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7-14 10:26

이호영칼럼/ 청맥의 계절

이호영 함부르크항만청 한국대표

●●●늦은 봄 혹은 초여름, 교외로 나가 들판을 달리면 온 들판이 푸른 보리물결로 파도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럴 때면 늙은 소년의 생각은 수십 년 전 옛날로 돌아간다.

일요일이었던 그날도 대전의 한 주교관 뒤 언덕에는 푸른 보리밭이 훈훈한 바람에 물결치고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소년은 설레는 충동에 그랬는지 한 친구를 데리고 그 보리밭 언덕길로 산책을 나갔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시원한 바람을 핑계로 ‘그 소녀’가 살고 있는 집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로 올라갔던 것이다.

친구와 함께 푸른 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구름을 보는 사이사이, 그 소녀가 살고 있는 집을 바라봤지만 뜰 안쪽에 아무도 보이지 않아 소년은 김이 빠졌다.

하지만 언덕을 되짚어 내려오는 길에 소년은 정신이 번쩍 나는 장면에 움찔했다. 뜻밖에도 언덕 위로 그 소녀가 자기또래의 소녀와 함께 올라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교복이 아닌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소년의 가슴은 방망이질 쳤다. 혹시 그녀도 그 소년을 보러 올라오는 것인가? 그럴 것 같지는 않고…. 왜 남의 집을 엿보느냐고 따지러? 그것도 아닐 것 같고….

그녀와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동안 소년은 될 수 있으면 최대한 천천히 다가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한 속마음이 들키기라도 할까 염려했는지 소년의 걸음은 더욱 씩씩하게 빨라졌다. 소년은 그녀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기회를 잠시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그녀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고 바라봤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 역시 그를 빤히 보고 있었다. 다른 때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가령 교회 성가대에서 혹시라도 그녀와 소년의 눈길이 마주치면 어느 쪽이던 먼저 얼른 다른 데로 눈길을 돌리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은 그녀도 눈길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소년을 응시했다. 소년을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소년이 소녀의 곁을 지나가는 순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 마주 보았을 때 그녀가 피식 웃은 것이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소년은 그녀의 웃음이 무얼 뜻하는지 궁금했다. 한편으로는 그녀에게 무언가 반응을 보여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소년은 무심한 걸음으로 그냥 그녀를 저만치 지나치고 말았다.

그때의 풍속대로라면 발길을 돌려 “왜 사람을 보고 비웃느냐”고 시비조로 말을 걸며 첫 대화를 시도하는 게 보통이었는데 소년은 그런 유치한 것 말고 더 멋있게 대응하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그녀는 멀어지고 만 것이다.

옆에 있던 친구가 소년에게 “야, 쟤가 너보고 웃었어! 우리 따라가 볼까?” 했지만 소년은 아무 말도 못했다. 그 소년의 마음은 무작정 그녀에게 다시 가고 싶었으나 몸은 마음처럼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녀가 그를 보고 웃어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설레는 행복감에 어쩔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 때 이후로 소녀의 모습은 하얀 원피스를 입은 성숙한 여인의 모습으로 소년의 세상에 가득 찼고, 소년의 눈에서 마음으로 그 자리를 잡았다.

해마다 보리밭은 푸르고 그날 보리밭 언덕의 추억은 언제나 가슴이 설렌다. 그 때의 소년 소녀는 언제나 소년 소녀로 아름답기 때문이다. <코리아쉬핑가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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