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6-28 10:10
기고/ 남북해운합의서 체결, 내항해운활성화의 계기 돼야
중앙일보 디지털 국회의원 이 경 순
원래 길이란 건 없었다. 사람이 가니까 길이 생긴 것이다. 희미한 길이 하나 생기고 다른 사람도 그 길을 따라간다. 그러다 보니 길의 형상이 뚜렷해졌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남북통일의 길이다.
남북한이 지난 5일 평양에서 열린 ‘제9차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에서 해운합의서와 부속합의서를 교환함에 따라 분단 이후 간헐적으로 열렸던 남북한 뱃길이 사실상 전면 개방되는 기반이 마련돼, 17대 개원국회에서 동의를 받고 북한의 관련절차도 순조롭게 진행될 경우 이르면 8월 중 무역항 개방이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는 반가운 소식에 그간 수고해 주신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합의서에 따르면 북한은 남포·해주·고성·원산·흥남·청진·나진 등 7개항을 남측 선적(船籍) 선박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남한은 인천·군산·여수·부산·울산·포항·속초 등 7개항을 북한선적 선박에 개방키로 했다.
북한의 경우 무역항으로 사용중인 8곳 가운데 송림을 제외한 나머지 무역항 모두가 남한 선박에 개방되는 데다 합의서에 명시되지 않은 나머지 무역항도 사전허가를 받으면 이용이 가능해 사실상 북한의 모든 무역항이 남한 선박에 완전 개방되는 셈이다. 남북해운합의서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자국 측에서 승인하고 상대측의 허가를 받은 선박운항 보장
△항만 내에서 자국 측 선박과 동등한 대우 부여
△선박관련 서류와 선원 신분증명서 상호인정
△해양사고 시 등 상호협력
△선원 및 여객 상륙 가능. 신변안전과 무사귀환 보장
△선박운항 정보교환 및 기술교류
△해사당국간 합의기구 구성. 운영
△전화 등 유선통신망 확보 등이다.
남과 북은 쌍방간의 해상항로를 국가와 국가 사이가 아닌 민족내부의 항로로 인정하고 남북간 선박운항을 연안교역으로 규정함으로써 남북한 선박이 직접 상업용 물자 등을 운송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우리 내항해운업의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며, 앞으로는 남북 항로에 제3국 선박의 용선이 불필요해 용선료의 해외 유출을 방지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지금까지 남북이 교역할 때는 파나마·중국 등 제3국 선적 선박만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남한에서는 외항선사가 운항주체였다. 또 이용 가능한 무역항도 나진·남포·부산·인천 등 4개항에 불과했다.
따라서 기득권을 주장하는 외항선사들의 반발, 적격 내항해운업체의 지정, 부족한 적격선박을 제3국적선 용선으로 대체 투입하는 문제 등 몇 가지 문제가 예상된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본 협의서 취지대로 민족내부 항로이므로 내항해운업을 활성화하는 쪽으로 정책의 우선 순위가 주어져야 할 것이다. 기대되는 효과는 남북 양측이 각각 무역항 7곳을 상대방 선박에 개방함에 따라 남북 교역량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번 합의서 교환으로 정기항로를 개설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만큼 남북경협 속도에 따라 언제라도 물동량을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개성공단 조성 및 운영에 필요한 남측 물자를 해주항을 통해 운송하거나 개성공단에서 생산된 제품을 해상으로 수송할 경우, 시간이나 물류비용을 크게 낮출 수 있다는 점에서 초기 남북경협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해상을 통한 남북간 물동량이 언제 어느 정도 늘어날지는 정확히 예상하기 힘들지만 언제라도 운송량을 늘릴 수 있는 인프라는 조성되었다는 데 의미가 크며, 북한 각지에 있는 무역항이 열린 만큼 남북경협 속도도 빨라질 것만은 확실하다.
선박운항 면에서는 기존항로 보다 운항거리가 단축된 해상항로를 이용할 수 있게 됨으로써 항로단축과 함께 선박의 연료비 절감에 따른 경제적 효과가 있으며, 운항시간 절약이 가능하게 돼 한층 경쟁력 있는 선박운항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북한도 남북경협 문제 외에 내부교역 측면에서 물류비절감의 이득을 볼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북한 선박이 동쪽 항구에서 서쪽 항구로 운항할 때 남한의 군사작전구역(AAO) 바깥인 공해 상으로 운항해야 했으나 앞으로는 군사작전구역 안쪽에 설정된 항로를 이용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남한의 내항선도 기존 남한만의 짧은 연안항로가 연장되고, 동서(東西)로 왕복항차 운항이 가능하여 물류비절감을 통한 운항채산성을 제고할 수 있게 된다. 남북 해군 함정간 통신, 휴전선 인근 체제 선전물 제거, 남북한 주요 항구 개방 등 남북관계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그러나 이런 남북관계의 급진전을 뒷받침하는 국내법은 1990년 제정된 ‘남북 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이 전부라고 한다.
따라서 17대 국회는 △지금까지 통치 차원에서 진행된 각종 남북 합의에 법적 효력을 부여하는 규정, △남북관계를 국가간 관계가 아닌 내부관계로 파악하는 규정, △남북합의 문건에 실효성을 부여하는 절차 규정 등 변화된 남북관계의 현실을 반영하는 법제도의 정비를 서둘러야 할 것이다.
다만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정치상황에 관계없이 이번 합의가 지속될 수 있을지가 관건으로 꼽힌다. 따라서 새로 개설되는 남북한 항로가 앞으로 북측의 일방적인 태도 변화로 단절되지 않게 하는 제도적 보완책을 정식 합의문 교환 때까지 마련해야만 실질적인 민족내부항로를 구축하는 등 남북통일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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