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엄혹한 혼돈의 시대를 살고 있다. 과거 한반도는 역내 패권국이었던 청나라가 쇠락하는 상황에서 20세기를 맞이했다. 일본은 새로이 부상하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역외 패권국인 영국과 협력해 양측 간 대립이 첨예화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독도와 거문도가 각각 일본과 영국에 의해 강점됐고, 결국 주권을 빼앗겼다. 21세기 전환기 한반도는 일본이 현 패권국인 미국과 협력해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는 갈등 구조 속에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이에 대응해 합력(合力) 체제를 강화하면서 태풍의 눈이 되고 있다.
21세기 한반도 정세는 20세기보다 더 복잡하다. 패러다임의 변화라 할 정도로 기존 질서가 동시다발적으로 붕괴하거나 붕괴돼가는 것을 목도한다. 20세기적인 냉전적 대립 구조는 좀 더 복잡하게 얽히면서 이제 누가 누구 편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북한은 핵 문제로 중국과 대립하고 있고, 한·중 관계는 북·중 관계의 수준을 넘어 진전되고 있다. 일본은 한국과의 관계에 개의치 않고 북한과 양자 협상을 진행하고, 한·일 관계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있다. 일본은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면서도 동시에 미국의 의지에 반해 러시아와 북방 영토 및 에너지 관련 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있다.
전에 없던 일이다. 중·러는 과거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상호 핵심 이익을 지지하고 지원하기로 했다. 이러한 변화가 가능해진 이면에는 미·중 관계의 변화가 있다. 즉, 중국이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부상하고 있고, 미국은 패권국으로서의 자신감을 잃어가면서 기존 지역 질서의 구심력이 약화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다른 국가들과의 전략적 외교는 성공적인데 유독 한국과 중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는 비(非)전략적이고 감정적이다. 한국과 중국도 아베 총리가 이끄는 일본의 과거사 인식에 대해 불편한 진실을 계속 제기하고 있다. 한국이 일본에 대해 강한 입장을 견지할 수 있는 이유는 일본이 중국과 거의 적대적일 만큼 나쁜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쿠다 전 일본 총리가 방중 한 7월말 이후 중국과 일본은 11월10일 댜오위다오(일본 명 ‘센가꾸’)문제를 놓고 베이징에서 20여 분 간 회담했다. 양국은 ‘중·일 관계 개선을 향한 교섭’이라는 합의문을 동시에 발표하고 정치, 외교, 안보 분야에서 차차 대화를 재개하기로 합의한 것은 일본에 대해 강경 외교를 계속하는 한국의 입지에 제동이 걸렸다.
이처럼 혼돈스러운 국제정치 상황에도 불구하고 20세기와 본질이 동일한 것은 영원한 우방도 그리고 적국 관계가 없다는 점이다. 국력과 이해관계의 변화가 이 복잡한 현상을 읽어내는 요체다.
21세기 한반도 상황에서 우리의 정책 목표가 생존을 확보하면서 한반도 통일이라는 현상 변경까지도 추구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질서에서 해법을 찾기에는 강자에 유리한 그 질서가 그리 신뢰할 만하거나 호의적이지만은 않아 보인다. 강대국이 아닌 중견 국가로서 그 해법은 여전히 20세기와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는 내외적인 국가 역량을 통합하고 강화하는 데 있다.
국가 내부 역량을 증대시키는 역내 균형법과 대외적 정세를 잘 활용하면서 국가의 이익을 도모하는 역외 균형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다. 전자는 국내 통합의 문제이고 후자는 타 국가와 동맹이나 제휴의 문제로 귀결된다.
역사를 돌아보면 지도자나 지배 계급이 무능하여 사리(私利)가 횡행하고 국가 통합에 실패할 때 국가의 뿌리는 흔들린다. 그러다가 외부 세력의 변화에 명민하게 대응하지 못했을 때 그 국가는 존망의 위기에 처한다. 혹자는 우리가 현재 세계 15위권의 경제 대국이고 한·미 동맹이라는 견고한 방패막이 있어 과거와는 확연히 다르다고 말한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명(明)과 청(淸)이라는 든든한 (비대칭적인) 동맹도 침탈, 전쟁, 패망에서 지켜주지 못했다. 세계15위권의 경제 대국이 민족 및 국가 통합은커녕 북한의 핵 위협과 미·중의 세력 전 속에서 생존을 추구하면서 타개 전략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다행히 21세기 미·중 관계는 20세기 제로섬적인 경쟁이 아니라 견제와 협력의 양면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과거의 실패를 교훈 삼아 타개책을 이야기하자면 대내적으로 공동체성을 증진시키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내적인 통합을 촉진하는 것은 국력 증진의 핵심 요소이다. 대외적으로는 미·중 간 ‘협력’을 촉진하는 전략적 선택을 통해 역내 긍정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이는 일본이 미국과 연대해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는 전략적 선택을 한 것과는 상반된다.
우리의 대외전략은 역내 모든 국가와 협력 관계를 증진시키는 것이다. 대립의 강화 및 구조화는 우리의 이익과 배치된다. 미·중 관계의 양면 중 ‘협력’의 측면에 더 긍정적인 역할을 담당할수록 우리의 국가 역량도 더 강화되고, 한·미 동맹에도 공헌하면서 동시에 역내 안정 촉진자로서의 역할도 더 가능하게 해줄 것이다.
중국이 내부적으로 잠재적인 경제·정치적 불안정이 심하다는 점에서 한국과 미국이 택해야 하는 가장 현명한 정책은 중국이 계속해서 경제적 성장과 국내 정치적 안정에 집중할 수 있는 역내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중국은 경제 발전에 몰두할 수 있고 내부 정치 안정을 꾀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상호 간 이익을 증진시킬 수 있는 한·중간의 건강한 경제적 경쟁과 협력(이번 한·중FTA타결)이 포함된다. 또한 미국과 중국의 갈등을 완화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스마트하고 정치(精緻)한 외교정책을 펼치는 것도 들어간다.
한국의 과제는 과거의 역사와 심리적 경험에 비춰 한국을 지켜줄 강대국이 필요하다는 신화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한국은 중국과 미국 중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중국과 미국 모두가 필요로 하는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
대일외교는 일본과의 양자 간 외교관계에 그치는 단순한 방정식이 아니다.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한·일 관계를 읽을 줄 아는 혜안이 필요하다. 검증되지 않은 전제들을 갖고 강경한 대일 외교 기조만을 고집한다면 언젠가 낭패를 볼 가능성마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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