 소송을 제기하겠다며 맞장구를 치고 나온건 당시 한국해운계의 시대상을 대번하는 지독한 의욕과 발전과정의 자전적 히스토리 같아 다시 한번 돌이켜 보니 웃음이 나기도 한다.
당시 선사들은 국비로 양성해 놓은 완제품(?) 해기사는 선호했으나 이들의 양성과 자격취득 및 배출의 관건인 승선실습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알면서도 주부식 비용이나 선실확충과 보험문제등 선주부담을 피하려고 실습생을 받아 본선에서 실습을 시키는 일에는 너무나 인색했었다.
특히 항해나 기관 보다 통신사 실습의 경우는 더욱 힘들어 취업은 차치하고 졸업이나 자격취득길 마저 막히게 되어 필자가 학부모와 함께 선사를 찾아 처절하게 읍소하며 문전 실습걸식(?)을 해야만 했던 일은 실로 너무나 가슴아픈 처절한 기억이다.
한가지 목포해대의 경우 실습선이 소화 못하는 인원을 필자가 각 선사에 눈물로 애걸복걸하여 분산실습을 적극 도왔던 일과 이에 보답한다며 학장과 실습담당이 철마다 잊지않고 기차편으로 산 낙지 바스킷을 몸소 들고와서 협회 직원들과 함께 왁자지껄 웃음꽃을 피우며 회식을 하던 일은 이제 일흔에 이른 필자에겐 참으로 오래도록 길이 간직하고픈 산학협동의 아름답고 보람있는 추억으로 남겨두고 싶다.
수년전에 작고한 한국해대 10기와 9기 기관과 출신의 임정배학장과 조창희학장이 바로 그 주인공들로 그 열성은 오래 기억돼야 마땅한 분들.
한편 당시 80년도 통계로 외항 선복량은 국적선 448척 395만총톤, 국적취득조건부 나용선 82척 120만총톤으로 총 530척, 515만총톤에 달해 국취부 나용선의 비중이 하강추세를 보인 반면 계획조선에 의한 선복확충과 중고선 도입이 늘어나는 현상이 뚜렷했다.
선종별로는 벌크캐리어가 급격히 증가하여 점유비율도 전체 선복의 40%를 웃돌았고 정기선 항로망의 확충보강이 돋보였으며 구주항로에는 조양상선의 ‘코리안 찬스’호가 추가 투입되어 모두 3척으로 늘었고 호주항로도 조양이 ‘코리안 리더’호를 투입함으로써 대한선주의 북미 항로와 더불어 본격적인 국적선 원양정기항로 시대를 맞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이듬해 81년 12월 12일 단 한번도 배를 타 본적 없이 직무를 수행하느라고 쩔쩔매며 한많고 설움 많았던 짝퉁 해무부장 필자가 드디어 한국해대 35기들의 승선실습생 200명의 틈에끼어 ‘한바다’호를 타고 오매불망 꿈에 그리던 역사적인 처녀 승선길의 대 장정에 오른다.
날씨마저 을씨년스럽던 초겨울 해질 무렵, 이른바 필자로선 ‘Maiden Voyage’ 첫 출항을 위해 배에 오르던 감격과 닻을 올리고 뭇 환송객들의 축하를 받으며 오륙도를 뒤로하고 서서히 부산항을 떠나던 기억은 30년이 지난 이 순간에도 뇌리에 아로새겨져 역력하다.
신민교 학장의 배웅을 받으며 떠났던 실습선은 일반 선박과는 다른 교육직제로서 선장위에 연습감(당시 민우홍교수)이란 최고위직이 동승하고 다음에 선기장을 비롯한 운항라인과 항해중 교육을 총괄하는 교관장이란 직책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고 선장에는 필자가 지금도 그때의 인연으로 해사관련 각종 행사때마다 함께하면 어김없이 소개하는 호칭 ‘전설적인 실습선 선장 허일교수’로 항해과 15기였고 엔진치프는 주일 예배를 인도하던 기관과 22기의 배종욱 기관장으로 잔잔하고 인자하며 턱수염 많던 모습이 아직도 또렷이 기억난다.
흔히 해양계 대학을 ‘상선사관학교’라고 칭하듯 규율이나 위계질서가 엄격해 식사할때나 각종 행사시 좌석배치 등이 철저하게 군대조직 질서를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소위 살롱이라고 불리는 사관식당은 철저하게 연습감을 중심으로 선기장 1항기사 2항기사 등의 서열로 배열돼 있었는데 과분하게도 타의에 의해 하루에 꼬박 네끼가 기본인 필자의 식탁 고정좌석은 연습감의 맞은편 즉 동급의 대칭위치에 배치하는 바람에 바늘방석 같은 VIP대접이 되레 불편하기 이를데 없었다.
선내에는 필자 외에도 비상시를 대비한 의사 1명과 견학교수 1명등 2명이 열외로 승선을 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좌석은 모두 3항기사 다음에 배치되어 있어 차별대우에 대한 모종의 야릇한 갈등이 표면화 되기도 했던바 아마 당시는 필자가 거액(?)의 당해 선박 운항 후원금을 갖다 바치는 막강한 실무 책임자라는 걸 몰랐고 수년후 필자가 부산근무를 하러 갔을때 회동을 주선한 자리에서 뒤늦게 이를 밝혀 과연 그땐 그럴만 했었구나 하고 크게 놀라며 파안대소 했던 일은 빛바랜 에피소드로 남는다.
43일간의 실습계획 기간중 첫 기항지는 대만의 키룽항으로 스피드 5~6낫트, 3~4일간을 항행하는 동안 실습학생들 대다수가 뱃멀미에 심한 구토까지 겹쳐 어리둥절하며 허둥지둥 헤매다가 기진맥진해서 막판엔 거의가 드러눕고 말아버리니 가히 치열한 전쟁터의 야전병원 응급실을 방불케 했다.
그 난리통에도 유아독존 독야청청 희귀현상으로 예외 한건! 심지어 상당수의 운항 사관요원들과 선원들 및 교관들마저 면역은 됐으되 멀미의 고통을 겪는가 하면 이럴 경우에 대비해 동승한 의사마저 길게 누워 버리는데도 어찌된 셈인지 처음 바닷길에 오른 열외 일행중 유독 필자만이 멀미는 커녕 눈도 까딱않고 멀쩡하게 선실과 갑판을 오가니 모두가 놀랄 노짜에 참으로 요상타고 쑥덕이는게 아닌가.
잘은 몰라도 산별노조와 근로조건개선, 임금인상, 복지문제, 관련법령 개정등 단체협약 협상테이블의 카운터파트인 사용자 단체의 실무책임자인 선주협회의 해무부장이 승선견학이란 명분이긴 하지만 실은 작업환경이나 노동강도등 노사협상 카드로 사용할 현장파악의 첩보성을 띄고 탔으려니, 모두가 은근히 필자가 엉금엉금 기며 초죽음을 당하는 꼴이나 눈물이 쏙 빠지는 고초라도 겪기를 바라는 눈치가 역력했었기 때문이다.
육지와 가족과 떨어진 상태에서 해상근로란 위험성에 노출된 채 당직이 비록 8시간이라지만 승선하고 있다는 자체가 노동에 속하므로 하루 24시간 전체가 근무시간으로 간주되기에 선상생활이 얼마나 어렵단걸 잘 알고있는 필자였지만 만의 일이라도 체험을 통해 이를 가시적으로 파악케 하는 시위현장(?)으로서의 활용저의는 일단 무산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혼자 쾌재를 불렀다.
비록 본선에 올라 항해를 하긴 난생 처음이지만 교통부 출입기자 시절부터 10년이상을 집중적으로 바다 해짜(海字)에 올인하며 육지에서도 늘 승선분위기에 젖어 몰입근무를 한 그 경력도 바로 승선경력이었구나 하는 자긍심도 생겨 그래도 짝퉁치고는 일말의 뱃사람 소질이 있다고 자위를 하기에 이르렀다.
첫 경험으로 현지 답사를 통해 항만과 컨테이너부두를 견학하고 타이페이 일원을 몽땅 관광후에 키룽항을 떠나차항으로 버마(지금의 미얀마)의 랑군(지금의 양곤)을 향해 드디어 본격적인 대양의 바닷길 롱저니의 열흘이 넘는 긴 항해가 시작되고 말라카 해협을 지나 인도양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황천을 만나기도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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