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30 09:12

기고/ 우크라이나 오데사항과 밀

변호사가 된 마도로스의 세상이야기(44)
법무법인 대륙아주 성우린 변호사(해양수산부·해양경찰청 고문변호사)


필자가 상선에서 2등 항해사로 근무하던 때이니 벌써 10년도 훌쩍 넘은 일이다. 그날만 떠올리면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보니 그날 정말 부끄러웠나보다.

당시 근무하던 선박은 산적화물선(Dry Bulk Carrier)으로 공선 상태로 흑해를 지나 우크라이나 오데사항에 입항하여 곡물 중 하나인 ‘밀’을 선적했다. 오데사항에 입항하여 여느 때와 같이 06시부터 정오까지, 18시부터 24시까지 2등 항해사에게 맡겨진 하역당직 업무를 수행했다. 

당시 접안한 오데사항 부두에서 밀을 적하한 방식은, ‘사일로(Silo, 곡물이나 사료 같은 유동상태의 화물이나, 시멘트와 같은 가루 형태의 화물을 저장하도록 설치된 저장탱크)’라고 불리는 원통형 저장탱크에 있는 화물을 선박 내 화물창으로 쏟아내는 방식이었다. 

입항 후 작업을 시작하여 사일로에서 떨어지는 수천 t의 밀이 각 화물창 내로 쌓여가기 시작했다. 

며칠 후 3등 항해사가 18시에 당직 교대를 하면서 필자에게 4번 화물창의 적하가 이번 당직 시간 내에 종료될 수도 있으니 확인하라는 이야기를 했다. 당직 시작 후 분진 마스크를 쓰고 4번 화물창 근처로 가보니 화물창에 화물이 생각보다 많이 차 있지 않아, 당직 시간 내 종료되지 않을 것 같다는 안일한 생각도 했다. 

그런데 당직이 끝나갈 때쯤 갑판원으로부터 화물창 위로 밀이 너무 올라와 버렸다는 말을 듣고 부리나케 화물창으로 달려갔는데, 화물창 너머 밀이 넘쳐 올라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사일로는 멈추지 않고 계속 밀을 쏟아내고 있었다. 부두로 달려 나가 현지 화물 감독에게 사일로를 정지해달라는 말을 했고 비로소 사일로가 멈출 수 있었다.

결국 화물창의 해치커버를 닫을 수 없을 정도로 과적이 되어 버렸다. 현지 화물 감독이 당시 신경을 쓰지 않은 책임도 있었지만 이를 수시로 확인하지 않은 하역 담당사관인 내 책임이 더 컸고, 결과적으로 이 사단이 난 것이었다. 

한참 어린 필자에게 항상 존댓말을 쓰며 소위 ‘영국의 신사’와도 같았던 선장님도 이 사건에 대해서는 필자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필자는 죄송하다는 말을 연거푸 하며 부끄러워 얼굴이 달아올랐다.

다음 날 아침 선원들이 전부 나와 삽으로 화물창에 있는 밀을 직접 퍼냈다. 한 식구인 다른 선원들께 송구한 마음이 무겁게 느껴졌고, 우리가 쉽게 먹는 밀의 물리적인 무게도 정말 크다는 걸 느꼈다. 

이후 우리 선박은 오데사항에서 별다른 문제없이 출항을 했지만 한 동안은 밀가루 음식을 입에 데지도 못했고 밀이라면 학을 뗐다. 오데사항과 밀은 필자에게 그런 존재였다.

최근 그 때의 기억을 다시 떠오르게 하는 뉴스를 보았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간 전쟁으로 우크라이나 오데사항이 봉쇄되면서 세계 식량 위기가 유발되고 있다는 뉴스였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에 따르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세계 밀의 28%, 보리 29%, 옥수수 15%, 해바라기유 75%를 공급하고, 우크라이나에서 수출되는 식량은 4억명을 먹일 수 있는 분량이라고 한다. 오데사항의 봉쇄가 세계의 식량위기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누구든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필자가 오데사항에서 항해사로서 밀을 하역하는 업무를 하며 실수를 했었지만 그 때 업무는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었고, 항만이 봉쇄되는 등 물류가 막히면 누군가에게는 생존의 문제로도 직결될 수 있다는 사실에 흠칫 놀랐다. 

옛말에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오데사항과 밀은 필자에게 이제 더 이상 부끄러운 과거의 대상이 아니라,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맡은 일을 하는 각 해운·물류 종사자에 대한 존경의 표상이다.

마지막으로, 우크라이나 러시아 간 전쟁이 조속히 끝나서, 포격으로 예전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운 오데사항과 우크라이나 전역에 있는 모든 국민들에게 다시 평화가 찾아오길 기원해본다.

▲ 성우린 변호사는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하기 전 팬오션에서 상선 항해사로 근무하며 벌크선 컨테이너선 유조선 등 다양한 선종에서 승선 경험을 쌓았다. 배에서 내린 뒤 대한민국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현재 로펌에서 다양한 해운·조선·물류기업의 송무와 법률자문을 담당하고 있다.   

< 코리아쉬핑가제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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