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발 유럽 항로의 운임이 역대 최악을 기록한 와중에서도 정기선사들은 대형선 발주, 공동 운항, 합병 등 몸집 늘리기로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한 경쟁에 몰두하고 있다.
정기선 시장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2만TEU급 선박 발주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MSC는 2만TEU급 선박을 현대중공업에 발주했으며 머스크라인도 대우조선해양과 동급 선박 11척에 대한 신조 계약을 맺었다. 앞서 CMA CGM, OOCL, MOL 또한 2만TEU급 선박을 확보해 놓은 상태다.
‘규모의 경제’에 기댄 선사들의 몸집 늘리기는 초대형 선박 발주에서 끝나지 않는다. 선사들은 선박을 채우기 위해 시작된 해운얼라이언스를 통해 유럽과 북미항로에서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것에도 중점을 두고 있다. 지난해 동서항로에는 2M, O3, G6, CKYHE 네 개의 얼라이언스가 등장했다. 가장 높은 점유율을 자랑하는 얼라이언스는 머스크라인과 MSC가 결성한 ‘2M’이다. 당초 ‘P3 네트워크’라는 이름으로 선복량 기준 세계 3위 선사인 프랑스의 CMA CGM과 협력을 강화하려 했던 두 선사는 중국 상무부가 아시아-유럽 노선에서의 높은 점유율을 근거로 승인을 거부하자 즉시 2M이라는 얼라이언스를 새로 결성했다. 중국의 우려처럼 높은 점유율은 곧 높은 지배력을 의미한다. 유럽항로를 취항하는 선사들은 2M의 GRI나 임시 휴항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다. 2M의 ‘액션’에 따라 유럽항로 시황이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기선사들이 점유율 높이기에 집중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원양항로의 시황은 날로 침체되고 있다. 아시아-유럽 항로는 선복 증가로 인해 큰 위기에 처해있다. 상하이항운거래소가 발표한 5월29일 상하이발 북유럽항로 운임은 20피트컨테이너(TEU)당 342달러로 역대 최저치를 경신했다. 매달 운임인상(GRI)을 공표하고 있지만 전혀 효력이 없다. 또 선박의 캐스케이딩(전환배치)으로 남북항로까지 공급 증가가 번지면서 중남미, 호주항로 등의 운임도 나날이 떨어지고 있다. 선사 관계자들은 지난 2008년 리먼브라더스 사태 이후 최악의 시황 침체를 겪고 있다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사들이 쓸 수 있는 묘책은 얼라이언스를 통한 공동 운항으로 선복을 조절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쉽지 않다. 같은 얼라이언스에 참여하고 있는 선사들끼리 의견이 엇갈리면서 휴항 시기를 정하는 것도 어렵기 때문이다. 선복 증가의 폭이 빠른 탓에 임시 휴항 또한 전혀 효력을 내지 못하고 있다. 호주항로의 경우 지난해 비수기 프로그램 연장을 통해 선복 조절을 적극적으로 실시했으나 올해는 연장 논의를 전면 철회했다. 상반기 내내 비수기 프로그램을 가동했지만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운임 하락으로 위기에 봉착한 상황이지만 선사들은 선박 대형화 경쟁을 멈추지 않고 있다. 강한 지배력을 갖기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지만 한편으론 시황 악화를 부채질 하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에선 채 독점에 성공하기도 전에 공멸을 맞을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한 기업이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를 거머쥐고도 막대한 자금 손실로 인해 손해를 입는 경우를 경제학에서는 ‘승자의 저주’ 라 부른다. 언젠가 특정 얼라이언스, 혹은 특정 선사가 독점을 하게 되더라도 그 독점을 이루기 위해 겪어온 무리한 과정 때문에 상처 뿐인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든다. 정기선사들은 승리 아닌 승리를 꿈꾸기보다 함께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 봐야 할 것 같다.
< 이명지 기자 mjlee@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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