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 수명이 80세를 넘으면서 현대인들에게 노후 대책이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돼가고 있다. 출산율은 점점 감소하니 기자가 중장년층에 진입할 때쯤이면 부양 인구가 생산 인구를 크게 웃돌 전망이다. 이 사실을 잘 알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노후 대책을 마련하지 않는 건 현재에 급급해서다. 고정된 월급으로 매달 집세와 생활비를 내느라 바쁜 까닭에 먼 미래까지 대비해야 할 여력은 없다.
사람들이 현재에 치어 노후대책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부정기선 시장 역시 당장 눈 앞의 시황을 걱정하기에 바쁘다. 부정기선 시황을 보여 주는 벌크선운임지수(BDI)는 지난 6월 26일 824포인트로 바닥을 찍은 후 조금씩 오르락내리락 하다가 7월 9일 863포인트로 지난주 대비 27포인트 하락해 다시 내리막길을 탔다. 해운업계가 깊은 불황에 시달렸던 지난 2008년 12월의 600포인트 대까지 추락하진 않았지만 좀처럼 1000포인트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면서 신음하고 있다.
컨설팅 업체 스틸홈에 따르면 6월 중국 항만의 철광석 재고량은 1억1천만톤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두 배 이상 늘었다. 여기다가 2011년에서 2012년 발주된 대형 울트라막스급 선박들이 투입되면서 상반기 벌크 시장은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을 겪었다. 일단 하반기는 상반기보다 긍정적일 것으로 보인다. 우선 정권 교체를 이룬 인도가 사회 간접자본에 대한 활발한 투자를 약속해 교역량이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또 북미로 가는 곡물량이 늘고 각국의 경기 회복이 본격화 되면 하반기 BDI 지수는 상반기보다는 오를 것으로 벌크 선사 관계자들은 기대하고 있다.
올 3·4분기 숨 고르기에 들어간다해도 부정기선 업계가 준비해야 하는 건 눈 앞의 시황이 아닌 장기적 전망이다. 특히 국내에서도 점점 현실이 되는 대형 화주들의 해운업 진출은 벌크 선사들에게 생존에 대한 고민을 던져 줬다. 올해 3월, 정부는 ‘M&A 활성화 방안’을 발표했다. 이 방안에 따르면 우리 나라 벌크 선사들의 최대 고객인 포스코, 가스 공사 등이 해운 선사를 설립하거나 인수해 해운업계에 뛰어드는 게 가능해 진다.
대형 화주의 해운업 진출은 업계의 시장 질서를 해칠 것으로 우려된다. 정부가 해운업계에 진출한 기업들의 자사 운송 비율을 30%로 규제한다지만 대형 화주들이 자사의 수송량을 늘리기 위해 물량 자체를 늘리고 나머지 물량을 헐값에 넘겨 운임 하락을 가져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국의 경우 세계적 철광석 생산 업체인 브라질의 발레(VALE)가 해운업에 뛰어들었다 철수한 적이 있고, 호주의 BHP 빌리턴은 사업 규모를 늘리며 수송까지 영역을 넓히려 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우리 나라도 머지않아 현대글로비스 외에 또다른 대형 화주가 곧 선사가 되는 날이 올 것”이라며 이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요즘 벌크 선사 영업사원들은 단기적으로 수송을 맡기는 중소 화주들을 만나기 위해 발로 뛰기보단 사내에서 대형 화주의 마음을 잡기 위한 마케팅 회의에 참석하는 시간이 더 길다고 한다. 시황 침체와 더불어 점차 대형 화주들의 물량이 시장에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 때문에 벌크 선사들이 장기용선계약이나 전용선계약의 비중을 늘리고 있기 때문이다. 벌크 선사들은 장기 계약이 안정적으로 선사를 운영할 수 있는 길이라는 걸 몇 번의 위기 끝에 체감했다. 하지만 화주들의 해운업 진출이 본격화 될 경우 비교적 안정적 수익을 보장하는 장기 수송 계약 비중마저 현저하게 줄 것으로 보인다. 선사들은 대형 화주의 해운업 진출에 대한 뾰족한 대책을 아직까지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대형 화주의 해운업 진출을 허락한 건 부실 선사가 하루 빨리 주인을 찾는 걸 도와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 조치가 대기업의 문어발식 경영으로 작은 가게들이 도산하는 것처럼 자칫하면 중소 선사들에게 치명적인 위기를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기자가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것처럼 부정기선사들 역시 현재와 미래를 함께 고민해야 할 시기를 맞이한 것 같다.
< 이명지 기자 mjlee@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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